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58화 (58/258)

혁명기 - 균열

어비스 코퍼레이션.

자욱하고 탁한 안개로 뒤덮여, 햇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하늘 아래 위치한 도시 판데모니움.

수백 년 전에는 마왕이 다스리던 국가의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도가 된 도시의 이름만이 예전의 명맥을 잇고 있다.

심연처럼 어두운 하늘 아래 빼곡이 자리한 건물들은 태양이 발하는 빛 대신 마도공학 조명을 받아 빛나고, 밝은 조명이 드리운 그림자들 아래로는 마치 바싹 말린 인간처럼 보이는 ‘드론’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시가지.

도시 정중앙의 시계탑이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할 때쯤, ‘슬로스’사의 대표이사 파이몬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회의석상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군. 그러면, 어비스 코퍼레이션 정례회의를 시작한다. 각 사 대표이사들은 정례보고를 하도록.”

반으로 쪼개진 마왕의 관으로 양 어깨를 장식하고, 등에 쌍검을 찬 악마.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 바엘이 선언하기가 무섭게, 멋들어진 제독 모자를 쓰고 손으로 권총을 휙휙 돌리고 있던 악마가 입을 열었다.

“라스 사는 특별한 문제없음! 아, 동대륙 남부에서 동방 제국의 엘프들과 마찰이 증가 중! 전쟁 허가를 바람!”

“기각한다, 바르바토스. 지난 회의에서 아직 기대 수익에 비해 비용이 높다고 결론 내렸을 텐데. 바싸고...는 이번에도 불참이군.”

“부- 부- 라스 사의 직원들은 전쟁을 갈망함!”

제독 모자를 쓴 바르바토스의 항의는 바엘에게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러자 옆에서 회의석상에서 와인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고 있던 악마, 살레오스가 입을 열었다.

“킬킬, 여기 참석하는 것보다 돈 버는 것이 더 급한 모양이지. 그런 회사니까. 글러트니 사도 이상 없소. 동방 제국의 엘프들이 고상 떠는 동안, 인간들은 아편이라면 죽고 못 살게 되었거든.”

“러스트 사는 특이사항 있어요~ 슬로스 사에서 요구하는 인간 수량은 계속 늘어나는데, 인간 수급량은 늘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구요~ 조치가 필요합니다!”

러스트 사 대표이사 그레모리의 발언에, 바엘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대책을 강구해보도록 하지.”

그때까지 회의 테이블에 반쯤 엎드려있던 파이몬이 일어났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다리를 꼬고, 그 위에 걸친 백의의 옷매무새를 매만진 파이몬은 매혹적으로 웃었다.

“어, 러스트 사의 그레모리는 슬로스 사의 파이몬에게 항의합니다~ 그런 행동은 러스트 사의 전매특허인 것입니다~”

“저런, 상업적으로 활용한 것도 아니니 친애하는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께서양해해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로서, 프라이드 사에 항의하고 싶습니다.”

“항의라.”

바엘이 슬며시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파이몬은 피처럼 붉은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여유작작한 태도를 유지했다.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입을 열어, 아름다운 음색을 낸다.

“프라이드 사는 7개사의 일원이면서 사실상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뇌로서 내부를 감시하고, 대외전략을 담당해왔죠. 그런데, 흐음. 이렇게 말씀드리자니 조금 미안하지만 최근 프라이드 사의 실적은 다소...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네요.”

“프랑지아 건은 당사에서 상정하지 않은 불확정 변수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준수한 실적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바엘이 반박했지만, 파이몬은 여전히 느긋한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라파예트 후작을 처리하려던 프로젝트가 실패해 루이 왕에게서 원금을 회수하려다가, 의도한 것보다 혁명이 너무 빨리 터졌죠. 결과적으로 프랑지아 내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자산을 잃게 한 그 프로젝트에 대해, 슬로스 사에서 반대를 표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테고.”

바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키텐 백작에게 잠입한다던 할파스는 실종되더니 교황의 소장품이 되어 있질 않나. 프랑지아의 내부 분열을 충동질해서 아키텐 백작을 살해하려던 것도 실패해서, 도리어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의 입지가 강해졌죠.”

말을 마친 파이몬은 느긋하게 뜸을 들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총체적인 실패로 인간 수급도 여의치 않아 슬로스 사와 러스트 사가 입고 있는 손실을 봤을 때, 프라이드 사가 과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외전략을 전담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바엘의 손이 등에 맨 검을 잡았고, 그걸 본 파이몬이 입을 다물면서 일순 정적이 흘렀다.

“싸움이야? 나도 끼워 줄 것을 요망!”

라스 사의 대표이사 바르바토스가 쾌활하게 웃으며 빙빙 돌리던 권총을 척-잡자 바엘이 천천히 검에서 손을 떼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바엘이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사칙 제1조 3항. 어비스 코퍼레이션 구성원 간의 모든 수단의 분쟁을 금지한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직, 간접적인 위협을 가한 경우를 제외하고. 따라서 싸움은 허용하지 않는다, 바르바토스.”

“부- 부-”

바엘은 바르바토스를 무시한 채 파이몬을 노려보았고, 파이몬은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로서, 슬로스 사와 러스트 사가 손실을 보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책을 마련하겠다. 이상. 회의를 종료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바엘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회의는 그대로 끝났다.

회의장을 나서, 공간이동 장치를 통해 자신의 방에 돌아온 파이몬은 의자에 털썩 앉아 양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아, 이 오싹한 감각.”

바엘이 검을 잡은 순간, 전신에 내달리던 섬뜩함.

수백 년 만에 맛본 공포와 긴장감은 환희와 다를 바 없었다.

과연 마왕을 직접 참살하고 사실상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장을 차지한 자.

수백 년이 지났지만 그 자의 육신과 영혼 어느 쪽에도 지방 따위는 끼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잠시 황홀감을 느끼던 파이몬은 시선을 돌려, 그의 책상에 놓인 프랑지아의 신문을 바라보았다.

라파예트 후작의 그림이 그려진 신문.

그것을 보던 파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결국 자신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인간이자,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프랑지아에서 꾸며온 온갖 계획을 다 망쳐놓고 있는 남자.

파이몬은 신문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남자의 그림에 입을 맞췄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고말고, 실물에게 할 기회가 온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마왕의 나라 판데모니움을 내전으로 무너트리고 세워진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7개 회사 간의 모든 분쟁을 원천적으로 금지한다.

다른 회사의 영역에 간섭하거나 경쟁하는 것조차. 그 결과,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 파이몬은 ‘나태’외의 어떤 영역에도 손을 대지 못한 채 수백 년을 지내왔다.

다른 대표이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파이몬은 이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분노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켜보고 싶고, 색욕에 취해 허덕이는 자들을 탐닉해보고 싶으며, 질투에 사로잡힌 자들의 악행을 종용하고, 폭식과 탐욕의 욕망도 숨기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정점에서 다른 이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지배하는 쾌락을 만끽하고 싶었다.

애초에, 악마들이 더없이 질서에 가까운 형태의 기업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아이러니다.

악마라면 마땅히 혼돈을 추구해야 하건만.

그래서 파이몬은 라파예트 후작, 그 이레귤러를 사랑했다.

수백 년간 7개 기업의 분업 하에, 모든 것을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해온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뒤흔들고 있는 그를.

무너져가는 구체제에서 귀족의 수치로 시작한 자가 크리스틴 다키텐을 손에 넣고 공화국에 투신해, 이제는 성녀까지 두각을 드러내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계획을 망치고 있다.

그는 과연 얼마나 더 많은 걸 해내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응원할 테니 더 힘내 봐요, 라파예트 후작님.”

파이몬은 진하게 웃으며, 피에르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였다.

“이 지긋지긋한 질서에 더, 더, 더 많은 균열을 만들어 줘요.”

-

짧지만 따뜻한 시간을 함께 보낸 크리스틴이 뤼미에르로 귀환하고 며칠 뒤.

나는 랭스에 남아 치료받던 부상병들과 에리스, 가스통, 데미앙을 비롯한 잔류인원을 이끌고 바후아로 향했다.

“라파예트 장군님!”

“라파예트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시가지에 있던 군사들이 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경례하고, 그들에게 경례로 화답하고 있자니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공화국에 투신할 때만 해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이런 입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분 괜찮군.

“오오, 성녀님도 계시다!”

“어디, 어디?”

“성녀님! 성녀님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에리스의 인기는 나보다도 더 대단하다.

햇빛이 있는 평소에야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지만, 막사에서 병사들을 치유하고 다니던 그녀의 신비한 외모와 자애로운 행적은 이미 유명하다.

“으으, 이런 건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에리스가 슬쩍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여서, 나도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전장에서는 신성력으로 군대를 보호하고, 전투 후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부상병을 보살피는 아름다운 성녀. 전장에 서는 남자들에게 인기 없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아?”

“으, 으아! 후작님의 입으로 들으니까 더 오그라들 것 같아-!”

에리스가 경기하며 화다닥 떨어졌다.

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말없이 나를 따르고 있는 가스통과 어째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데미앙을 보았다.

가스통도 분명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을 텐데, 역시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건 눈에 띄는 상급자인가.

언젠가 가스통에게 충성에 합당한 대가를 꼭 쥐어주고 싶다.

...데미앙 놈이야 아무래도 좋고.

그렇게 군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마중 나온 인사들과 조우했다.

“어서 오십시오, 라파예트 후작님! 후작님의 빠른 결단 덕분에, 바후아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점령했던 도시를 되찾아서인지, 라파엘 발리앙의 얼굴은 지극히 밝다.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인가 나를 장군이 아닌 후작으로 부르기 시작했지...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나는 속내를 숨긴 채 그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발리앙 장군님의 신속한 기동 덕분이겠죠. 수고하셨습니다. 아, 드제 경도 수고했네.”

“하하, 감사합니다.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뵈니 기쁩니다.”

루이 드제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솔직히 데미앙만 있을 땐 내가 불안해서 뭘 맡기질 못했는데, 그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스통과 드제는 내가 꼭 출세시켜준다.

“게르마니아 제국과 노던 연합 왕국의 군대도 철수했으니, 이제 루이 왕과의 결판만 남았군요.”

드디어 이 부패하고 타락한 왕국에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 왔다.

그 무능한 왕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아, 그거 말입니다만...”

발리앙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실은 저들의 밀사가 방문해 있습니다.”

“밀사요?”

“예. 자신이 펠포드 백작이라고 주장하는 자입니다만.”

펠포드 백작이라면, 로렌 공작의 오른팔 쯤 되는 봉신이네.

“아, 뭐라고 합니까?”

“하핫, 그쪽이 부득불 후작님과 대화하겠다고 우겨대서 말입니다. 일단은 잘 모셔뒀는데 치워버릴까요?”

발리앙은 눈을 빛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솔직히, 그냥 치워버려도 될 것 같긴 한데...

“뭐, 밑져야 본전이니 만나는 보겠습니다.”

혹시 누가 아나? 저들이 워낙 크게 데이고 위기에 몰리니 정신을 차려서, 좀 말 되는 제안을 들고 왔을 수도 있지.

-

그러나 나는 준비된 숙소에서 마치 초대받은 귀족인 것처럼 우아한 옷을 입은 채, 시종이 준비해준 홍차를 권하는 펠포드 백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우리가 같은 깃발 아래에서 싸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빠르군요. 후작님의 엄청난 무용담에, 로렌 공작 각하도 감탄을 금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전장에서 적으로 싸우셨을 텐데, 오랜만은 아니겠죠.”

펠포드 백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놈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나는 일찌감치 이 밀담에 대한 기대를 접고, 눈앞의 이자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라파예트 후작님. 로렌 공작 각하께서는 한때 한 편에서 싸웠던 후작님의 인품과 신의를 믿고, 구국의 결단을 내리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펠포드 백작은 내 기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발언을 했다.

“구국의 결단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습니까? 비록 서로의 길은 갈렸지만, 로렌 공작 각하께서는 라파예트 후작님도 프랑지아의 애국자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으시기에-”

“본론을 말씀해주시죠, 펠포드 백작.”

펠포드 백작은 한껏 뜸을 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로렌 공작 각하께서는 휘하 귀족 및 가족들이 재산을 가지고 망명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면, 프랑지아를 위해 영지와 루이 왕을 넘기고자 하십니다.”

...하여간.

실로 부패하고 타락한 왕국에 어울리는 족속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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