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죄의 무게
“어떤 가능성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손에 있는 보물을 썩히고 있는 자들과 달리, 저와 후작님이 함께 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라파예트후작님, 저와 함께 역사에 가장 위대하게 남을 신화를 써보지 않겠습니까?”
나는 가만히 내게 내밀어진 발리앙의 손을 바라보았고, 내 표정을 본 발리앙은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으음, 생각보다 반응이 영 별로시군요?”
“제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발리앙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반반 정도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아키텐 백작님이 겪으신 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이 날카로워졌는지, 발리앙은 즉시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어어, 오해는 마시죠. 만약 우리가 대립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저는 아키텐백작님에겐 절대 손댈 꿈도 꾸지 않을 겁니다.”
발리앙은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덧붙였다.
“전 영광스럽게 오래 살고 싶거든요.”
나는 그제야 그에게 픽 웃어주었다.
“그래요. 발리앙 장군이 아시는 대로, 저는 국민의회와 저들이 내세운 질서를 부정했습니다.”
나는 격노한 나머지 크리스틴을 죽이려 한 의원들은 물론, 그들의 수행원까지 몰살시켰다.
국민의회와 공화국 법에 따라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고, 나 자신도 그 행동이 정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회 자체를 혐오하고 있냐면, 그건 아직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조차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하고 태도를 바꿨다.
비록 내 노력에 의한 결과일망정, 국민의회는 서부지역 사람들과 타협하여 그들을 받아들였다.
“흠, 아직. 입니까.”
“예, 아직.”
외세와의 전쟁이 당장 끝났으니, 국민의회에도 무언가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
저들이 다시 정신 못 차리고 같은 짓을 반복하려고 하면, 발리앙 말대로 저들을 아예 엎어버릴 생각도 있다.
그러나 무수한 피를 흘리며 간신히 구축된 공화국이고, 나름대로의 이상을 걸고 있는 국민의회다.
그 모든 희생을 수포로 돌려가면서까지 국민의회를 엎으려면, 대안이 저 차악보다는 확실히 나은 길이어야 할 텐데.
“저는 장군이 한 제안에서 저 국민의회를 엎어버릴 정도의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번엔 발리앙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떤 부분이 문제입니까?”
“장군. 프랑지아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닌지요?”
“...”
“우리는 당장 수년간 내전을 벌였습니다. 국민개병제와 공화국의 드높은 사기의 힘으로 루이 왕을 물리치고 외세를 패퇴시키긴 했지만, 그런다고 피폐한 국내 상황이 단기간 내에 원상복구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발리앙은 미간을 구기며 반박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국민의회 같은 비효율적인 체제를 타파하고 효율적인 정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장군도 아시다시피 저는 국민의회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개선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걸 전부 날려버리고 장군을 선택하려면 그만한 무언가가 보장되어야 할 텐데...”
크리스틴이 우리를 위해 국민의회에서 동분서주하며 중앙당의 입지를 강화해 왔는데, 능력으로나 개인으로나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그녀가 다져준 기반을 버리고 발리앙과 손을 잡으라고?
“장군의 목표를 듣자 하니, 우리의 적을 지나치게 무시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면 우리를 과대평가하시는 거던가.”
이번에는 발리앙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확실히 발리앙 장군은 엄청난 군재를 지니고 계십니다. 군재만 보면 저보다 위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군이 제국과 대륙의 외국들을 상대로 필승할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적어도 저 구체제의 고루한 자들에게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예, 당장은 이기겠죠. 평민들에게 마력을 다루도록 교육하고, 혁명의 기치를 믿고 따르는 병사들을 앞세우면 당연히 승리를 거둘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 저들을 모두 무너트리고 대륙의 패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으십니까?”
발리앙이 말한 대로, 중기병들에게 마력을 가르친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많은 제국의 기병대를 상대로 선전했다.
물론 중기병들은 기사 다음가는 단련된 병사들이라서 더 빨리 배우고 적성 있는 자들이 많았던 거고, 일반 병사들은 더 어렵겠지.
그래도 모든 병사들이 마력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발리앙의 말대로 획기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적들도 바보는 아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당하겠지만, 저들도 언젠가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거다.
“당장 우리와 싸워본 레오폴트 대공이라면, 기사들 다음으로 많은 훈련을 받고 충성심도 높은 중기병들에게 마력을 가르친다는 발상 정도는 하겠죠.”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증인 아닌가.
회귀 전 내전에서 발리앙에게 패배하며 배운 그의 기술을 회귀 후에 그대로 쓰며, 두각을 드러낸 것이 나다.
“마력을 다루는 우리 군사들에게 연패한다면, 저 구체제의 권력자들도 최소한 충성심이 검증된 군대에게 마력을 가르치는 정도는 시도하겠죠. 장군과 우리가 가져갈 우위가 얼마나 길게 갈 것 같습니까? 길어야 수 년, 짧으면 한차례의 전쟁에 불과할 겁니다.”
발리앙은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반박했다.
“글쎄요, 루이 왕과 저 어리석은 귀족들을 보시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된 자들이, 수백 년을 막아온 평민의 마력 운용을 그렇게 쉽게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운이 좋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작 그 정도 기대만을 품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위대한 제국을 일으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게 청기사와 다른 것이 뭐지?
“반대로 장군은 적들이 모두 루이 왕과 그 귀족들만큼 어리석을 거라 단언하십니까? 저들이 지킬 기득권 자체가 우리에게 위협받는다면, 결국엔 저들도 승리를 위해 차악을 고려할 겁니다.”
발리앙은 취기가 올라와 붉어진 얼굴로 빈 와인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더니, 그것을 다시 마셨다.
“이거야 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족이면서 혁신의 중심에 서 있는 후작님이 말씀하시니 반박할 말이 궁하군요.”
잔을 내려놓은 발리앙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아직은 제가 후작님께 확신을 드리지 못하는 것 같군요.”
“취기가 올라 하신 말씀 정도로 여기겠습니다.”
어차피 아직은 나와 그가 완전히 대립하지 않았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다.
나도 국민의회를 주시하고 있으니 전쟁이야 어쨌든, 혹시라도 그와 손잡을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발리앙은 와인 잔을 빙빙 돌리다가 물었다.
“그러면 저도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군요, 후작님. 당장 외세는 전쟁을 준비할 텐데, 국민의회는 전쟁이 끝났다고 정신 못 차리고 귀족인 후작님을 견제하고 싶어 할 겁니다. 제 제안을 거부한 후작님께는 대안이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슬며시 웃어 보였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발리앙의 제안을 거부한 가장 큰 이유다.
야욕을 드러낼 게르마니아 제국의 명분을 대폭 약화시켜 시간을 벌면서 국민의회의 신분 갈등까지 완화시켜줄 왕녀님이 계신데, 그 왕녀님은 제국을 세우기 위해 의회를 엎어버리고 전쟁하자는 의견에 찬성할 리가 없거든.
-
수도 뤼미에르로 향하는 호송 행렬.
루이 왕은 몇 번이고 구토한 끝에 타는 듯한 갈증과 심각한 허기를 느꼈지만, 그에겐 그것을 호소할 턱조차 없다.
루이 왕의 상태가 어떻든 수레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길을 따라 이동하고, 그가 갇힌 죄수 호송용 수레의 옆에서 반란군이 걷는다.
편안하고 안락하던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목재 수레의 바닥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린 몸은 지치고 축 처졌다.
그를 둘러싼 반란군은 몇 번이고 지려버려서 악취가 나는 그의 몸을 닦아줄 생각은커녕, 경멸과 증오심만을 표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태도에 분노했으나, 발목에 마력을 억제하는 족쇄가 채워진 그에겐 목재 수레를 부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극한의 고통과 멸시는 그가 찌들어 있던 허영심과 권위의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것에는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덜걱거리는 수레에 무력하게 갇힌 채, 루이 왕은 흐릿한 시야로 지나가는 길바닥만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추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이토록 추했더라면, 기사들이 그를 따르고 선왕이 차남인 그를 총애했을 리도 없을 터다.
그러나 긴 세월 형과 경쟁하며 왕위를 노리고, 긴 내전이 이어지는 사이 현실과 측근들의 압박 속에 하나씩 변화해 나갔다.
왕위에만 오르면,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만 되면.
언젠가 올 그때를 위해 처음 옥좌를 바랄 때 품었던 가치와 이상을 조금씩 포기하고, 버렸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핑계로 그렇게 타락한 끝에 남은 모습은 그 자신이 보기에도 추악했다.
정작 그렇게 옥좌를 차지하고도, 이미 지난 세월 쌓아올린 짐의 무게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국왕으로서 그가 누린 시간은 고작해야 2년 남짓.
그나마도 형을 지지하던 자들의 잔당과 반란군을 상대로 싸우느라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다.
루이 왕의 두 눈을 타고 덧없는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가며 권력을 탐했던가.
턱없는 목에서 새어 나온 것은 제대로 된 흐느낌조차도 되지 못한 괴성에 가까웠다.
자신은 대체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기에,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가.
수레가 덜걱거리던 소리가 그치고, 행렬이 멈춰 섰다.
“잠시 휴식! 식사하고 다시 이동한다!”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멀어져 가지만, 루이 왕은 외면 속에 수레 바닥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레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실례합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부드러운 목소리.
조심스러운 손길이 루이 왕을 수레 바닥에 돌려서 눕히자, 하얀 로브에 후드를 쓰고 베일까지 드리운 사람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이 행렬의 온갖 인간들에게 증오와 혐오만을 받는 그와 달리, 경애와 존경으로 가득 찬 환영만을 받는 존재.
처음에는 루이 왕도 성녀에게 울분과 증오를 토해내었다.
그러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그것들은 어느 것 하나 남지 않았다.
“목이 마르시죠.”
루이 왕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들은 에리스는 천천히 그의 턱에 감긴 붕대를 풀어주고, 손에 든 물병을 기울여 그의 목에 물을 흘려주었다.
루이 왕은 그가 물을 마시다가 숨이 막히지 않도록 시종일관 조금씩, 천천히 흘려 넣어 주는 물로 갈증을 달랬다.
절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을 사람이라기보다 짐승처럼 취급하는 이 행렬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람 취급이라도 해주고 신경 써주는 것은 이 성녀뿐이다.
성녀는 잘게 으깨고 끓여 적당히 식힌 죽을 똑같은 방식으로 루이 왕에게 먹여주었다.
마침내 한숨 돌린 루이 왕이 성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루이 왕은 성녀의 손에 글씨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했다.
턱이 없어진 그가 이런 식으로라도 의사 표현을 하고 싶어도, 응해주는 것은 성녀뿐이다.
[수도에 다 온 건가?]
“네. 오늘 밤이면 도착할 거예요.”
[짐은 처형당하겠지?]
“...네. 아마도.”
루이 왕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성녀의 표정은 알 수 없다. 베일 너머에서 보랏빛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그 대화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성녀가 그에게 먹인 물병과 죽 그릇을 갈무리해서, 루이 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성녀가 시선을 돌리며 손을 내밀어서,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한 루이 왕은 다시 그녀의 손에 글씨를 썼다.
[얼굴이라도 보여주지 않겠나?]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인 성녀가 후드 안으로 손을 뻗어 베일을 걷어 내렸다.
처음으로 마주한 성녀의 얼굴에, 루이 왕은 눈을 부릅떴다.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백색, 또는 은빛으로 보이는 머리칼.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성녀의 신비한 외모에 대해서는 루이 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왕이 놀란 것은 그녀가 그가 아는 누군가와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선왕의 후궁이 된 코르티잔과 닮은 얼굴.
궁 안에서는 쉬쉬했지만 왕자인 그는 그녀의 딸이 햇빛에 취약하고 보라색 눈동자에 은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연결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충격받은 루이 왕이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3왕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인사드립니다, 오라버니.”
루이 왕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더듬더듬 글씨를 그렸다.
[살아있었구나.]
“네.”
[네 어머니는?]
에리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루이 왕이 다시 글씨를 그렸다.
[나는 지옥에 가겠지?]
“...”
에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이 왕은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고해성사를 해주지 않겠나?]
“저는 사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보다 신께 가까운 성녀가 아닌가. 네가 고해성사를 해준다면 신께서-]
절박하게 매달리는 루이 왕이 글씨를 다 쓰기도 전에, 에리스가 쓰게 웃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걸까요? 그런다고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갈까요?”
루이 왕은 멍한 눈으로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사실 이러면 지옥에 간다, 저러면 천국에 간다, 그런 거 안 믿거든요.
왜냐면...”
에리스는 쓰게 웃었다.
“어머니는 자살하셨으니까. 사제님들 말대로면 어머니는 지옥에 가셨을 거잖아요? 좋은 분이셨는데, 그러면 안 되니까.”
에리스가 천천히 손을 뻗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루이 왕의 몸을 감쌌다.
루이 왕의 몸에서 뻐근함과 아직까지 남아있던 고통이 가시고, 조금이나마 활력이 차올랐다.
“그래서 엄청나게 신을 원망했는데, 아직까지도 힘은 잘 쓰고 있네요.”
루이 왕은 천천히 에리스의 손에 글씨를 썼다.
[성녀가 신을 원망한다고?]
“네. 그런데도, 혹시나. 혹시라도 정말로 어머니가 지옥에 계시면 어떡하지, 해서. 그래서...”
에리스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저는 정말로 모르겠지만, 만약, 만약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람이 한 행동에 따라서 갈리는 거라면, 그러면 제가 선행을 아주 많이 하면 어머니의 죗값을 대신 치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에리스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거 사실 비밀이에요. 저를 도와주는 분이 계신데, 제가 대체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거든요. 제가 이렇게 이기적인 이유로 착하게 군다는 걸 알면, 그 사람 분명 환멸 하겠죠.”
루이 왕은 움직이지 못했고, 웃음기를 지운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행보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고, 제가 감히 그들을 대신해서 용서해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오라버니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짐이니까.”
[내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건가? 속죄해도?]
“속죄하는 건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거라 기대해서가 아니라, 죄를 지었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지는 그 사람들과 하늘의 신께서 정하시겠죠.”
누이는 그를 용서해주지도, 그가 책임에서 눈을 돌려도 된다고 해주지도 않았다.
루이 왕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에리스가 루이 왕의 없어진 턱이 있던 자리에 손을 뻗었다.
순간 빛이 그의 턱을 휘감고, 루이 왕은 격렬한 통증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마침내 빛이 걷혔을 때, 루이 왕은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멀쩡해진 턱을.
“헉, 허억. 터, 턱이...”
얼마 만에 내보는지 모를 인간의 언어에 루이 왕이 자신 스스로도 충격에 빠져있자, 에리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기회는 드렸으니 오라버니에게 증오와 복수심을 품은 이들과 마주했을 때 자신의 죄를 속죄할지, 하지 않을지는 오라버니께서 결정하시겠죠. 오라버니를 용서할지, 하지 않을지는 그들과 신의 몫이고.”
루이 왕이 두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에리스가 두 손을 뻗어 루이 왕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도 기도는 해드릴게요. 오라버니께 증오와 복수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기를, 오라버니께서 신의 품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평안할 수 있기를. ...저 같은 애한테도 계속 힘을 주시는 신이라면, 생각보다 관대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에리스는 저 멀리에 있을 수도 쪽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오라버니 대신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선행을 할게요. 그걸로 오라버니가 질 죄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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