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다음 장으로
로렌 공작의 항복으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새로운 해가 된 시점.
‘빛’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밝은 햇볕이 뤼미에르 시가지에 내리쬐는 가운데, 전 시가지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프랑지아 만세!”
“혁명군 만세!”
혁명군이 중앙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행진하고,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연이어 환호하고 있다.
나는 라파엘 발리앙과 나란히 말을 타고 혁명군의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우리의 바로 뒤에서는 루이 드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고, 제롬 모렐은 의기양앙한 얼굴로 턱을 치켜세우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자유, 평등, 박애.
회귀 전에 시민들이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팻말들이 출렁인다.
처음 이 광장에 발을 들였을 때, 저들은 저 기치를 들고 나를 처형하라고 부르짖었다.
두 번째로 혁명 정부에 가담하여 이 광장에 발을 들였을 때, 저들은 의구심과 기대를 함께 담아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제 저들은 공화국의 기치를 든 채로, 나와 내 사람들을 저들을 지켜주는 자로 칭송하며 환영하고 있다.
나는 천천히 발리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리앙은 잠깐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국민의회는 전쟁이 끝났다고 정신 못 차리고, 귀족인 후작님을 견제하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게 말했지, 발리앙.
공화국에 아무리 기여해도, 이렇게 시민들의 영웅이 되어도 나는 결국 귀족이기에 전쟁이 끝나면 저들에게 견제 받게 될 거라고.
나 혼자 만이었다면, 그걸 걱정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그에게 마주 웃어주고 시선을 돌렸다.
저 앞의 단상에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많지만, 그 사이에서 크리스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가 살짝 미소지어 주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데, 국민의회의 견제 따위를 두려워할 리가 없잖나.
마침내 행진을 마친 우리 군이 중앙광장에 도열하자, 혁명당 총재 막시밀리앙이지도르가 단상에서 앞으로 나왔다.
“뤼미에르의 시민 여러분, 그리고 자랑스러운 혁명군의 제군. 그대들의 앞에서 이 선언을 할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혁명군이 자랑스럽게 도열해 그를 보는 가운데, 이지도르가 큰 소리로 선언하자-
“프랑지아의 인민들이, 혁명이 승리했습니다!”
온 광장에서 터져 나온 환성이 뤼미에르의 전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
혁명군의 개선식에서 국민의회의 수장인 각 당 총재들이 합동으로 혁명의 승리와 프랑지아 공화국이 멸망한 왕국을 계승했음을 공식 선포했다.
원래는 일반 의원이었으나 흔들리는 급진파를 수습하기 위해 총재로 추대된 막시밀리앙 이지도르, 온건파의 수장이었던 니콜라 브리소, 그리고 우리가 세운 총재 앙쥬 백작까지 총 세 명.
나와 크리스틴이 너무 젊고 할 일도 많다는 이유로 중앙당의 수장직을 고사한 덕분에, 앙쥬 백작은 졸지에 프랑지아 공화국을 대표하는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개선식이 끝나고 열린 연회에서 중앙당의 의원들이 모인 자리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정말 수고 많았소, 라파예트 후작. 후작 덕분에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변경 영주던 이 늙은이도 줄을 잘 잡아서 제법 출세했구려!”
“하하하.”
앙쥬 백작이 기분 좋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런 자리에 함께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성향의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권위로나 나이로나 앙쥬백작을 수장으로 세워서 만족하고, 어차피 나와 크리스틴이 실세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래도 좋다.
“자, 그럼 라파예트 후작과 중앙당에 영광이 있기를!”
“영광이 있기를!”
앙쥬 백작의 선창에 따라 모두가 잔을 들어 올리고, 나는 천천히 질 좋은 와인을 음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중앙당의 의원들이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생소한 얼굴들이다.
처음 우리가 국민의회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겨우 40석이었던 의석이 벌써 124석이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지.
“제가 전장에 나가있는 동안, 새로운 분들이 많아지셨군요.”
“하하하! 후작님의 활약과 중앙당의 영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거겠지요!”
이제는 나와 함께 혁명 정부에 합류한 귀족들보다 처음부터 국민의회의 일원이었거나 우리의 후원을 받아 의원직을 차지한 이들이 더 많아졌다.
“아키텐 백작의 공로가 크오. 어찌나 수완이 좋은지, 중앙당에 합류한 사람 중 반 정도는 백작의 설득에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요.”
“과찬이십니다. 편견보다는 실리와 시류를 우선하는 분들이 많았던 덕분이죠.”
앙쥬 백작의 찬사에, 크리스틴은 살짝 목례하며 간단하게 답했다.
급진파의 혁명당과 온건파의 자유당 모두 200석을 조금 넘는 수준이니, 이제 우리는 국민의회에서 확실하게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 있다.
한때 온건파와 우리가 힘을 합치고도 급진파가 과반이 넘었던 의회에서, 그 미약했던 입지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거다.
내가 세운 공들과 지난 사태로 인한 국민의회의 동요를 잘 이용했다고는 해도, 크리스틴의 수완은 대단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겠지.
그건, 그렇지만.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것 같아서 조금 불편한데.
그래도 내 심기야 어쨌든, 만찬에 나온 요리는 지극히 훌륭했다.
전장에서 먹던 것은 물론, 후작가에서 먹던 식사보다도 더 낫다.
공화국이 승전 기념 연회랍시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건지, 잘 차려입고 만 찬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물론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중요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그러고 보니, 후작께서는 루이 왕의 처형을 보지 못하셨군요.”
“저는 혁명군을 재배치하고 귀환시켜야 했으니, 일정 상 그렇게 되었죠.”
“노던 연합 왕국은 물론, 게르마니아 제국의 모든 제후국이 왕을 처형했다며 비난 성명을 보냈는데, 크라프테 왕국은 보내지 않았다더군요.”
“흠. 그 대왕은 우리를 좋게 보는 걸까요?”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계몽군주를 자처한다고는 해도 그자도 왕입니다. 그보다는 제국 황제의 뜻을 노골적으로 거스르며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크라프테 왕국.
게르마니아 제국의 선제후국이지만, 일개 제후국이라기엔 제국에 반기를 들고 승리하여 제국 내에서 영토를 확장한, 군사 강국.
제국의 명목상 영토는 중앙 대륙의 중부를 다 차지할 정도로 광활하지만 대부 분 제후국들이 다스리고, 막상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영역은 그리 크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저들의 대왕은 유능한 군주이자 알아주는 명장이기까지 하니, 당장 저들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건 어쨌든 긍정적인 일이다.
...황제를 적대하는 크라프테 왕국을 이용해서 제국이 프랑지아를 제대로 노리지 못하게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최선일 텐데.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다른 화제가 나왔다.
“아, 황무지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후작님?”
“황무지의 소식이라고 하시면?”
“예, 듣자 하니 남부 산맥에서 황무지의 야만족들이 왕국을 세웠다는 소문이 돈다는군요.”
“...야만족들이 왕국을 세웠다고요? 사실이라면 놀랄 일이군요.”
황무지는 프랑지아의 남부 산맥 너머에 자리한 척박한 반도를 말한다.
그곳에서는 소수의 도시를 제외하면 야만족으로 통칭되는 오크와 고블린들이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꽤 오래전에는 저들이 산맥을 넘어와 프랑지아 남부를 약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지아가 기사들의 왕국으로 거듭나 저들을 몰아내고, 남부 산맥을 요새화한 뒤에는 변방의 야만족들 정도로 치부되었는데...
그런 족속들이 프랑지아의 남쪽에 왕국을 세워?
“별로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군요. 사실 여부를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하하, 물론 명장으로 이름이 자자하신 라파예트 후작님이 계시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의원이야 정말 별생각이 없어서 하는 소리겠지만...
내가 프랑지아의 남부군을 통솔하는 몸이고, 나와 크리스틴은 물론 우리 당의 귀족 상당수의 자산이 남부에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된다.
게르마니아 제국과 어비스 코퍼레이션만 해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별일 없으면 좋으련만.
-
만찬이 끝난 뒤.
나는 정말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에 응해준 끝에, 녹초가 되어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만찬 때까지만 해도 할 만했는데, 중앙당의 실세면서 혁명군의 영웅이 된 나에게 관심을 가진 자들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변경 귀족이어서 중앙 정계의 사교 문화 따위와 담쌓은 나에겐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이쪽이 더 피곤한데...
와중에 내가 크리스틴과 다시 약혼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인지 이상한 수작질을 부리는 놈들까지 있어서 더 짜증 났다.
“후우우...”
그래도 발코니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한숨을 돌리고 있으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크리스틴은 아직도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나도 적당히 놀고 다시 들어가 볼까.
그렇게 생각할 때쯤, 문 쪽에서 통통 튀는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등을 돌리자 발코니의 문이 조금 열리고, 익숙한 하얀 로브 차림의 에리스가 몸을 반쯤만 내밀었다.
보나 마나 에리스에게 드레스를 입히려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텐데, 결국 에리 스가 승리한 건가.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네, 에리스.”
“오랜만이에요, 후작님.”
에리스는 슬며시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가 발한 빛은 내 몸에 있던 피로를 깔끔하게 날려주었다.
“고마워.”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도움이 되었나요?”
“...굉장히. 어째, 전보다 능숙해진 것 같은데?”
“그러게요. 많이 쓰면 능숙해지는 것 같네요.”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굳이 발코니에 들어오지 않고, 문에 저렇게 걸쳐 있는 건 그녀 나름의 배려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후작님. 루이 왕. ...오라버니의 턱, 마음대로 고쳐버려서.”
나는 기껏 치료 해줘도 루이 왕이 에리스에게 폭언을 퍼붓고, 그녀에게 죄책감을 안겨줄 것을 걱정해서 고쳐줄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글쎄, 네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서 한 거겠지.”
그러나 에리스에게 턱을 치료받은 루이 왕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에게 폭언을 퍼붓고 조롱하며 열광하던 자들도, 반복적으로 죄를 인정하며 사죄하던 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순간에 이르자 도리어 고요해질 정도로.
어쩌면, 루이 왕이 혁명군의 단두대에 의해 처형당한 마지막 인물이 될지도 모르지. 그저 희망사항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대체 뭘 한 거야?”
처음 전해 들었을 때는 나도 그가 내가 아는 루이 왕이 맞는지 의심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면 그런 자가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에리스는 싱긋 웃기만 했다. ...그 미소는 조금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글쎄요. 그래도 제게 화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이제는 내게 후원받는 어린 성녀님이 아니니까. 나는 네 의지를 존중해.
하물며, 이번엔 결과도 좋았잖아.”
에리스가 그런 걸 원해서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호송 행렬에서 정성스럽게 루이 왕을 돌본 에리스는 구체제의 타락한 왕마저 회개시킨 성녀로 더욱 칭송받게 되었다.
나는 이제 성인이 된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가 뭔가를 알려주고 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이겠지.
그 대신, 나는 존경받아 마땅한 성녀이자 내가 섬길 왕녀에게 경애를 담아 말했다.
“성년이 된 걸 축하드립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
“고마워요,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에리스는 그렇게 작게 답하곤 씩 웃더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키텐 백작님-!”
“서, 성녀님.”
드물게 당혹하는 듯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실랑이 끝에 크리스틴을 발코니로 들여보낸 에리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괜스레 손에 든 부채로 부채질을 하는 크리스틴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제가 먼저 데리러 가야 했는데, 도움을 받았군요.”
“언제 와서 절 빼주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경 쓰이는 사람과 대화하느라 바쁘시더라고요.”
크리스틴이 부채를 착 접고는 슬며시 눈을 흘겨서, 나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합니다. 대신이라긴 뭣하지만...”
나는 코트에 미리 넣어두었던 부채를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늦었지만 약혼 선물입니다.”
“이건...”
크리스틴은 그것을 받아서 살펴보다가, 손잡이 쪽에 박힌 마석을 보고 눈을 휘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에게 준 것처럼 브로치나 약혼에 어울리는 반지 같은 걸 선물할까 했지만, 그녀가 늘 입는 검은 드레스가 상복의 의미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귀금속 장식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것도. 결국 고민한 끝에 그녀가 그나마 평소에 쓰는 걸로 아티팩트를 주문한 것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크리스틴도 내가 많은 것 중 하필 부채를 고른 이유를 바로 이해했는지,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피에르.”
“언젠가.”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돌려준 그녀가 죄책감과 짐에서 해방되어, 상복을 벗게 되는 날.
“우리가 완전히 함께 하게 될 날까지, 제가 없는 순간에도 그 징표가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크리스틴은 부드럽게 웃더니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릴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저나 당신이나 그때까지 무척 바쁠 테니, 시간은 빨리 가겠죠.”
드디어 부패하고 타락한 구체제의 왕국이 완전히 무너졌으나, 이제 겨우 첫 단계를 넘어섰을 뿐이다.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나는 미소 지으며 크리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저를 믿어주세요. 저도 당신을 믿으니까.”
크리스틴도 마주 웃으며, 내게 손을 건네면서 답했다.
“기꺼이.”
그래도 우리가 함께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