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53화 (53/258)

혁명기 - 맹세

게르마니아 제국군 진지.

빌헬미나 폰 바인펠트의 대마법이 발동하고, 그녀를 보조하던 근위마도단은 온 마력을 다 소진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좀 더 심한 이들은 아예 구토를 하다 지쳐,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아하하하, 화려하구나. 걸작이로고, 실로 걸작이야. 이 광경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날이 오다니! 마도 왕국의 꽉 막힌 머저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군!”

장본인인 빌헬미나도 핼쑥한 얼굴이었지만, 늙은 마법사는 연신 곰방대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자신이 일으킨 천재지변을 보고 감탄하기 바빴다.

정작 총사령관인 레오폴트 대공은 기가 막혔다.

“적들은 빤히 퇴각 중이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마법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소?”

레오폴트 대공이 보기에도 저건 이미 마법이라고 불릴 경지를 넘어섰다.

마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대마법.

상대가 모르고 당한다면 필패할 수밖에 없는 히든카드 중의 히든카드를, 이미 퇴각 중이어서 병력이 얼마 남지도 않은 적을 상대로 굳이 날려야만 했나?

프랑지아의 성녀가 이쪽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을 죄다 막아내는 것을 봤을 때는 대공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지만, 저쪽이 물러나기 시작한 걸 보면 분명히 한계는 있었다.

심지어 저 늙은 마녀가 폭우로 일대를 갈아엎어버린 탓에 추격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전술적 관점에서, 대공은 도저히 저 늙은 마녀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담배연기를 느긋하게 뿜어낸 빌헬미나는 오히려 대공을 조소했다.

“대공 전하. 이 술식을 펼치기 위해 사용한 마력 증폭 수정이 몇 개인 줄은 아십니까?”

그딴 걸 마법사도 아닌 자신이 알아서 무엇 하나.

대공의 표정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여실히 대변해 주었고, 빌헬미나는 킬킬거리고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 수정 값이 게르마니아 제국의 일 년 치 세수보다 더 비쌀 겁니다.”

그제야 레오폴트 대공이 입을 떠억 벌렸다.

“아하하, 표정 볼만하시군요. 아하하핫!”

레오폴트 대공이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늙은 마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저렇게 빨리 도망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제가 평생 모아온 돈을 허공에 뿌렸는데 그냥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프, 프라우 바인펠트. 그대가 말한 그, 마력 증폭 수정이라는 건 얼마나 남아 있소?”

“한 번 더 사용할 정도는 남았겠군요. 저와 부하들도 며칠은 쉬어야 하겠고.”

레오폴트 대공으로서는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와 상의한 후에 사용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 제국의 일년 치 세수를 쓰는, 그런 필승의 카드를 생각 없이 쓰다니!”

물론 빌헬미나가 알 바는 아니었다.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대공. 저는 당신의 부하가 아니라 제국과 계약한 관계입니다. 제국은 제가 만족할 만한 연구비와 이름을 드높일 전장을 제공하기로 했고, 거기서 제가 어떤 식으로 이름을 떨치든 그건 제 마음, 아닙니까?”

빌헬미나는 말문이 막힌 대공을 보며 픽 웃었다.

“만약 다 썼는데 제국이 정말로 제힘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 그때는 제국의 재정으로 사주시겠지요.”

말을 마친 빌헬미나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그녀가 불러일으킨 천재지변의 현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마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낭비할 시간에, 진리를 추구한다.

마도 왕국의 고위 마법사들은 저런 고리타분한 가르침을 따르며 기껏 쌓아올린 힘을 제대로 활용하는 대신, 진리의 연구에만 매달려 늙어가고 있다.

마도 왕국이 쌓아 올린 마법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평생 그렇게 처박혀 연구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런 힘을 가진 줄도 모르니까, 마법도 모르는 미개한 머저리들이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제넘은 헛소리를 내기에 이른 것 아닌가.

마도의 깊이를,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모르는 머저리들에겐 백번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한번 보여주는 것이 빠른 법.

전쟁의 승패 따위와 무관하게, 오늘 일으킨 대마법 만으로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남을 거다.

그걸 보고 나면 현명한 중립 운운하며 고리타분한 진리나 쫓는 마도 왕국에서도 생각이 바뀌는 후학이 나오겠지.

빌헬미나는 그것만으로도 마도 왕국을 떠나 제국에 몸을 담은 결정에 충분히 흡족했다.

물론 빌헬미나만 그랬다.

‘마법사란 작자들이란.’

대공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고, 불청객과 마주했다.

“오오, 과연 게르마니아 제국의 힘은 대단하구려. 짐은 실로 감탄했소! 이대로라면 저 반란군에 맞선 승리도 꿈이 아니군!”

“과연 제국의 영웅과 현자십니다! 실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나서 이쪽으로 오는 루이 왕과 로렌 공작의 모습에, 대공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일으킨 마법을 감상하기 바쁜 빌헬미나는 대공에게 둘을 완전히 떠넘겼다.

-

프랑지아 공화국 중부 랭스, 혁명군 주둔지.

바후아를 내주고 물러난 혁명군의 분위기는 더는 없을 정도로 암울했다.

사상자는 대략 1,000여 명 정도.

제국군도 경보병들의 사격과 포격에 제법 피해를 입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토는 잃었어도 교전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건 아니다.

퇴각 시 우려했던 적 경기병대의 추격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폭풍의 마녀가 불러낸 폭우에 땅이 진창이 된 덕분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폭풍의 마녀가 보여준, 천재지변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대마법 때문에 군대의 사기는 저조하기 그지없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 북부군 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입을 열었다.

“먼저, 확인된 사실부터 정리해보겠습니다.”

베르테르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첫째. 폭풍의 마녀가 사용한 대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가의 재료가 필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폭풍의 마녀가 대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할 때 나를 포함해 기사나 마법사, 에리스 할 것 없이 마력을 쓰는 자는 온몸의 마력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크리스틴이 마도 왕국에 확인한 바로는, 마력 증폭 수정을 한 지역에서 여러 개 사용하면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마력 증폭 수정의 가격이 눈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고가라는 정보도 확인했다.

“따라서 그 대마법을 그렇게 남발할 수는 없을 걸로 추정됩니다, 만.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적인 관측입니다. 그래도 시전하기 전에 전조가 확실하다는 건 호재지요.”

베르테르가 중지를 펴 보였다.

“둘째. 폭풍의 마녀가 대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하여 그것이 발현되기까지, 대략 3시간가량이 소요되었습니다. 마법진을 구축하고 보조 마법사들이 이를 돕던 걸로 미루어 보아, 시전 중에는 움직일 수 없다고 봐도 타당하겠죠.”

마지막으로 베르테르가 약지를 펴 보였다.

“셋째. 이건 기사인 라파예트 후작님과 다른 마법사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입니다만. 폭풍의 마녀 정도 되는 대마법사라면 술식을 구성하는 마나를 써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그만큼 마법의 구축은 늦어지겠지만, 원거리에서 맞추기도 힘든 포격만으로 처리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전조도 확실하고 엄청난 돈을 써서 3시간에 걸쳐 시전 해야 발동하는 대마법이지만, 원거리에서 운 좋게 포격으로 막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어야 한다.

“일단 발동하면 폭우를 퍼붓는 번개 폭풍이 휘몰아칩니다. 처음 내리는 폭우만으로도 이쪽의 화약은 전부 못 쓰게 되니, 굳이 번개가 아니라도 발동하면 거의 패배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염병. 저런 걸 어떻게 잡으라고?”

불같은 성질의 제롬 모렐.

“명령을 주십시오. 제 부대는 어떤 임무라도 수행하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쓸데없이 열정적인 니콜라 네.

“군사들의 사기가 걱정입니다. 그런 광경을 봤으니....”

그나마 신중한 루이 드제와, 그 옆에서 심각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가스통.

“...휴전은 안 받아주겠지?”

마지막으로 말을 내뱉은 데미앙 드 미르보는 일제히 쏠린 시선에 찔끔하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한동안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발리앙이 입을 열었다.

“하, 빌어먹을. 전술과 기교로 대결해야 할 신성한 전장에서 비겁하게 마법질이야.”

그 대단한 전술가인 발리앙조차 분노만을 토로한다.

저걸 어떻게 잡는다.

조금 고민해 봤지만, 떠오르는 건 하나 정도뿐이다.

“대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할 때 기사들이 기습을 가해서, 폭풍의 마녀만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면....”

하지만 발리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는 레오폴트 대공입니다. 후사르들이 정찰대로 활약하고 있는 이상, 어설픈 기습을 가하려다간 자칫하면 몰살입니다. 장군님도 이미 예상된 기사들의 돌격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브르타뉴 공작과 그의 기사들을 산탄포로 처리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했는데, 그 레오폴트 대공이 못 할 리가 없지.

그대로 회의장에 침묵만이 흐르던 가운데, 발리앙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방법은 기사들이 돌파해, 그 마녀를 처리하는 것뿐이군요.”

“그게 가능은 하겠습니까, 장군?”

북부군 참모장 베르테르의 말에, 발리앙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물러날 곳이 없어. 이곳 랭스에서 물러나면 수도 뤼미에르가 지척이야. 뤼미에르에서 또 그 마법을 쓰면 어떻게 할 건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칠 건가?”

“하지만 기사들로 기습하는 건 실패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질문을 받은 발리앙은 잠시 고민하는 듯이 침묵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발리앙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습이 아니라 정면 돌파라면 가능합니다. 저들도 아군의 등짝에 대고 포격을 퍼부을 수는 없으니까.”

“정면 돌파라. 적도 바보가 아니니 그 마녀를 적진 한가운데에서 엄중히 지킬텐데, 3시간 안에 레오폴트 대공이 지휘하는 동수의 병력을 뚫고 거기까지 도달한다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청기사가 단신으로 그런 짓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자가 청기사였고 적이 무능한 루이 왕이어서 가능했던 것 아닌가?

“...생각은 있습니다. 전술가로서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것은 정말 싫지만, 우리에게도 저들이 대응할 수 없는 패가 있으니까요. 일단 길을 열기만 하면, 기사들을 앞세우고 그 뒤로 전 병력이 총공세를 펴는 거죠.”

저들이 대응할 수 없는 패라고 하면, 저들보다 그나마 우위인 우리의 기사와 조금이나마 마력을 다루는 법을 배운 중기병 전력.

...그리고 에리스인가.

“어차피 후방에 예비대를 얼마나 남겨두든, 뭘 아끼든 폭풍의 마녀가 대마법을 사용하는 즉시 패배입니다. 여기선 다 쏟아붓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드제가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그런 재앙을 본 병사들이 이런 무모한 도박을 명한다고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나도 그게 걱정이다. 마법이 떨어지는 순간 다 죽을 걸 알고도, 적진에 정면으로 돌격을 감행한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조차 하기 싫다는 얼굴인데, 항명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발리앙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본을 보여 앞장서서 적진으로 뛰어들 사람이 필요합니다. 병사들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만한 강함과 상징성이 있는 사람이.”

-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완전히 차단된 막사 안.

어두워야 할 막사 안을 에리스가 발하는 빛이 밝히고 있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에리스가 두 손 위에 얹은 화살을 축성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청기사를 죽인 루이 왕의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을 쏘아 죽일 때 썼던 조커카드.

성녀가 며칠에 걸쳐서 신성력을 들이부은 화살에 내 마력까지 더해 날리면 어지간한 마력 방벽 정도는 우습게 뚫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번 작전에 대해 확신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장군님과 휘하 기사들이 이 작전을 거부해도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후방의 지휘를 맡을 사람도 필요하고 제가 가봐야 방해가 될 뿐이니까요.

데미앙을 비롯한 내 부하들이 아예 우리를 지옥의 아가리로 밀어 넣을 생각이냐며 한 항의에, 발리앙이 한 답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패배하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좀 무책임한 말이지만 어차피 여기서 죽나, 좀 늦게 루이 왕에게 처형당하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나를 포함하여 저들 모두를 사지로 밀어 넣을 만한 가치가, 이 나라에 있는가?

“후작님.”

에리스가 내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그래.”

이 전투 전까지,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명확했다.

루이 왕과 완전히 적대한 이상 외세에 붙어봐야 남는 건 숙청뿐이었고, 외세에 맞서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명백했다.

내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아, 더 나은 미래를 얻기 위해.

하지만, 애초부터 그게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내가 처형당한 이후의 프랑지아는 과연 저런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 나라의 붕괴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크리스틴을 데리고 해외로 도망치는 쪽이 나은 것 아닐까?

우리 모두 돈은 충분히 있다. 신성 교국으로라도 몸을 피하면 루이 왕이나 제국의 손아귀도 닿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나는 신성력의 은은한 빛에 휩싸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나를 믿고 성녀가 된 에리스는 사람들을 버리고 프랑지아를 떠난다는 선택지를 결코 고르지 않을 거다.

아마 내가 이 나라를 포기해도, 듀몬트 남작과 툴루즈의 충신들은 이 땅에 남겠지.

결과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후까지 영지를 포기하지 않은 리오넬백작처럼.

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내 사람들에게 희생을 감수하게 만든 내가, 이제는 안 될 것 같으니 그들을 포기하고 도망친다고?

저절로 이가 갈린다.

-만약 각하께서 그러지 못하신다면, 저는 라파예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청기사’가 아니라 저를 떠올리게 해줄 작정이니까요.

그 청기사를 도발하여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게 만든 나의 말은 그대로 나 자신에 대한 주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피투성이가 된 크리스틴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걸고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든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과연 나는, 여기서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에리스에게 다가갔다.

“에리스. 아니, 나의 주군.”

에리스는 조금 움찔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저와 제 사람들이 목숨을 걸어야 할 가치가 있습니까?”

크리스틴이 습격당한 사건 이후 내가 더는 이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에리스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마치 무게에 억눌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여왕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니까. 제게 이 나라와 사람들은 그저 당연히 지켜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리스는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도 간청하고 싶어요. 이 땅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힘을 빌려주시면 좋겠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테니까.”

“무엇이든?”

“...네, 무엇이든.”

사람을 해치는 것을 싫어하고, 순수한 선의만을 베풀고 싶어 하던 소녀의 답.

그럼에도 나는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을 위해, 성녀의 손에까지 피를 묻히고자 다그친다.

“신중하게 대답하십시오, 왕녀 전하. 지금 우리가 하려는 짓은 어쩌면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확정적인 파멸을 피해 보겠다는 발악으로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당신이 성녀로서 저들을 이끌어 그 사지로 몰아넣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에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열린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차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기억하시나요? 리오넬에서 제게 모두를 구하지 말라고 명하신 다음, 후작님이 하신 말씀.”

-사람을 구하려는 성녀가 뭐가 나쁘겠어. 구할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정해두는 놈들이 나쁜 거지. 그러니 책임은 나한테 떠넘겨 둬.

나는 내가 한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때는 무척, 위안이 되어준 말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 자신이 한심하더라고요.”

에리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결국 저는 이 나라를 위한다고, 사람들을 구한다고 말하면서 한 번도 그런 책임을 져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후작님께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후작님이 이 나라를 위해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니 그래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에리스를 멋대로 패로 준비해, 그녀에게 선택을 요구한 건 나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이 나라가 이런 상황에 처한 건 결국, 왕위에 오를 자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지 않아서인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후작님이 저를 옳은 길로 이끌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의지했죠. 후작님이 끝내 지치고, 이 나라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까지도.”

에리스의 입가에서 흐릿하던 미소가 지워지고, 딱딱하지만 단호한 어조가 울려 퍼진다.

“여기서 굴복하면 이 나라 사람들과 우리 모두에게 지난날보다 더한 굴욕과 압제만이 남을 겁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서린다.

“이 나라의 왕녀로서 이 나라 사람들을, 후작님을 믿고 제 모든 걸 걸겠습니다. 부디 싸워주세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그대들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결국 이 나라의 지도층 누구에게도 없던, 흔들리지 않는 결의를 품은 것이 잊힌 서출의 왕녀라니.

그 사실에 환멸과 경의를 동시에 담아.

“라파예트 후작님. 이 나라를 믿을 수 없다면, 저를 믿어주세요.”

간청하는 에리스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내가 내리지 못한 결단을, 주군이라는 핑계로 떠넘긴 소녀가 대신 내려주었으니.

“그러시다면, 저도 기꺼이 전하와 함께 전장에 서겠습니다.”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성녀에게, 나 또한 나의 충성과 우리의 운명을 걸어보겠다.

“제 검에 맹세코,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작가의말

뿌링틀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저런 마법사가 있는데 대체 혁명이 어떻게 났느냐 하면, 애초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도 왕국의 현자급 마법사가 전장에 서는 일 자체가 수백년만의,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제국의 근위마도단은 프랑지아-크라프테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제국이 절치부심하며 국력을 퍼부어 만든 부대이고 이제야 첫 선을 보였으니, 프랑지아에 혁명 분위기가 조성되는데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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