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성녀와 황후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랭스로 옮겨진 이후였다.
총탄에 맞은 열상과 심하게 입었던 화상은 에리스가 치료해준 모양이지만, 몸도 마력도 한계까지 쥐어 짜내며 싸운 덕분에 최소한 며칠은 요양하라는 판정을 받았다.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라파엘 발리앙이었다.
“정말 굉장한 전투였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제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정면에서 달려온 포병대에 산탄을 얻어맞는 적병들의 얼굴을 꼭 봐야 했는데! 평소에 마력 쓰는 법 좀 익혀둘 것을!”
“그, 그렇습니까....”
이놈 좀 무서운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미친놈 같아...
“어쨌거나 후작님께서 몸을 돌보지 않고 폭풍의 마녀를 처단해주신 덕분에, 우리 군은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는 부대의 재정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바후아로 진격하려고 합니다.”
아, 그래서 내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달려왔군?
나는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제 대신 남부군을 인솔할 자를 지정해서 돕도록 하죠.”
발리앙은 아주 환하게 웃었다.
“역시 후작님과는 대화가 빨라서 좋습니다! 잠시 몸을 추스르시면서 낭보를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어련하시겠어...
아주 싱글벙글하던 발리앙이 뒤에 손짓하자, 그를 따라온 부관이 큼지막한 사과 바구니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목적을 달성한 발리앙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 계속 나타나서, 나는 그들을 계속 상대해야 했다.
“후작님! 후작님께서 무사하셔서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난 전투에서 후작님께서 보여주신 숭고한 희생과 용맹은 가히 청기사의 재리-”
“그랬습니까? 저도 백작님을 무척 걱정했었습니다.”
입에서 침을 튀길 기세로 떠들던 데미앙은 나에게 말이 잘리자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전투 중반쯤부턴 어디 갔는지 모르겠더군요.”
어디서 약을 팔아. 애초에 망할 청기사와 나를 엮지 않아주면 좋겠는데.
“주, 중간에 부상을 입어서, 송구합니다.”
데미앙은 어색하게 답했다.
보아하니 아주 멀쩡한 것 같은데, 에리스가 치료해준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가벼운 부상 핑계로 신나서 낙오한 것 아닌가 심히 의심스럽다.
“...그건 그렇고, 발리앙 장군이 바후아를 공략하려고 한다는데, 남부군 사령관으로 출정할-”
내 말을 듣던 데미앙의 눈이 갑자기 빨개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아, 아니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후작님. 후작님과 함께 돌격하다 장렬히 전사한 휴이 경이 생각 나서 그만...”
데미앙은 그렇게 말하며 서글픈 눈으로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냈다.
휴이 경.
전열보병들을 상대로 돌격할 때 불덩이에 당한 미르보의 기사가 그런 이름이었지, 아마.
어째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부하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한테 싸우러 나가라고 하기도 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알겠습니다. 백작님은 좀 쉬시죠. 남부군의 지휘는 드제 경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깊은 배려에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러면 푹 쉬십시오!”
데미앙은 바로 방금 전에 눈물을 쏟은 것이 무색하게, 듣자마자 반색하며 답했다.
이 가증스러운 인간이...
데미앙은 포도 바구니를 남겨두고 물러갔다.
“후작 각하를 최후까지 보필하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무슨 소리야. 가스통 경이 아니었으면 우린 실패했을 걸. 나야말로 그 사지에서 앞장서 주어서 고마워.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네.”
“...저 또한, 각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란 가스통은 오렌지 바구니를 두고 나갔다.
“남부군의 사상자는 4,823명입니다, 각하. 피해가 적지는 않았으나 가치 있는 승리였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 폭풍의 마녀를 처치한 후작 각하의 분투는 전 혁명군은 물론이고, 수도에까지 알려져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 드제 경. 발리앙 장군이 바후아로 진격한다고 한 소식은 들었나?”
“...음, 참모장입니까? 아니면 사령관 대리입니까?”
“사령관 대리.”
루이 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바로 경례를 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후작 각하.”
“고맙네. 아, 그리고.”
“예?”
“이번 전투에서 남부군의 지휘, 수고했네.”
“제 역할이었으니까요, 후작 각하. 그럼 보중하십시오.”
드제는 싱긋 웃으며, 딸기 바구니를 놓고 떠났다.
그 외에도 많은 자들이 다녀가고,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진 시간.
뒤늦게 나타난 에리스는 탁자에 가득 쌓인 과일을 열심히 먹어치우면서 입을 열었다.
“우와아, 과일 부자시네요. 돈 주고 사려면 이게 다 얼마야. 합. 아, 이 딸기...음~ 맛있다.”
“...최소한 입에 있는 건 삼키고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으으, 이 시간까지 부상자들 치료하느라 너무너무 힘들고 배고픈 제가, 다 먹지도 못할 과일 좀 뺏어 먹는다고 구박하다니 후작님은 쫌생-”
“알았어, 알았으니까.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라.”
에리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얄밉게 웃고는, 다시 과일 섭취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 에리스의 눈가가 병자 마냥 거뭇거뭇한 것이 빤히 보여서, 나도 그녀를 더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우리의 전투는 끝났지만, 에리스는 그 후로도 지금까지 저런 몰골이 될 때까지 일한 거다.
나한테도 이렇게 갖은 선물이 왔으니 에리스에게도 그랬을 것 같지만, 저 성격에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말고 혼자 먹느니 그냥 나눠줬겠지.
한동안 과일을 먹어치우는 소리만이 들린 끝에,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우와, 행복해라. 저 사실 과일 무척 좋아하는데, 이렇게 마음껏 먹어본 것도 오랜만이네요. 아, 참. 후작님은 제게 감사하셔야 해요. 총에 맞은 걸 그렇게 대충 묶고 싸우고, 화상은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엔 후작님 아니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
무모했다는 자각은 있다.
그 마녀도 마력이 거의 고갈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는데, 어쩌면 무너진 대마법의 술식에서 마력을 조금 회수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틴이 선물해준 브로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타죽었을 수도 있었다.
“고마워, 에리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실패했을 거야. ...나를 치료해준 것도. 솔직히, 화상으로 엉망이 된 꼴이었다면 크리스틴을 볼 면목이 없었겠지.”
에리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기분이 굉장히, 복잡해요.”
에리스의 목소리는 방금까지 무리하게 활기차게 굴던 모습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고 제가 해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는데, 그 이긴 전투에서도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어요. 그중에 제가 구할 수 있던 건 얼마 되지도 않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기뻐했던 제가 너무, 너무...”
“그만, 거기까지.”
내가 손뼉을 치자, 에리스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싸우는 걸 포기했으면 우리는 저들에게 굴복해야 했고, 네가 그 정도로 활약해주지 않았으면 더 많이 죽었어. 책임감을 가지는 것과 어쩔 수 없는 부분에까지 죄책감을 가지는 건 별개야.”
에리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후작님은 그런 구분이 확실하시네요. 기사님이라서 그런 걸까. 근데, 으음.
언젠가 제가 후작님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무서워져요.”
“굳이 나처럼 될 필요는 없어. 네가 나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처음 만났을 때의 너보단 지금의 네가 더 믿음직한데.”
“...그래요?”
“그래, 왕녀님. 이번 전투로 너는 단순히 많은 이들을 구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지지를 얻었을 거야. 네가 왕위에 오를 순간이 올 때 큰 도움이 되겠지.
아직은 괴롭겠지만, 지금의 네 감정이나 고민을 소중히 여겨도 좋아.”
나는 에리스의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되도록 안심시켜주듯 말했다.
“순수한 선의만으로 세상을 보던 어린 성녀님이,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왕녀님으로 자라나며 겪고 있는 성장통이니까. 그걸 다 겪어내고 성장한 너는 나와 내 사람들이 믿고 따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 믿어.”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에리스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제 맹세, 지킨 거죠?”
“그래. 더할 나위 없이.”
“제가 지켜 달라 청한 프랑지아의 사람들은, 후작님께서 지킬 가치가 있었나요?”
나는 그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로 가득 찼던 전장을 떠올렸다.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에리스까지 이용해가며 선동하여 향한 전장에서.
파멸을 목전에 두고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기진맥진한 순간에도 승리를 부르짖으며 돌격하던 이들을.
“...그래, 틀림없이.”
에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도한 듯한 얼굴로,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미소지었다.
-
게르마니아 제국, 황궁.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집무실에 가득 쌓인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황후로서의 일뿐 아니라, 원래라면 황제가 해야 할 일까지.
그럼에도 체칠리아는 황제를 사랑했다.
한심하고 어리석으나, 불행하고 가여운 그녀의 남편.
카이저가 긴 세월 황실에 충성해온 제국의 가신들마저 외면할 정도로 암군이 아니었다면, 체칠리아가 제아무리 노력한들 그녀는 그저 외국에서 팔려온 황후에 불과했을 테니.
그녀가 서류를 한창 처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군무대신이 당도하였나이다, 카이제린.”
“들라 하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군무대신이 들어와 허리를 조아리며 인사 올렸다.
“제국의 어머니, 카이제린을 뵙습니다.”
체칠리아는 작업 중이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전투 보고서를 들어올렸다.
“군무대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군무대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군무대신의 얼굴에 전투 보고서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철천지원수 국가에 팔려왔을 때부터, 그녀는 프랑지아의 왕녀 세실리아로서의 모든 것을 지워 왔다.
그동안 배운 관습, 그녀가 품었던 꿈, 하다못해 성격까지도.
모든 걸 비워낸 자리에 제국이, 게르만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황후의 모든 것을 짜 넣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자애롭고 현명하여, 게르만인보다도 더 게르만다운, 제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황후.
완벽한 그녀에게 사적인 분노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상적인 카이제린 체칠리아를 칭송하던 이들도 그녀가 조금의 흠결만 보이면, 그녀의 출신을 들먹일 것을 알기에.
체칠리아는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어조는 지극히 평이했다.
“레오폴트 대공께선 제국의 영웅이자 자존심입니다. 더는 프랑지아 왕국의 어리석은 왕과 소극적인 노던 연합 왕국 때문에 그분의 명성에 흠집을 낼 수는 없겠지요. 제국군의 철수에 대해, 대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 지요?”
“...카이제린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체칠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면 군무대신께서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국무회의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겠나이다. 제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영광을.”
군무대신이 물러가고, 체칠리아는 집무실의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은 분노하며 노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녀가 황실의 예산까지 털어 넣어가며 야심차게 육성한 근위마도단까지 보내주었다.
이런 식으로 패배하고, 심지어 단장이 전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전투 보고서에는 그 전투가 얼마나 비상식적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처절했는지가 여과 없이 적혀 있다.
전문적인 군사 지식이 없는 그녀도 레오폴트 대공이 무능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루이 왕의 군세를 분쇄하고 2배에 달하는 3개국의 군대를 마치 어린애처럼 농락하며, 희대의 전술가로 떠오른 젊은 천재 발리앙.
제국의 자존심 레오폴트 대공을 물러나게 하고, 혁명군을 이끌고 모든 것을 분쇄하며 돌파한 끝에 현자를 참살한 청기사의 아들 라파예트 후작.
거기에 신성 교국이 직접 인정한 프랑지아의 성녀까지.
그 모두가, 저 시대에 뒤쳐졌던 기사들의 봉건국가에서 같은 세대에 출현했다.
다른 둘은 그렇다쳐도, 성녀에 대해서 제국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프랑지아 남부를 돌며 역병을 치료하던 근본도 모를 소녀를 뜬금없이 신성 교국에서 직접 성녀로 인정했을 때, 후원자인 라파예트 후작이 뇌물을 꽤나 많이 먹였겠다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난 전투를 기점으로, 프랑지아의 성녀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신이 프랑지아를 보살피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제국에서도 암암리에 나올 정도로.
체칠리아는 그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만을 흘렸다.
수백 년 전, 마왕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프랑지아를 구한 성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제 다시 닥쳐온 프랑지아의 위기에, 또 다른 성녀가 나타나 국가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 프랑지아가 열광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세 명의 영웅이 프랑지아를 지키고 있으며, 그것이 신께서 프랑지아를 보살피시는 증거라면서.
신께서 보살피는 프랑지아라.
그 잘나신 신은 그녀가 적국에 팔려올 때 무엇을 해주었는데?
의존할 곳 하나 없는 먼 타국에서 그녀를 구해준 것은 오직 그녀 자신이다.
신 따위가 아니라.
체칠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저들이 승리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대패는 뼈아프지만, 라파예트 후작의 돌파를 보고 겁에 질린 루이 왕이 청기사의 재림이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며 후퇴해버린 덕분에 제국도 철수할 명분은 얻었다.
그들이 철수하면 루이 왕의 파멸은 확정이다.
그러니 저 어리석은 오라비가 파멸하는 동안, 그녀는 프랑지아의 저력을 보고 놀란 제후들을 어르고 달래야 한다.
그들을 설득해, 그녀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진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체칠리아는 전투 보고서에 써진, ‘성녀 에리스’라는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성녀, 성녀라. 너는 타고난 것만으로도 뭇 사람들의 사랑과 축복만을 받아, 지금도 칭송받고 있겠구나.
진정으로 신이라는 자가 존재한다면, 그 자에게 티끌만큼의 공정함이라도 있다면.
버림 받은 채 적국으로 팔려와, 모든 것을 버리고서야 간신히 지금의 자리를 거머쥔 나에게.
내 모든 것을 빼앗고 팔아치운 자들에게, 되갚아줄 권리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니?
작가의말
셀메님, 산온님(2회), 누들앤멍키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의 모티브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는 마담 퐁파두르+예카테리나 2세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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