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50화 (50/258)

혁명기 - 전환점

사건 이후 며칠이 흐르고, 크리스틴의 저택 응접실.

“역시, 가만히 쉬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쪽이 더 좋네요.”

크리스틴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솔직히, 저는 여전히 당신에겐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충분히 쉬었다고 주장하며 국민의회에 참석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불안하다.

“걱정은 고맙지만, 저를 유리 인형처럼 취급하시는 건 싫어요.”

저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말을 돌렸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러게요.”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흘긋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난 의회에 불참했던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이번 의회에 참석했지만, 그나 다른 의원 모두 그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만에 하나 그가 그 사건을 들고 나오면 대응하기 위해 그녀가 모았던 자료들을 준비해 갔지만, 쓸 일이 없었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틴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 사람치고는 최대한의 타협을 한 건지도 모르죠.”

타협, 타협이라.

자신의 파벌 중 일부가 공화국의 법을 무시한 채 뤼미에르의 한복판에서 시민들과 크리스틴을 해쳤지만, 공화국 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할 그들을 내가 법을 무시한 채 살해해버린 상황.

그의 원칙으로는 내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뻔뻔하게 내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서 고른 선택이라 이건가.

-이따위로 해야만 유지될 질서라면 차라리 무너져야지.

이지도르의 목에 검을 들이대면서 한 말.

-그러니 증명해 보이시죠. 과연 이 공화국에, 진정으로 지켜야만 할 가치가 있는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고 개혁에 반발하는 자들을 쓸어내려고 하면서, 그것은 전체를 위해 필요한 소수의 희생이라고 하던 자.

그런 자도, 변화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겠지.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크리스틴에게 사과해야만 했지만, 시기를 놓쳐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이번 건은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뭐가요?”

“...당신이 기껏 정치적 공세를 위해 살려둔 자들을, 내가 전부 죽여 버려서.”

그때는 정말로 이성을 잃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 국민의회가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그러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짓이었다.

크리스틴은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의외로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괜찮아요, 피에르. 원래부터 그걸로 급진파를 다 쓸어낼 작정은 아니었어요.”

“...그랬습니까?”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분도 충분하지 않고 만약 우리가 급진파를 전부 쓸어버리면, 그다음은 우리와 온건파 의원들의 동맹이 끊어질 뿐인걸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수적으로 우리가 불리하잖아요?”

“확실히.”

지금이야 우리와 온건파가 한 패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다수인 급진파를 견제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이지 완전히 이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제가 원했던 건 국민의회에서 경고의 의미로, 명확한 혐의가 있는 자들만 쓸어내는 거였어요. 그걸 피에르, 당신에게 맡기려고 했죠. 군사령관으로서뿐 아니라, 국민의회에서의 당신의 영향력을 각인시키기 위해.”

크리스틴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쿠키를 하나 집어 들어, 반만 떼어내더니 입에 넣고 오독거렸다.

식사라고는 대부분 집무실에서 간단하게 빵 같은 걸로 때우던 사람이, 이제 좀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표정이 풀렸다.

크리스틴은 내 표정을 보곤 슬며시 웃더니, 쿠키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어쨌든 목적은 달성되었어요. 급진파는 완전히 위축되었고, 의회는 지금까지처럼 대놓고 우리를 견제하지 못할 거예요. 솔직히, 제 계획대로 했어도 이만한 효과는 없었을 것 같아요.”

“...그 정도입니까?”

그냥 눈 돌아가서 날뛰었는데, 이게 그렇게 되나?

“네. 의회에서 당신의 존재는 음, 뭐라고 할지. 자연재해 같은 걸로 변했죠.

잘못 건드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차라리 관여하지 않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연재해라....”

그거 좋은 게 맞나?

내가 슬쩍 자괴감을 느끼고 있자, 크리스틴은 그녀의 잔에 커피를 다시 따르며 입을 열었다.

“정치인들이 상대할 수 없는 무력과 군권을 가져서 가뜩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정치싸움이고 대화고 타협이고 없이 쳐들어가서 몰살시킨 것까지 알면, 그렇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죠.”

나는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민심 때문에라도 당분간은 조금 자중해야겠군요.”

“네,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뭐....”

크리스틴은 쿡, 하고 웃더니 입을 열었다.

“당장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피에르. 그런 부분에서 당신을 보조하는 것이 제 역할이기도 하고, 의외로 뤼미에르 시내에서 당신의 인기는 올랐으니까요.”

“...예?”

미치광이 살인마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러자 크리스틴은 조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평소의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말투 대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했다.

“악마들의 물건으로 테러를 벌인 악한들이 사모해온 레이디를 습격하자 분노에 차서 달려가 그들을 응징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레이디가 눈을 뜨자마자 청혼한 기사.”

덕분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깨달았을 땐 귀까지 달아오르고 있었다.

“뤼미에르 시내에는 그런 식으로 퍼져 있어요. 누구에게나 인기 있을 법한 이야기죠.”

정작 말한 장본인은 놀리는 기색이어서,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이었다.

전부 다 사실이라서 부정할 수도 없다.

내가 정말로 그렇게 행동했구나.

자각하고 나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

“마침 죽은 자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고, 뤼미에르나 아키텐 상단에는 저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자들이 꽤 있어요. 민중들에겐 고리타분한 원칙보다, 잔혹해도 확실하게 보복해 준 행동이 더 와닿는 법이니까요.”

...잘도 남의 일처럼 말하네.

그런 시선으로 빤히 보자, 크리스틴도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시선을 피했다.

“저도 처음 알았을 땐 상당히 놀랐어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 아닌가 해서, 다시 확인했을 정도니까.”

“저도 제가 그렇게 미친놈처럼 굴 수 있는 인간인지 몰랐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틴이 앉은 소파로 가서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이득이 있든, 어떤 의도가 있든 당신 자신이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은 피해 주세요.”

크리스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피에르. ...그런 짓은 이제 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틴의 눈동자에는 이제 확실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탁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자신의 목숨 따위 태연하게 패로 쓸 수 있을 것 같던 눈은 이제 없다.

내가 조용히 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손을 잡자, 그녀가 물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계획은 같습니다. 당신은 의회에서, 저는 군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며, 외세에 맞서 이 나라를 지킵니다.”

루이 왕은 건재하다. 우리는 아직도 저 부패한 왕국의 마지막 잔재를 무너트리지 못했다.

레오폴트 대공이 이끄는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강대한 적이고, 노던 연합 왕국의 군세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한동안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어비스 코퍼레이션도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저놈들이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솔직히 짚이는 게 많아서 오히려 감이 오지 않는데.

“하지만 그건 방법에 불과합니다. 공화국과 의회는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쥐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죠.”

살아남기 위해 공화국에 합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 왕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우리의 힘은 외세를 상대로 살아남기는 커녕, 공화국과 비교해도 절반의 병력도 안 될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화국에 합류했기에 저들이 옳다고, 저들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만 한다고 생각해버려서는 안 되었다.

저들에게 맞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해선 안 되는 거였다.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

자신의 사상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그 광신에 버금가는 과오를 저지른다.

자유, 평등, 박애.

민중을 위한 공화국의 가치를 노래하며 나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남자, 라파 엘 발리앙마저 그저 그것을 명분으로 썼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명분도, 사상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 따위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나와 내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준비한 명분은 공화국에 합류해 살아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명분이 정의라고 믿고, 맹종한 순간 그 사상 자체에 매몰된 거다.

“저들의 사상과 체제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지만, 만약 저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저들에게 검을 돌릴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와 나를 믿어준 이들이 이 환란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그 노력에 걸맞은 미래를 얻는 것뿐.

“공화국이니 국가니 따위가 아니라. 크리스틴,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우리를 따르는 이들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희생시키지 않겠습니다.”

저들만의 정의를 들이밀며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이 나온다면.

공화국이든, 외세든, 악마든. 그게 누가 되었든. 설사 신이라도.

전부 죽여서라도 해내주지.

나는 크리스틴의 손을 들어 올려,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크리스틴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언제나 그랬듯, 힘을 빌려드리죠. ...저는 당신 것이니까.”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우리 둘이라면 분명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피에르, 이제 전장으로 돌아가야 하죠.”

“네. 적들이 재정비를 마치면 우리를 다시 위협할 테니까요.”

크리스틴은 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 아니. 왕녀 전하와 함께 가시는 거죠?”

“그렇죠?”

크리스틴이 노골적으로 내 눈치를 살펴서, 왜 이러나 하고 있는데 그녀가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정혼자를 두고 한 눈 파는 사람은 아닐 거라 믿을게요.”

뭐라고요?

한 눈을 팔아? 내가? 누구에게? ...에리스에게?

아니 그보다, 방금 전 대화의 분위기에서 이런 화제가 튀어나온다고?

“...갑자기?”

크리스틴은 확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저는 없는 곳에서 자주 붙어 다니니까,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제겐 중요한 일이에요.”

“아니, 지금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니?”

크리스틴은 굉장히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신경 써도 되는 입장이 아니니까 애써 무시했죠. 하지만 그 아이, 제가 봐도 눈에 확 띄는 외모니까.”

그러는 본인도 눈에 확 띄는 외모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평상시의 차분함은 어디로 갔는지 안절부절못하는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나와 에리스가 서로 나름대로 신뢰하고, 뜻을 같이 하고 있기는 하다만.

“...크리스틴, 귀족으로서 국왕을 모실 때 연심이라도 품었습니까?”

크리스틴은 다소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국왕이 젊고, 당신만큼 생겨서 당신만큼 상냥하게 굴었으면 또 모르죠.”

아, 이거 안 통하네. 결국 나는 장난기를 지우고 말했다.

“...에리스는 권력을 싫어하고, 진심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아낍니다. 사상으로는 저보다도, 공화국보다도 훨씬 더 민중을 위하죠.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 저처럼 군권을 가진 권력자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성녀 여왕과 전쟁 영웅이라. 유례없이 왕권이 강한 왕국의 재림이겠네요.”

“네. 그러니까 에리스도, 저도. 처음부터 그런 건 생각조차 한 적 없습니다.

제가 그런 계획을 가졌다면, 에리스는 당장 도망쳤을 걸요. ...그리고.”

그렇게 말한 나는 크리스틴의 어깨를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약간 놀란듯하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감기고, 내가 그녀에게 품은 마음과 배려를 전부 담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 끝에 떨어져, 약간 가빠진 그녀의 호흡을 느끼며 말했다.

“단맛이 나네요.”

방금 전 쿠키를 먹은 크리스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 좀 와닿습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에게 진심인지. 그런 의심은 저도 조금 슬픕니다.”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떨어지려는데, 소맷자락이 잡혔다.

“크리스틴?”

“조금, 갑작스러워서.”

크리스틴은 더는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보며 청했다.

“...한 번 더 하면, 확실히 알 것 같은데.”

“....”

이대로 전장으로 데려가면 안 되겠지?

내가 망할 청기사의 핏줄이 맞긴 하다는 걸 이런 식으로 깨달을 줄이야.

-

뤼미에르의 교회.

어둡고 좁은 방 안.

한때 공화국의 지도부이자 민중에게 존경받던 주교, 리슐리외는 무릎 꿇고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방 안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위태롭게 일렁인다.

“아버지 주여, 저희가 크나큰 죄를 지었나이다.”

시에예스의 격려 아래 민중들의 중심이 되었을 때, 리슐리외는 자신이 그들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리슐리외가 민중들을 깨우쳐 주고 그들과 힘을 모아 올바른 목소리를 낸다면, 신을 등진 왕도 생각을 고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줄 것이라 믿었다.

“당신을 섬기는 어린 양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긴 세월 핍박받고 착취당하며 축적된 분노 위에 인권의 개념이 새겨졌을 때, 민중들은 힘없고 어리석은 어린 양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이리떼로 변했다.

리슐리외는 그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피어난 피바다의 혁명에서 눈을 돌리고 은거했다.

매일 같이 단두대가 떨어지며 내는 끔찍한 소음과, 잘려나간 머리를 보고 광분하는 민중들의 환성을 듣고 공포에 떨었다.

“부디 저희를 굽어 살펴주소서.”

마침내 벌건 대낮에 수도의 시가지에서 악마들의 물건을 사용한 테러가 터지기에 이르자, 리슐리외는 지독한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혁명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자유도, 평등도, 박애도, 너무 일렀는지도 모른다.

민중에 의한 통치, 민주주의도 너무 일렀다.

어쩌면 영원히,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청컨대, 부디 저희를 인도해 주소서.”

어쩌면,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결국 누군가가 이끌어주어야만 하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맛본 적 없던 권력 앞에 타락하고, 가져본 적 없던 힘에 취하고, 마침내 순수했던 근간조차 흔들려버린 저 민중을 대체 누가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영웅이 있어야 저런 자들을 올바른 길로-

“헛-!”

열린 창문을 통해, 갑작스러운 돌풍이 불었다.

나약한 불빛을 일렁이며 어두운 방을 밝히던 촛불은 속절없이 꺼져버리고, 책상 위에 놓였던 신문이 멋대로 팔락거리며 날아다녔다.

“끄응, 저의 어리석음을 벌하시나이까, 주여.”

바람이 지나가고, 몸을 일으킨 리슐리외 주교는 발치에 떨어진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촛불이 켜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달빛이 비추는, 신문에 실린 초상화를 보았다.

3개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공화국과 민중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라파엘 발리앙.

달빛이 비치는 초상화를 한참 들여다보던 리슐리외는 성상 앞에서 다시 무릎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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