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돌파 (1)
압도적인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가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마침내 적들이 이곳, 랭스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에 맞서 출정하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혁명군이 소집된 자리.
수도 뤼미에르에서 미리 수령하여 바쁘게 분류 작업해두었던 서신들이 각 부대 별로 배분되었다.
가능한 거의 모든 군사들의 가족에게 요청하여, 그들을 격려하는 서신을 받아 온 거다.
적의 대마법을 보고 떨어져 버린 사기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나온 아이디어.
...라기보다는 발악이지.
먼저 편지를 받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 내 참모장인 루이 드제가 상자를 들고 이쪽으로 왔다.
상자에 붙은 봉인이 아주 익숙하다. 아키텐의 문장....
나는 픽 웃었다.
군사들에게만 보내주는 줄 알았더니, 크리스틴도 나에게 보내준 모양-
드제는 나를 지나치더니, 그대로 내 옆에 서있던 에리스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어?”
“어?”
나와 에리스 둘 모두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아키텐 백작님이 보내주신 겁니다, 성녀님. 아, 후작님껜 이걸....”
드제는 에리스에게 상자와 편지를 건네준 후, 나에겐 다른 편지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
뭐야, 뭔데.
나한테도 제대로 편지를 써주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대체 왜 크리스틴이 나에겐 편지만 보내고 에리스에겐 선물까지 보내준 건지 모르겠다.
둘이 그렇게 친했던가? 거의 데면데면했던 거 같은데.
“헤에-”
에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손에 들린 편지 하나와 자신이 받은 상자와 편지를 번갈아 보는 통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에리스, 그거 뭐야?”
“저도 모르죠~ 받은 선물은 몰래 뜯어봐야지!”
“어, 에리스! 잠깐!”
“아하핫, 크리스틴 언니가 나한테만 보내준 선물이다-!”
에리스는 상자를 두 손으로 든 채, 신이 난 기색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오, 저놈의 왕녀를 확 그냥.
언제부터 그렇게 친근하게 불렀다고, 제대로 놀리려고 작정해선.
...절대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틴이라면 다 생각이 있겠지, 그럼.
기껏 약혼해놓고 오자마자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을 선도한다고 해서, 토라져서 저런 건 아니겠지 설마.
어째 좀 무서운 기분이 들어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개봉하자, 예전에 주고받던 미사여구가 포함된 것과 달리 아주 깔끔하게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피에르, 당신이라면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셨겠죠.
저니까 할 수 있는 말만 전하죠.
살아남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길을 포기했다고 해서, 제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당신을 믿으니까, 제 믿음에 보답해 주실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크리스틴]
나는 조용히 편지지를 봉투에 다시 갈무리해 넣고,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크리스틴이 나를 원망하면 어쩔까 걱정한 것이 바보 같아졌다.
내가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전부 다 이해하고 있던 그녀가 당부한 것은 단 하나뿐.
“하.”
이런 말을 듣고서야, 미안해서라도 질 순 없지.
까짓 청기사, 넘어 서보자고.
-
전군에 서신 전달이 끝나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출진 준비가 끝났을 때쯤, 군사들의 얼굴은 아주 볼만했다.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직도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자도 있다.
나는 슬쩍 내 옆에 있는 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이 아이디어의 최초 발안자였던 드제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최소한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얼굴은 별로 없잖습니까? ...제가 보기엔 후작님도 꽤 의욕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만.”
...쓸데없이 눈치는 있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가, 소리를 확장시켜주는 마도구를 잡았다.
원래는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발리앙이 쓰라고 혁명 정부가 보내준 건데, 뜬금없이 결사돌격대를 이끌게 된 내가 쓰게 될 줄이야.
발리앙은 저 아래에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었다.
아주 뻔뻔하기도 하시지.
픽 웃고 심호흡을 하자, 내 숨소리가 여과 없이 평야를 울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여기저기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제길. 모양 빠지게.
“...하, 짧게 하지. 제군, 우리에겐 물러날 곳이 없다. 이곳은 랭스, 수도 뤼미에르가 지척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뤼미에르가 전장이 된다는 의미이고, 수도를 잃으면 공화국에 남는 건 패배뿐이다.”
물러설 곳은 없다.
“저 강대한 적에게 맞서려는 우리가 무모하다고 여기는 자들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우리가 모두 함께한다면 승리할 것이다.”
나는 저 아래에서 나를 보고 있는 기사들을 보았다.
나와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 란 가스통,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과 그 휘하 기사들.
한때 구체제 압제의 상징이었던 자들이나, 이제는 이들의 편이다.
“내가 직접 앞장설 것이고, 프랑지아의 기사들이 내 뒤를 따를 것이다. 우리가 그대들의 창끝이 되어줄 테니, 우리를 따르라.”
우리가 제아무리 길을 열어도, 저들이 열린 길로 비집고 들어가며 그것을 넓혀주지 않으면 포위 속에 섬멸당할 뿐이다.
승리의 확신 없이, 평민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고 돌격한다. 이전 같으면 결코 이런 선택을 하지 못했겠지.
나는 조용히 내 옆에 자리한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에리스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니, 신의 은총이 그대들을 가호할 것이다.”
내가 말을 마치자, 에리스가 모았던 두 손을 하늘로 펼쳐 보였다.
그에 맞춰 빛줄기가 하늘에 오로라처럼 펼쳐지고,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오오오...”
“신이시여.”
“성녀님...”
군사들은 홀린 듯이 하늘을 보며 경탄했다.
한없이 기적에 가까운 축복으로 보이나, 그저 마력을 써가며 신성력을 흩뿌릴 뿐인 현상.
어떻게 보면 그저 기만에 불과하나, 지금의 군사들에겐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마침내 자신감을 되찾은 군사들을 보며, 그들의 원한을 상기시켰다.
“혁명 이전 루이 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들 모두가 뼈저리게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저 외세의 힘을 빌린 루이 왕이 저들에게 대가를 치르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가족이, 이웃이 악마들에게 팔려나가는 걸 본 자들은 적지 않겠지.
“그대들 모두, 등 뒤에 지켜야 할 자들을 두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렇기에 귀족이니, 기사니, 평민이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같은 목표를 위해, 프랑지아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우리 등 뒤에 이들이 지켜야 할 가족이, 내가 지켜야 할 크리스틴이 있다. 그 거면 충분하다.
“내가 그대들을 믿고 앞장설 테니, 그대들도 나를 믿고 따르라!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 그대들의 소중한 이들을 위해, 그대들이 쟁취해낸 자유를 위해, 프랑지아를 위해!”
“프랑지아를 위해!”
군사들이 평야가 떠나갈 듯이 외쳤다.
나는 약간 손을 떠는 에리스를 흘긋 보곤,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혁명군, 출진이다!”
-
며칠 뒤.
여름이 지나가고 초가을에 접어든 랭스 인근의 전장.
다시 한번 양측의 수만 군대가 드넓은 평야지대를 뒤덮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망원경을 통해 프랑지아 혁명군을 관찰하며 혀를 찼다.
“저건 대체 무슨 포진이지?”
중군에 전열보병, 양익에 기병대, 후방에 포병대.
이게 상식적인 포진이다.
그러나 저들은 중앙 전열보병의 뒤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심지어.
레오폴트 대공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반신반의하며 미간을 좁혔다.
“저건, 포병대인가?”
그 기병대의 바로 앞에, 소구경 대포를 말로 끌고 있는 기마포병대가 있다.
“...그렇게 보입니다, 대공 전하.”
마찬가지로 망원경으로 그것을 들여다본 참모도 굉장히 미심쩍다는 얼굴이 되었다.
“저런 포진을 본 적이 있나?”
기병대와 기마포병대를 중앙, 그것도 전열보병 바로 뒤 전방에 배치했다?
“글쎄요, 지난 대마법을 보고 사기를 잃고 자포자기라도 한 것이 아닐지.”
참모의 말이 일견 타당하게 들리기는 했으나,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저들의 장군인 발리앙과 라파예트, 둘 모두 그럴 자들이 아닌데.”
저 크라프테의 ‘대왕’이 기마포를 활용한 기동 포격전을 선보인 전례는 있다.
그러나 기마포병대의 의의는 적절한 포격 위치로 빠르게 기동하여 포격을 하는 데 있다.
직사포로 아군의 등 뒤에서 쏴 제낄 것도 아니고, 전방의 중앙에 배치했다?
대공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명령을 내렸다.
“적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떠먹여 주는 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전 포병대, 중앙의 적 포병과 기병에 포격을 집중하라.”
“옛!”
명령을 하달한 대공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려, 곰방대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늙은 마녀를 바라보았다.
“프라우 바인펠트.”
“아. 알고 있습니다, 대공. 적들이 확실하게 교전 거리까지 접근하고 나면 주문을 시전하지요.”
“확실히 지켜주시오. 적들도 그대의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으니, 주문 사용을 유도하고 도망치려 할 수도 있지. 그러니 근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제대로 저들을 쓸어달라는 거요.”
빌헬미나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공.”
-
라파엘 발리앙은 망원경을 든 채 하염없이 적진을 살피다가, 혀를 찼다.
“쯧, 2안은 폐기군.”
양군이 상당히 접근했지만, 폭풍의 마녀는 대마법을 시전하려는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유효한 교전 거리가 되기 전에 마녀가 주문을 시전하면 일시 후퇴한다.
그런 작전을 2안으로 세웠지만, 역시나 적들도 아주 바보는 아니라는 거겠지.
이 정도로 근접해서야, 성급하게 후퇴를 하다간 바로 추격당하며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될 거다.
“할 수 없지. 원안대로 가는 수밖에. 부탁합니다, 드제 경.”
“옛, 남부군의 지휘는 맡겨주십시오.”
돌격을 가할 라파예트 후작 대신 지휘를 맡은 드제가 멀어져 가고, 발리앙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
모든 걸 다 밀어 넣은 도박을 감행하는 순간의 짜릿함, 누구도 본 적 없을 전술을 시도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
그 모든 감각 속에, 발리앙은 저 앞에 있을 라파예트 후작 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력 따위 익힐 시간에 군사학을 더 연구하겠다고 하지 말고, 자기 몸을 보호할 정도의 마력은 익혀둘 걸 그랬나.
“자, 레오폴트 대공. 한 번 당해보시지. 나만 좆같은 걸 당할 순 없지. 안 그래?”
발리앙은 히죽히죽 웃었다.
-
베일 너머로, 지평선을 따라 물결치는 백색 군복의 파도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에리스는 자꾸만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유효한 교전 거리가 되기 전에 마녀가 주문을 시전하면 일시 후퇴한다.
피에르에게 들은 작전 2안은 아마도 실패.
에리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하늘로 뻗었다.
굉음을 내며 중앙으로 날아들던 포탄의 앞에 금빛의 장벽이 쳐지고, 그에 부딪힌 포탄은 힘없이 추락했다.
찌릿- 하고 심장 쪽에 통증이 왔다.
그녀가 기원이라고 주장해온 힘.
사실은 아마도, 신성력이 맞을 것이다.
궁에서 나와 한없는 슬픔과 우울함 속에 죽어가던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여 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 끝에 얻은 능력이니까.
에리스는 저도 모르게 저 옆으로 날아드는 포탄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쥐며 그 손을 내렸다.
이내 낙하한 포탄이 전열을 덮치고 터져 나온 비명이 에리스의 귀를 때렸다.
에리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옆에 도열한 기병들과 그들의 선두에 자리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지금, 당신이 성녀로서 저들을 이끌어 그 사지로 몰아넣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피에르는 그렇게 요구했다.
에리스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무수한 푸른 군복을 입은 물결들이 전진하고 있다.
압도적인 천재지변을 보고도 앞서는 기사들과 그녀를 믿고, 그녀가 보여준 환상 같은 빛만을 보고 무수한 이들이 따르고 있다.
다시 한번, 정면에서 포탄이 날아들었다.
에리스는 신성력으로 그것을 가로막고, 익숙한 통증을 견뎠다.
저 포탄이 떨어져 이미 심하게 다치고 죽어가는 이들을 치유해 살리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힘을 써야 하는데, 정작 그들을 위협하는 공격을 막아내는 건 훨씬 적은 힘만을 사용한다.
이미 망가져버린 사람을 구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데.
정작 힘을 얻어 살려낸 어머니가 죽는 순간, 에리스는 함께 하지 못했는데.
-사람을 구하려는 성녀가 뭐가 나쁘겠어. 구할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정해두는 놈들이 나쁜 거지.
당장 손을 뻗으면 구할 수 있을 이들을 포기하고,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구하고 있는 자신은 분명 성녀라고 불릴 자격 따위 없겠지.
그럼에도, 전진한다.
맹세했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지척까지 가까워진 적들이 보였다.
에리스가 심호흡을 하는 순간, 온 마력이 곤두서는 듯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향한 곳에, 공중에 뜬 마녀가 보인다.
거의 동시에, 기병대의 선두에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에 서있던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소구경 대포를 실은 말들과 말에 탄 포병들이 전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기마포병대의 뒤를 따른다! 대열 유지하며 돌격 준비! 돌격 준비!”
피에르의 외침과 함께, 에리스도 말을 박찼다.
아까까지 산발적으로 날아들던 것과 달리 엄청난 숫자의 포탄이 한 번에 날아들었다.
-라파예트 후작님. 이 나라를 믿을 수 없다면, 저를 믿어주세요.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에리스는 로브 안에서 쥐고 있던 수정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력 증폭 수정. 크리스틴이 피에르를 부탁하며 보내온 물건.
이내 미칠 듯이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그녀의 몸을 타고 돌며, 한없는 고양감을 안겨주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손을 들어 올리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크기의 장벽이 펼쳐졌다.
포탄이 부딪히면서 울리는 충격이 심장에 전해주는 감각도 멀어진 것 같다.
이런 전능감을 느끼며.
에리스는 불타오를 것 같은 눈으로, 저 멀리 허공에 떠있는 마녀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은 벌레라도 밟아 죽이는듯한 시선으로, 그런 재앙을 불러들였구나.
기마포병대가 맹렬하게 돌진하자 전방의 적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이고, 적진에서 거대한 불덩이들이 솟구치더니 단번에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에리스!”
피에르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에리스는 다시 한번 양손을 하늘로 뻗었다.
펼쳐진 금빛의 장벽에 거대한 불덩이들이 미친 듯이 내리꽂히고, 에리스는 심장에 전해지는 충격에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내뱉은 근거도 없는 말 하나를 믿고 이 자리에 선 자들의 숫자가 수만이다.
에리스는 자신이 그 어떤 짓을 해도, 저들의 목숨보다 더한 대가를 내어줄 수 없다는 걸 안다.
앞으로, 조금.
“서, 성녀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돌격, 돌격 앞으로! 승리를 위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기마포병대와 기병대,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프랑지아의 전군이 돌격하고 있다.
적 전열보병들의 지근거리까지 내달려 정지한 기마포병대가 포구를 적들에게 향하자, 적들의 얼굴에 충격과 경악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거의 발악처럼, 또다시 일제포격과 함께 불덩이들이 날아들었다.
에리스는 다른 수정을 손에 쥐었다. 이것이 마지막.
사지로 향하는 연인을 차마 말릴 수는 없어서, 애원하는 것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낸 사람이 예비해 준 물건.
-기필코 그대들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에리스는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다른 손을 하늘로 뻗었다.
포탄이 장벽에 부딪히며 내는 충격음과 불덩이들이 연달아 내는 폭음 속에, 에리스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보몽 경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에리스가 떨리는 눈을 앞으로 돌리자, 제대로 보호받아 건재한 기마포들의 포구가 일제히 불을 뿜어내며 밀집된 적들에게 산탄을 퍼붓는 광경이 보였다.
자신이 지켜낸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재앙 같은 상황을 보며, 에리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수고했어, 에리스. 뒤는 맡겨.”
정신을 잃기 직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