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63화 (63/258)

총재 정부 - 금권의 힘

바로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경제 문제였다.

“이대로면 프랑지아의 경제는 파탄 납니다. 당장 국가 부채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합니다.”

기세 좋은 발언이 나왔지만, 웃기게도 모든 의원들의 시선은 크리스틴에게로 향했다.

왜 크리스틴에게로 향했냐면.

놀랍게도 프랑지아 공화국의 부채 중 상당 부분은 아키텐 상단에게 빌린 돈이기 때문이다.

“...유감이지만, 아키텐 상단으로서도 더 이상 원금 상환을 미뤄드리기는 어렵겠네요.”

크리스틴은 착- 소리 나게 부채를 접어버리며 칼같이 잘랐다.

애초에 공화국 정부는 막대한 돈을 일개 상단에게 빌려놓고, 전쟁 중이라는 핑계로 여태 원금은 한 푼도 안 갚았다.

여태 이자만 냈다는 소리고, 심지어 그 이자도 꽤나 낮다. 우리가 공화국 정부에 합류할 때 어느 정도 대가성 특혜를 준 셈이니까.

“아키텐 상단이 당장 신성 교국과의 거래를 담당하며 공화국에 물자를 전달하고 있는데, 여유자금조차 없어져서야 그것도 어려워집니다.”

“크흠, 크흠. 아키텐 백작님의 말씀은 알겠으나, 아키텐 상단이 독점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화국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신다면 국민의회도 한숨을 돌릴 수 있을 테고, 프랑지아를 위해...”

“제가 프랑지아의 승리를 위해 마도 왕국에서 마력 증폭 수정을 조달해드렸지만, 그걸 의회에 청구했던가요? ‘개인적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만큼은 이미 충분히 한 것 같군요. 다른 의원 분들께서도 그 정도쯤 기여해 주신다면 저도 추가 지원을 고려해보겠습니다.”

괜히 한 마디라도 더 찔러보려던 의원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폭풍의 마녀와의 싸움에서 나나 에리스 못지않게 크리스틴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크리스틴이 보내준 마력 증폭 수정 덕분에 에리스가 우리군의 돌격로를 완벽하게 열어주었으니까.

그보다, 전쟁 중에는 매번 이렇게 의회가 일개 상단주에게 사정해가며 대출상환기한을 늘려온 건가?

개판이군, 개판이야.

만약 크리스틴이 나와 중앙당을 등에 업은 의원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그대로 떼어먹으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못하는 의원들은 속이 타는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우선 무역 봉쇄를 푸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작년에는 그래도 작황이 괜찮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중립국인 마도 왕국 외에 프랑지아와 거래를 하는 곳이 없으니...”

식량난은 그래도 내전이 끝나가며 전선도 줄고, 아키텐 상단의 활약 덕분에 어느 정도 타개되었다.

그러나 뭘 생산해도 팔 곳이 없는 상황에 경제난은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이고,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려면 무기도 많이 필요하다.

“성녀님과 아키텐 백작님이 신성 교국과 접촉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라파예트 후작님도 교국과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나는 크리스틴과 슬쩍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교국도 다른 나라들을 신경 쓸 겁니다. 어차피 아키텐상단과의 거래는 이어가고 있는데, 굳이 지금 교국의 무역 봉쇄를 풀겠다고 탐욕스러운 저들에게 대가를 줄 필요가 있을까요?”

“끄응...”

사실 아키텐 상단의 독점 무역으로 창출되는 막대한 이득 때문에라도, 나와 크리스틴이 나서서 신성 교국의 무역 봉쇄를 풀어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게다가 신성 교국은 어차피 성녀인 에리스가 프랑지아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대충 눈치 보다가 무역 봉쇄를 풀어줄 거다.

굳이 지금 크리스틴의 이익을 줄이고 비싼 대가를 치러가며 교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사실 무역 봉쇄를 빠르게 풀고 싶었다면, 루이 왕을 살려둬야 했습니다.”

자유당의 니콜라 브리소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로렌 공작이야 자업자득으로 죽었으니 빌미가 되지 않았지만, 저들은 왕의 처형에 발작하며 무역 봉쇄 유지를 주장하고 있으니까.

“혁명의 원인이자 외세까지 끌어들여 프랑지아가 피 흘리게 한 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혁명당의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바로 부정했다.

이건 민심의 문제기도 하니, 어쩔 수 없지.

내가 고민하고 있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들도 입장을 바꿀 겁니다. 저들과 당장 거래하기가 어렵다면, 아예 다른 종족의 국가들과 거래를 시도해 보는 것도 방법이죠.”

“다른 종족이라면...”

“엘프들의 차르가 지배하는 동방 제국과, 드워프들의 산맥 왕이 지배하는 알프스 왕국이 있죠.”

“으으음, 하지만 그들은 꽤나 오만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인간의 왕을 죽였다고 해서 대화 자체를 거부하진 않겠죠. 아니면, 다른 대안이라도?”

크리스틴이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묻자, 더 이상의 반박이 나오지는 않았다.

“중앙당은 아키텐 백작의 의견에 찬성하오.”

“언제까지고 저들이 무역 봉쇄를 풀어줄 것만 기다리느니,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낫겠지요.”

두 명의 총재, 앙쥬 백작과 니콜라 브리소가 동의하고.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결국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도 긍정적으로 답하면서, 무역 봉쇄 관련 의제는 일단락되었다.

다음은, 내가 제출한 의제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안경을 쓴 채 서류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님. 그랑제콜 계획에서 군사교육 과정의 전면 개편을 건의하셨지요.”

그랑제콜 계획은 정부 주도의 교육 과정 개편안이다. 그동안에 봉건정을 유지한 만큼, 프랑지아의 교육과정은 꽤나 낙후되어 있다.

그나마 있는 학교들도 신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니, 그렇지 않아도 종교를 배제하고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싶은 공화국으로서는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중 군사교육 과정을 손 보고 싶어 하는 거고.

“맞습니다, 총재님.”

“혁명당은 귀하가 제출한 군사교육 과정의 전면 개편은 보류하자는 입장입니다.”

“일단 혁명은 성공했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국가에게 무역 봉쇄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저들이 공화국을 좋게 볼 리 만무하니, 미리부터 체계를 개편하고 대비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다시 답했다.

“후작님의 뜻은 알겠으나, 조금 더 검토와 조정이 필요합니다.”

출신과 무관한 전문적인 장교 육성 계획과 일반 병사에 대한 마력 교육까지, 저들 입장에서도 내 제안이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

뭐, 그래. 우리와 정반대 입장인 혁명당이니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

“자유당도 후작님의 안건은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온건파까지?

결국 나도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들은 또 뭐가 문제라서 이러는 거야?

의원들이 내 눈치를 보면서도 저들끼리 수군대는 광경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크리스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착- 소리 나게 손에 든 부채를 접어버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 년.”

크리스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소란스럽던 의회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원금 상환기한을 추가로 보류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물론, 의회의 협조 여부에 따라서.”

이럴 때 쓰려고 단칼에 잘라둔 거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니콜라 브리소가 멋쩍어 하며 말했다.

“크흠, 크흠. 자유당은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재논의해보겠습니다.”

혁명당 내에서도 이런저런 말소리가 나오고, 결국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도 못마땅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혁명당도 긍정적으로 재검토해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지도르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10년은 늙어 보였다.

급진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재가 된, 타협하지 않는 이상주의자께선 자꾸만 현실과 타협해야만 하는 처지가 영 괴로운 모양이지.

“총재님들께서 사안의 필요성에 공감해 주시니, 아키텐도 긍정적으로 정부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크리스틴이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한 말에, 나까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 이게 바로 금권의 맛이지.

원래도 부유했던 상단에서 회귀 전의 지식을 이용한 원자재 사재기로 자본금을 마련하고, 독점 무역까지 하고 있는데 그걸 운영해온 크리스틴은 자금 운용의 천재다.

온갖 나라들에 무역 봉쇄당한 파산 직전의 빚더미 정부가 얻어맞으려니,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지?

-

논의 결과, 결국 내가 제출한 의제는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평민 군인들에게도 마력을 배울 기회를 준다. 얼핏 보면 더없이 공화국의 이념에 맞는 교육과정에 의회가 미적지근하게 나온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국민의회는 나와 귀족들에게 마력을 배운 군인들이 남부군의 영향력을 짙게 받는 내 친위세력이 될까 걱정했던 거다.

크리스틴이 파악해서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못했는데, 평민들이 마력 좀 배운다고 혁명을 부정하고 귀족의 친위대가 될 거라.

영향을 받기야 하겠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내 친위대가 된다면 오히려 혁명의 기치가 고작 그 정도뿐이라는 소리 아닌가?

하여간 걱정도 팔자야.

어쨌든 의제가 통과된 뒤, 나는 수도 뤼미에르의 프랑지아군 사령부에서 발리 앙과 대면하고 있었다.

“군사 교육 과정은 북부군과 남부군 장교들이 분담하게 될 겁니다. 마력과 기본 커리큘럼 쪽은 남부군이 전담하고, 전술 교리나 포병 운용은 북부군 쪽이 맡게 되겠죠.”

“하핫, 역시 후작님이십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통과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라파엘 발리앙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국민의회는 시간을 끌면서 최대한 내 양보를 받아내, 남부군 위주의 커리큘럼은 제한하고 북부군의 영향력을 좀 확대하고 싶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전술 교리나 포병 운용은 확실히 귀족 위주의 남부군보다는 발리앙의 북부군이 월등한 것이 사실이니, 나도 그 부분은 북부군에게 양보해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국민의회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내가 양보해서 북부군을 끼워주고, 대신 중앙당의 다른 안건들을 통과시키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아직도 국민의회의 견제 때문에 제가 곤란을 겪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싱긋 웃으며 묻자, 발리앙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인정하죠. 정치에서는 일개 군인인 제가 라파예트 후작님이나 아키텐 백작님을 당해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반칙 아닙니까? 귀족 출신이면서 그렇게 의회를 다룰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 우리가 혁명정부에 처음 가담할 때만 해도 국민의회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 안 했을걸.

“그래도 이걸로 아셨겠죠, 사령관. 국민의회야 어쨌든, 저는 북부군에 불필요한 견제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라파엘 발리앙이 무슨 야심을 품고 있든지, 외세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그는 이 나라에 필요한 인재다.

나는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을 위해 이 나라를 지켜야 하고, 라파엘은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라도 이 나라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겠지.

그거면 된다.

발리앙은 씩 웃으며 답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후작님. 남부군이 주도할 수 있던 건에 북부군도 끼워주신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발리앙과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조금 더 조율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죠.”

이제는 장군이 된 루이 드제가 들어서, 나에게 경례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발리앙 사령관 각하, 라파예트 후작 각하. 남부 산맥의 국경 수비대에서 전령이 당도했습니다. 아무래도 남부군 사령관이신 라파예트 후작각하께서 직접 들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남부 산맥.

아, 이런 제길. 그 야만족들이 세웠다는 왕국 일인가?

“후. 미안하지만 나머진 나중에 논의하죠, 발리앙 사령관.”

“알겠습니다. 남부 산맥이면 남부군 관할인데, 별일 없기를 바랍니다.”

발리앙은 씩 웃으며 답했다.

어째 저 인간이 저렇게 말하니 굉장히 별일인 것 같은데...

-

라파예트 후작과 드제가 물러간 뒤.

혼자 남은 라파엘 발리앙은 텅 빈 테이블에 턱- 하고 발을 얹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발리앙은 라파예트 후작이 퍽 마음에 들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썩 좋은 파트너고 그도 발리앙에게 협조적이니, 싫어할 만한 이유가 없는 상대다.

첫 대면부터 발리앙은 라파예트 후작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첫 대면에 품었던 기대 이상이다.

그러나 라파예트 후작은 발리앙의 제안을 거부했다.

발리앙은 능력과 야심을 모두 가졌고, 운 좋게도 출신이 아닌 그의 능력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한 번 맛본 권력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안겨주었다.

더, 더 위에 서고 싶다.

그러나 국민의회가 라파예트 후작의 견제는커녕 그에게 좌지우지 당해서야, 일개 군인에 불과한 그에게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라파예트 후작은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더 높은 곳으로 갈 테고, 발리앙은 그가 내어주는 옆 내지 아랫자리 정도에 만족해야 할 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와, 발리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시죠.”

문이 열리고, 주교복을 입은 노인이 들어섰다.

발리앙은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보며, 씩 웃었다.

“명망 높으신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슐리외 주교님.”

작가의말

동방 제국은 청의 지배 민족+피지배 민족 구조를 따오긴 했는데, 지배층인 엘프는 만주족이 아니라 러시아 황족 모티브입니다. 그러니까, 러시아황족들이 지배하는 중국 정도 되겠네요.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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