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64화 (64/258)

총재 정부 - 황무지의 왕 (1)

남부 산맥의 국경 수비대가 보내온 내용은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황무지의 왕을 자처하는 오크가 우리 쪽 고위층과의 대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프랑지아에서 야만족의 이미지라고 하면 대화 따위는 불가능한 미개한 짐승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국경 수비대의 보고에 따르면 저들은 이미 수차례 화살을 쏴서 우리 언어로 서신을 보냈다.

꽤 흥미로운 사건인데, 국민의회에서 굳이 남부 산맥까지 가서 오크와 직접 대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중앙당의 귀족들 대부분은 다른 의원들보다 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애초부터 상인에 더 가까운 크리스틴과 후작 탓에 기사도와 담쌓은 나와 달리, 대부분의 프랑지아 귀족들은 기사로서 야만족과 싸워 온 이 나라의 역사를 배웠으니까.

그렇다고 들어보지도 않고 묵살했다가 저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 겸사겸사 관할인 남부군 사령관이자 의원인 내가 내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말을 타고 남부로 향하게 된 나는 고민 중이었다.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그때 나는 남부군 사령관도 아니었고, 국민의회의 일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황무지의 야만족이 왕국을 세울 정도면 어떤 식으로든 소문은 퍼졌을 테고, 남부에 있는 라파예트 영지에도 소식은 전해졌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내가 28세의 나이로 처형당할 때까지 이런 일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혁명군이 구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혁명의 승리를 선언한 시점이 무려 6년이나 앞당겨졌고, 어디서 어떤 변수가 발생했을지 모를 일이긴 하다만...

하지만 프랑지아의 변화가 황무지의 야만족들에게까지 영향을 줄 일이 있나?

크리스틴이 아키텐 상단을 통해 확인해본 바로 황무지에서 뭔가 일이 있기는 있던 모양인데...

“고민이 많으신 것 같군요, 후작 각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 워낙 특이한 일이니까요, 장군.”

내 강력한 추천으로 루이 드제와 함께 장군이 된 란 가스통은 여전히 내 호위기사일 적의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장군쯤 되면 굳이 여기까지 나를 수행하겠다고 따라나설 이유도 없는데, 굳이 따라와 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크흠, 크흠. 예전처럼 대해주시는 쪽이 더 편합니다만...”

정작 나에게 존댓말을 들은 가스통은 굉장히 어색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는 장군인데.”

“장군이기 전에, 저는 후작 각하의 기사입니다.”

가스통은 정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기사 왕국의 유서 깊은 귀족들도 이 정도로 그린 듯이 기사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데, 참 어지간하단 말이지.

나는 피식 웃고, 우리 뒤를 따르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뿐 아니라 가스통도 장군으로서 상당한 호위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된 거다.

-이번엔 경의 충성이 보답받게 해주지.

아직은 회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크리스틴과 손을 잡고 아키텐을 장악한 뒤, 에리스를 찾겠다고 함께 남부를 헤매던 가스통에게 했던 말.

그래도 장군으로 만들어줬으면 나름대로는 보답해 준 셈이니, 이제는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가스통 경.”

“말씀하십시오, 후작 각하.”

“...왜 나에게 그렇게 충성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나로서는 꽤 오랫동안 궁금해한 부분이었다.

회귀 후에는 내가 미안해서라도 잘 해주었지만, 회귀 전의 나는 하마터면 기사제에서 가스통을 죽일 뻔했다.

그 이후로 그에게 사과는커녕 불편하게 여겼다.

어차피 빌미였을 뿐 후작은 그가 아니라도 내 흠을 찾아내서 내 권위를 깎으려 들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에게 패배해서 내가 귀족의 수치로서 비난받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통은 끝까지 기사로서 나에게 충성을 바치다, 혁명군에게 패배해 전사했다.

가스통은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나와 동년배치고 과묵하고 용맹한 기사의 표본 같던 남자가, 어째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말하기 곤란한 것이 아니라면 들어보고 싶은데.”

“후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아버지는 용병이었습니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보람 없는 직업이었죠.”

“그래, 잘 알지.”

다름 아닌 라파엘 발리앙도 용병 출신이니까. 그쪽은 용병 중에서도 능력 넘치고 운도 좋은 타입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시면 입버릇처럼 용병이 얼마나 더러운 일인지 말하고, 저는 용병 같은 거 하지 말고 귀족가에 들어가서 기사의 종자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귀족과 기사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 보니 용병에 비해 기사가 너무 멋져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실소를 억누르려고 무진 애썼다.

명예로운 기사들의 왕국, 프랑지아.

당연히 이 나라에서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을 한없이 미화하고 포장한, 명예와 꿈이 넘치는 영웅들의 서사시다.

그러고 보니, 가스통은 에리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게 들었었지?

놀라운 용맹에 비해 더없이 순진한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명예로운 기사를 동경하며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 기사제까지 나가게 되었는데, 크흠. 그게, 그러니까.”

“아아, 괜찮아. 지나간 일이니까. ...늦었지만, 미안했네. 나는 하마터면 경을 죽일 뻔했어.”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각하께서 겪으신 수모 때문에, 저를 내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저를 믿고 제가 후작가의 기사로 남을 수 있게 해주셨지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뻔뻔하게 해코지를 하면 양심이 없는 놈이지. 그런데 그걸 은혜로 생각한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다짐했습니다. 명예롭고 충직한 기사가 되어, 제 꿈을 이룰수 있게 해주신 각하께 도움이 되겠다고. 크흠, 크흠, 그냥 그뿐입니다.”

이, 이런. 정치적 이해고 뭐고 없는 올곧고 순진한 기사 같으니라구.

나는 내심 그에게 정치적 능력을 겸비한 보좌를 찾아내서 붙여줘야겠다고 결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새 꿈을 만들어야겠군?”

“예?”

나는 가스통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랜만에 온 라파예트 후작저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 봐. 그대가 나에게 충성과 용맹을 바치며 길을 열어주어 지켜낸 이들이야.”

가스통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우리를 마중 나온 듀몬트 남작과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폭풍의 마녀에 맞선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볼 수 있는, 자랑스러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의 사람들을.

“그대는 이미 이야기 속의 그 어떤 기사보다도 명예롭고 충직하여, 나와 내 사람들에게 차고 넘치는 도움이 되어주었으니.”

회귀 전에는 전혀 몰랐던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일 정도로, 나는 복에 겨운 놈이다.

내 약혼녀는 크리스틴이었고 기사는 가스통이었으니, 과분하기 그지없는데도 회귀 전에는 그걸 살리질 못했다.

그런데도 새 삶을 고작해야 혁명의 혼란에서 살아남아, 죽는 순간 그래도 후작보다는 나은 인간이고 싶다는 목표로 시작했지.

그러나 이제는 내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을 위해, 에리스와 함께 이 나라를 지키고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듯이.

“그대가 다른 행복도 좀 누리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조금 덜 미안할 것 같거든.”

가스통은 감동한 얼굴이 되었지만, 머리를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그래도 당장은 생각나는 것이 없군요.”

“흠, 뭐. 그러면 연애라도 해보면 어떤가?”

가스통은 헛기침을 해댔다.

이거 은근히 반응이 재밌네.

“왜, 기사들의 이야기를 동경해서 기사가 되었다며. 대부분의 이야기에 레이 디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을 텐데.”

“후, 후작 각하.”

가스통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나도 픽 웃었다.

“아아, 그만하지. 그래도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나도 기쁠 것 같은 건 사실이야.”

나는 평소에는 지극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크리스틴이 나를 보고 눈이 풀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을 떠올렸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차오르는 기분을 만끽하며, 내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건 정말,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행복이니까. 그대도 꼭 느껴보길 바라.”

-

우리는 오랜만에 방문한 라파예트 후작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듀몬트 남작은 그새 꽤 적응했는지 제법 공화국의 관료 다운 관록을 풍기면서도, 나와 가스통의 무용담에 대해 옛 라파예트 영지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아주 호들갑 떨며 말해주었다.

어째 좀 과장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집에서 가족에게 칭찬받는 기분이라 나나 가스통이나 모두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하루 쉬고 바로 출발한 우리는 남부 산맥에 도착했다.

프랑지아 왕국 남부와 소위 ‘황무지’로 불리는 이베리카 반도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산맥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 산맥을 따라 세워진 남부 요새의 장벽이 보인다.

우리는 산맥과 장벽을 구경하며 길을 따라가, 전령을 보낸 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남부 요새 제3관문 관리자, 장 오콘 소령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와주셨군요.”

“사안이 사안이니까. 그대가 전령을 보낸 책임자인가?”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이렇게 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다행?

그렇게 말하는 오콘 소령을 수행하는 부하들이 어째 좀 겁에 질린 느낌이어서,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일행에게 여장을 풀도록 하고, 바로 오콘과 면담을 시작했다.

“의회에서는 소문을 전달받았을 뿐인데, 야만족들이 왕국을 세운 건 확실한가?”

“장벽을 넘어가지 못해 제가 감히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우나,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정. 추정이라.

“근거는?”

“황무지는 척박하고 건조한 지방이지만, 거기에도 사람들은 적게나마 살고 있지요. 주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야만 부족에게 보호세를 바치며 살아가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왕을 자처한 자의 부족이 계속 확장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흠. 흥미롭군. 야만족에게 보호세를 바치며 산다?”

왕 대신 야만족에게 세금을 바치는 형태인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호해주던 부족이 전쟁에 휘말리거나 보호세를 늘 리면서 관문으로 피신해오는 경우가 늘었고, 그들에게 확인한 정보입니다.”

역시 국경지대라 그런가, 나는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런 식으로라도 공존이 가능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야만족에 대한 인식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지중해로 향하는 무역선은 대부분 프랑지아 남동부 항구인 페르피냥이나 몽펠리에를 거쳐서 갑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증언이, 포르투가 다량의 전쟁 물자를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크리스틴이 수집해 준 정보와 일치한다.

포르투는 황무지, 이베리카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작은 국가다.

국가라기보다는 도시국가에 가깝지만, 저 황무지에서 인간이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고 지중해로 향하는 배들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지아 서부의 무역항을 거점으로 삼은 아키텐 상단도 신성 교국과의 해상무역을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지.

“흠, 교역 외에는 관심도 없는 도시국가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고, 황무지에서 계속해서 야만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예, 각하.”

나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만 들어도 골치 아픈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프랑지아가 남부에서 야만족들을 전부 축출해내고 장벽을 세운 이래, 수백 년 간 황무지와의 국경지대에는 간헐적인 약탈과 그 방어전만 있었다.

그런데 부족 단위로 갈라진 무법지대로 남아있던 황무지에 야만족들의 국가가 등장했고, 그게 긴 세월 남부에서 무역 허브 역할을 해온 도시국가에 경계심을 심어줄 정도다?

언제고 게르마니아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할 입장이라, 남부에서의 공격까지 대비해야 하는 사태는 피하고 싶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서, 저들의 왕이 대화를 원한다고 했지.”

“예, 각하.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습니다만, 점점 더 무시하기 어려워져서...”

오콘 소령은 내가 불쾌해하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모양이어서, 나는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아니, 이건 보고해 준 것이 맞는 판단이었네.”

저들의 왕이 화살로 쏘아 날렸다던 서신은 나도 받아서 읽어봤지만, 조금 알아보기 힘들긴 해도 제대로 우리의 글로 적혀 있었다.

최소한 저들이 당장 프랑지아를 적대하기보다, 뭐든 대화를 원한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지.

“그런데 부하들이 꽤나 겁에 질려 있는 것 같던데, 왜 그러지? 저들이 군사적인 위협이라도-”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회-담-은-언-제-인-가-!]

우리는 분명히 관문 안에 있는데도, 마력을 가득 실은 외침에 대기가 떨리는 것 같다.

기사인 나도 피부가 쭈뼛거리며 곤두서는 느낌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래서였군?”

“소,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저자가 간헐적으로 저런 식의 독촉을 해 와서.”

“허, 어디 한 번 면상이라도 볼까.”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후작 각하!”

“경도 같이 가지.”

방에서 뛰어나온 가스통과 함께 계단을 올라 관문의 성벽 위에 서자, 관문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오.”

왕을 자처하면서 혼자라. 배짱 좋은데.

오크의 생김새는 문헌으로는 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마치 인간처럼 생겼지만 가죽바지만 입어 터질 것 같은 근육질의 녹색 피부를 전부 드러낸 상반신에, 입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나 있는 험상궂은 얼굴.

얼굴과 몸에 흉터가 가득해서 위압감을 주고, 덩치도 나는 물론이고 가스통보다도 훨씬 커 보인다.

오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나를 가늠해보는 눈치여서, 마력을 모아서 입을 열었다.

“회담을 원하나?”

“그렇다!”

“지금 내려가지.”

오크는 대답하는 대신,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로 등을 돌리자 오히려 오콘 소령이 깜짝 놀랐다.

“후, 후작 각하? 호위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슬쩍 성벽의 병사들을 바라보았지만, 오크 왕의 외침에 기가 질린 병사들은 얼굴에 핏기들이 없다.

“필요 없어. 가스통 경, 부탁하지.”

“옛!”

오콘은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척 봐도 알겠다. 병사 따위 데려가 봐야 한주먹 거리도 안 될걸?

자, 그럼.

어디 오크의 왕이 뭘 원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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