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영웅
다음 날.
에리스의 치료 덕분에 몸은 거의 멀쩡해졌는데도 병자 취급을 받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답답함을 덜기 위해 방 안에서 검을 휘두르며 단련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병문안 올 사람들은 어제 전부 다녀갔고, 발리앙이 열심히 다그친 끝에 군대도 아침에 출정해버렸으니 올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시종인가?
“들어오시죠.”
나는 휘두르던 검을 내리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보고 굳어버렸다.
“...피에르.”
“크리스틴.”
급하게 온 건지 약간 상기된 얼굴의 크리스틴은 손에 든 부채를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저,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크리스틴의 시선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사이,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시녀 리나는 깜짝 놀라선 바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잽싸게 수건으로 몸의 땀을 대충 닦아낸 뒤 벗고 있던 옷을 걸쳤다.
“어, 어서 와요. 온다는 말을 못 들어서, 음.”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요양 중이라고 들었는데...”
크리스틴은 약간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착-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생각보다, 멀쩡하신 것 같네요.”
...뭐라고 답해야 하지?
나를 믿고 기다리겠다던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에리스가 잘 치료해 준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고민 끝에 그녀를 안심시키겠다고 한 말은 내가 생각해도 궁색했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내게 다가와서,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짚고 그대로 내게 기대왔다.
“방금까지 땀 흘려서 냄새가.”
그녀의 이마가 가슴에 닿는 감촉에 내가 당혹감을 느끼며 말하자, 크리스틴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만, 이대로.”
가슴팍이 약간 젖어 드는 느낌이 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크리스틴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크리스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위기뿐이고, 피로에 찌든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나로서는 미안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
내가 없는 사이 수도에서 바쁘게 일을 처리하다가, 전투 결과와 내 부상 소식을 전해 듣고 쉬지도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을 것이 뻔하다.
그런 와중에도, 크리스틴은 온 김에 내게 수도의 상황을 전부 전해주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 급진파는 정식으로 혁명당을 창설했다고 한다.
혁명당의 창설 이후 온건파는 자유당, 우리 쪽 인사들은 중앙당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당을 창설하여 의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라...
이제야 국민의회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과도기에서 벗어나, 좀 제대로 된 정치기구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네.
“국민의회는 완전히 안정을 찾았어요.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혁명당도 재산과 무관한 투표권이나 토지의 무상분배 같은 급진적인 정책 대신,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한 안건들을 내기 시작했죠.”
온건파나 우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다가 끝내 사고를 쳤던 저들도 느낀 바가 있었나 본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덧붙이는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과를 포크로 찍어서 내밀었다.
크리스틴은 슬며시 눈썹을 틀어 올렸지만, 얌전히 입으로 받아먹었다.
“저들이 급진적인 개혁을 완전히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현 상황에서 이룰 수 있는 개혁을 조금씩이라도 추진해나가는 쪽으로 타협한 건 당신의 말대로 긍정적인 신호겠죠.”
나는 크리스틴이 사과를 우물거리다 삼키는 걸 보곤 물었다.
“자유당은 어떻습니까?”
“...일단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다만 급진파의 이탈자들을 저들이 흡수하는 상황이고, 우리는 세력 확장을 위해 저들의 구성원을 회유하고 있으니까...”
크리스틴은 약간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동맹관계는 흐지부지될 거라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그 전에 우리가 최대한 세력을 확장해서, 중앙당이 다른 두 당에 크게 밀리지 않는 규모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고요.”
나는 이번엔 딸기를 찍어서 크리스틴에게 내밀었다.
방금 전에는 말없이 받아먹었지만, 이번에는 크리스틴도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물었다.
“저를 아이 취급하시나요?”
“아이는 내버려 둬도 배고프면 먹는데, 당신은 아니니까요. 누가 보면 당신이 제 병문안을 온 것이 아니라, 제가 당신 병문안을 온 줄 알겠습니다.”
크리스틴은 더 말하는 대신 딸기를 받아먹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입가에 걸리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 해주고 있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서둘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외세에 맞선다는 기치 아래에서 그나마 협조적이지만, 제 예상대로라면 게르마니아 제국은 조만간 이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할 테니까요.”
딸기를 삼킨 크리스틴은 약간 의아하다는 눈이 되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시죠? 이렇게 체면을 구기고 발을 빼기엔 제국의 위신 문제가 될 텐데.”
“이건 저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혁명을 보고 놀란 제국 지배층을 달래고 동맹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터진 전쟁이니까요. 제국 황실의 중요한 전력마저 잃은 상황이니, 이 이상의 출혈은 저들도 감당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틴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어서, 나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게다가 루이 왕이 사라지면 제국의 황후 세실리아가 프랑지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명분을 얻습니다. 이미 동맹 구색은 맞췄으니, 무리해서 루이 왕의 목을 붙여두느니 차라리 다음 전쟁을 대비하겠죠.”
“...그렇네요.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것도 지금 단계에서는 회귀 전을 알고 있는 나니까 떠올릴 수 있는 일이다.
세실리아 왕녀는 내전보다 한참 이전, 프랑지아 왕국과 게르마니아 제국의 전쟁 직후 양국 화해의 상징으로 시집갔다.
그때만 해도 왕자들이 있어서 어린 그녀의 계승권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왕자들이 다 죽은 뒤 제국이 그녀의 계승권을 들먹이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서 에리스, 아니. 에실리스테 왕녀 전하를 보호한 건가요?”
나는 씩 웃으며 다른 사과를 크리스틴에게 내밀었다.
“맞습니다. 제국은 루이 왕이 죽으면 프랑지아 왕위에 황후를 앉혀 꼭두각시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겠죠. 그때 실종된 지 한참 된 왕녀가 나타나 왕위에 오르면 저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크리스틴은 우물거리던 사과를 꿀꺽 삼킨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당신이 왕녀 전하를 우리와 혁명 정부의 간극을 메우는 구심점 정도로만 쓸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어서, 대체 언제쯤 움직이려나 궁금해 하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전투에서 에리스는 넘치는 인기를 얻었으니, 제국이 왕위 계승권을 들먹일 때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왕위에 올리자고 하면 반대할 자는 거의 없겠죠.”
크리스틴은 싱긋 웃었다.
“좋아요, 이제야 당신이 목표로 한 그림이 확실히 보이네요.”
“우리에게 가장 까다로운 순간은 그 직전이 될 겁니다. 루이 왕과 로렌 공작의 세력을 프랑지아에서 뿌리 뽑고 전쟁이 끝나가면, 슬슬 본격적으로 국민의회에서 정치싸움과 견제가 시작될 테니까요. 저는 전장에 있을 테니, 당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원래 국가 위기에 맞서 싸울 때는 자중하던 자들도 좀 살만하면 각자의 잇속을 챙기려 드는 법이니까.
“당신이 저를 믿고 기다려준 것처럼, 저도 당신을 믿고 전장으로 향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남의 가슴을 철렁하게 해놓고 잘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 싶지만, 저도 당신을 걱정하게 만든 적이 있으니 이번엔 넘어가 드리죠. 당신이 잘 싸워준 것은 사실이니까.”
할 말이 궁해진 내가 조용히 포크로 딸기를 찍어 건네자, 크리스틴은 쿡 웃더니 그것을 입으로 받으면서 뒤쪽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어째 자기가 배부른 얼굴을 하고 있던 크리스틴의 시녀, 리나가 다가와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음, 신문인가?
신문의 맨 앞에 그려진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입을 헤 벌렸다.
뒤에서 에리스가 손에서 빛을 뿜고, 내가 손에 검을 든 채 혁명군을 이끌고 공중에 떠 있는 마녀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무슨 고대의 영웅 신화를 적은 책에나 들어갈 법한 그림이...
일부러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딸기를 우물거리던 크리스틴이 천천히 그것을 삼키고,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수도의 분위기는 대략 아시겠죠? 사람들이 처음으로 청기사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영웅 피에르 드 라파예트로서 당신을 칭송하기 시작했어요. 축하해요.”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생각보다 낯뜨거운데.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죠.”
청기사를 넘어섰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직은 갈 길이 멀었으니까.
-
현자 빌헬미나 폰 바인펠트를 잃고 대패한 끝에 물러난 제국군이 부대를 미처 수습도 하기 전에, 라파엘 발리앙이 이끄는 프랑지아 혁명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이대로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는 판단하에 바후아를 내어주고 다시 물러나야 했다.
로렌 공작령.
레오폴트 대공은 대공연대의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간이 치료소에서 병상에 누운 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때 제국 최고의 강군으로 이름났던, 위풍당당했던 병사들 중 멀쩡한 자는 채 1/3도 되지 않았다.
부상자를 그대로 랭스에 놔둔 채 멀쩡한 자들만 추려서 역습을 개시한 발리앙과 달리, 후퇴하는 쪽인 대공은 그럴 수 없었다.
최대한 부상병들을 추려서 왔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낙오했다.
그도 아니면,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버려두고 왔거나.
대공이 아끼던 부하들의 병상을 둘러보고 있자, 그를 알아본 병사가 그에게 경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자신의 오른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두워진 얼굴로 목례를 해 보였을 뿐이다.
대공은 그에게 경례해 주고 등을 돌렸다.
어제 본국에서 하달한 퇴각 명령을 받았으니, 이 전쟁은 그의 손을 떠났다.
대공과 그의 병사들은 어떤 영광도 거머쥐지 못한 채 이 땅을 떠나야 한다.
레오폴트 대공은 실소를 흘렸다.
그는 자신의 군재에 자신이 있었다.
크라프테의 대왕에게는 맞서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그뿐 아니라 모두가 그것은 그자가 괴물이었던 탓이라고 여겼다.
그는 대왕이 아닌 다른 자에게 패배하는 자신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라파엘 발리앙과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흥미를 느끼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대공 이후 세대를 염려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변명은 많다. 성녀라는 이레귤러의 존재,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동맹 등.
그러나 그런다고 대공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숱한 피를 흩뿌리고도, 아끼던 부하들의 시체 위에 쌓아줄 명예조차 거머쥐지 못했다.
어쩌면 한때 영웅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흔한 늙은이인지도 모른다.
늙어서까지 자리를 지키지 말고, 차라리 은퇴라도 했다면 자신과 부하들의 명예라도 지켰을 것을.
그렇게 회한에 찬 대공의 앞에, 루이 왕이 나타났다.
한때 기사 왕에게 총애 받던 패기 넘치던 젊은 기사는 겁쟁이 같은 몰골이 되어, 극도로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시종을 물리고 홀로 다가왔다.
“국왕 폐하.”
“...레오폴트 대공, 게르마니아 제국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사실이오?”
대공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대공은 루이 왕이 그를 붙잡으려고 들면 뭐라고 답할지를 생각하며 말을 기다렸다.
“짐을 데려가 주시오!”
그러나 루이 왕의 다음 말을 듣고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뭐, 라고 하셨습니까, 국왕 폐하?”
“짐을 제국으로 데려가 주시오, 대공.”
대공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루이 왕은 그걸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절박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로렌 공작, 저 옛 반역자는 믿을 수 없소. 이대로면 짐은 저 폭도들에게 붙잡혀 온갖 수모를 겪게 될 거요! 우리는 동맹이고, 제국의 황후는 짐의 동생이지 않소이까? 나를 데려가 주시오. 제국이 여력이 될 때 저 반란군을 몰아내고 짐의 나라를 되찾아준다면, 제국을 위해 무엇이든 내어주겠소!”
공포에 질린 나머지 반쯤 광인이 되어, 열심히 떠드는 루이 왕을 본 레오폴트대공은 허탈함을 느꼈다.
이런 자의 나라를 되찾아주겠다는 거짓 명분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죽었는가?
이런 자로 인해 시작된 내전에서 혁명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가?
이 순간, 레오폴트 대공은 진심으로 그의 부하들과 프랑지아인들 양쪽 모두에게 연민을 품었다.
그리고 그만큼 분노하여 입을 열었다.
“프랑지아의 국왕 폐하.”
움찔하는 루이 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대공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명예로운 기사 왕국의 주인이시라면, 이 땅의 백성들의 주인이시라면, 영광스러운 게르마니아 제국의 동맹국을 이끄는 분이시라면.”
대공은 루이 왕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지금 목숨을 끊으시는 것이, 폐하의 명예와 이 나라 백성을 지키는 길입니다.”
“무, 뭐?”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옥체 강녕하시길.”
레오폴트 대공은 그대로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루이 왕만이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비열한 제국 놈들! 우린, 우린 동맹이었단 말이다! 졸전 끝에 패전한 군인 이, 감히 이 나라의 왕을 모욕하는가!”
늙은 영웅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 누이를, 세실리아를 만나게 해다오! 혈족 간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이더냐!”
다음날,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레오폴트 대공의 지휘 아래 본국으로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