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49화 (49/258)

혁명기 - 흑장미 (3)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완전히 해가 진 뒤였다.

부하들은 내 몰골과 짙은 피비린내에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간다.”

“옛!”

말에 올라 이동하다가 뤼미에르의 중앙광장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일단의 무리를 이끄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와 조우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

공화국과 민주주의에 모든 것을 바친 남자는 달빛이 비춘 내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크리스틴이 습격당한 사건을 뒤늦게 전해 듣고, 한때의 제 추종자들을 징벌하러 가시던 참인가?

“...라파예트 후작.”

“이지도르 의원.”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뒤.

이지도르가 천천히,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키텐 백작이 겪은 불행한 사건에 유감을 표합니다.”

“유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말에서 뛰어내리자 이지도르를 따르던 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이지도르가 손을 들어 막았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단정하던 그의 옷이 피로 더러워지는데도, 안경 쓴 이지도르의 안색은 변하지 않는다.

“유감, 유감. 유감....”

헛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내가 지금 의원의 목을 날려버리면, 참으로 유감스럽겠군요?”

이지도르는 잠시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뤼미에르의 평화를 해치고,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자들은 공화국의 법에 따라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필요하다면, 나 또한.”

이지도르의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허나 적법한 재판 없이 후작이 내 목을 날린다면, 공화국이 후작을 심판할 겁니다.”

“하....”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어째서 그렇게 떳떳하지?

“막시밀리앙, 이지도르.”

-이하와 같은 죄목으로 공화국 국민들을 대변하는 저, 원고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피고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청구합니다.

내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청구한 자.

“당신을 추종하던 자들이, 당신과 함께 위선을 쌓아올린 자들이 공화국의 법을 무시하고 내 사람을 해쳤는데.”

-오, 그래서 내전 중이니 자국민을 공격한 것도 무죄라 이거요? 말해보시오, 후작. 그 영지의 영지민들이 직접 2왕자를 지지하고 그를 위해 무기를 들었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악몽에 나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그의 말을 상기했다.

“말해보시죠, 의원. 아키텐 백작이, 크리스틴이 공화국의 법을 어겼습니까?”

네놈들이 정의라면서, 내 모든 걸 부정했잖아.

“영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대들과 타협한 우리가, 그대들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옛 동맹을 친 내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선 내 군사들이! 공화국에 반기라도 들었습니까?”

그랬으면 최소한, 네놈들은 이러지 말아야지.

“말해.”

정의롭지는 못해도, 네놈들이 말하던 정의를 제 발로 짓밟지는 말았어야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나를 믿고 네놈들에게 미래를 걸어준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해!

“...라파예트 후작, 분노는 이해하나-”

“이해? 그대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해본 적이 있기는 하던가?”

우리가 무슨 대가를 치렀는데.

우리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했다.

파탄 난 공화국을 위해 자금도, 식량도 지원했다.

옛 동맹을 져버리면서까지 저들을 위해 피 흘려 싸웠는데.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대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낼 궁리만 해온 그대들이 감히 나를 이해한다고?”

그래서 네놈들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뭐 하나라도 포기해본 적이 있었나?

“소수의 희생은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나, 때로는 전체를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가?”

네놈들만이 옳다고 믿으며, 네놈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반역자로 몰았잖아.

“그를 통해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진정한 개혁이 가능해진다고.”

대체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가치 있길래?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확신하고 그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필요한 희생이라며 배제하려는 그대들이야말로, 귀족보다도 오만한 자들이야.”

그 신념을 논해온 네놈들은 해선 안 되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데.

“자신은 부패하지 않았으니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독선적인 위선자. 그런 당신을 추종하며 자신들만은 깨어있다고 착각해온 자들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 못한 자들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보고도 모르겠나?”

그래놓고 그 뻔뻔한 입으로 위선만을 늘어놓아?

“이 나라에는 그대들이 노래한 정의도, 그대들이 신념으로 삼은 대의도 없어.

그 숱한 피로 어렵게 세워진 공화국을, 바로 그대들이 그렇게 전락시켰어.”

이지도르는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몇 번이고 움직이려던 입은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닫혔다.

긴 침묵이 지나고서야, 이지도르의 입이 다시 열려 잔뜩 억눌린 음성을 낸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남자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완연하다.

“바로잡는 것을 포기하고 질서를 무너트린다면, 영원한 혼돈만이 남습니다.”

나는 이지도르의 말에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중앙 광장의 구석에, 내 이전 삶을 끝낸 단두대가 있다.

공화국이 내세운 정의의 집행 도구, 저들이 구축한 질서의 상징.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부패해버린 구체제에서, 혁명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그 뒤 자리 잡은 것이, 저들이 정한 정의에 어긋나는 자들을 전부 희생시켜야만 유지되는 질서라면.

그런 피로 물든 질서를 지켜야만 하는가?

“이따위로 해야만 유지될 질서라면 차라리 무너져야지.”

등을 돌려, 검을 뽑아 이지도르에게 겨누었다.

나는, 우리는 공화국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저들과 함께 할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니 증명해 보이시죠. 과연 이 공화국에, 진정으로 지켜야만 할 가치가 있는지.”

그러니 이번엔 네놈들이 증명해 봐라.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대들이 노래해 온 그 정의가, 그대들이 민중들에게 약속한 자유, 평등, 박애가 모두 위선에 불과하다면.”

가슴속을 태워버릴 것 같은,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내가 그대들의 질서를 무너트릴 선봉에 설 테니.”

-

다음날. 뤼미에르 전역에 크리스틴이 습격당한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생쥐스트 클럽에서 10명의 의원과 그 수하들이 참혹한 꼴로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무성한 말이 돌아다녔다.

국민의회가 열렸지만 처음으로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불참하는 초유의 사태속에, 어느 의원도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회 전체가 공포에 질린 걸로 보였고, 의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협조적으로 굴었다.

그 상황에 허탈함과 씁쓸함을 느끼며 피가 마르는 감각 속에 이틀이 지나고서야, 크리스틴이 깨어났다.

“...크리스틴.”

“피에르.”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크리스틴이 제대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내가 숨을 쉬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뜨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느 것도 언어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침묵이 흐른 끝에 먼저 입을 연 쪽은 크리스틴이었다.

“...저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아니, 당신이 위험에 처한 것도 결국은-”

“아니요.”

크리스틴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 위험은 제가 자초했어요. 저들의 음모를 파악하고도 저들을 먼저 처리하는 대신, 당신이 돌아왔을 때 정치적으로 한 번에 솎아내려고 기다렸어요.”

아직은 힘이 드는지 잠시 숨을 고른 크리스틴이 덧붙였다.

“그러니 이건 제 잘못이에요. 당신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녀의 태도는 내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 앉은 크리스틴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깊고 탁한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손을 뻗어, 검고 긴 머리칼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피에르.”

차라리, 형식상으로라도 이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면.

그러면 그녀도 조금은 나에게 기대려고 해줄까.

“우리, 다시 약혼할까요?”

늘 차분하던 검은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짓궂은 농담을 하시네요.”

그녀의 눈이 울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평소라면 차분하게 유지할 표정을 가다듬지 못해 흔들리는 것도.

그녀의 심신이 모두 지쳐서겠지.

그런 그녀의 상태를 배려하기는커녕 이용하며, 비겁하게 다가서는 나 또한 너무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죠.”

크리스틴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당신이 성년이 된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물려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걸 몰라주기엔, 우리는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루이스에게 권리를 돌려주고 나면, 저와 함께 해달라고 청하는 겁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크리스틴의 표정은 진심으로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픔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내 말에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라파예트의 위신을 바닥에 처박기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어느 쪽이어도, 저는-”

“제게는 라파예트의 위신보다, 아키텐 상단의 영향력보다 당신 한 사람이 더 가치 있습니다.”

크리스틴은 입을 다물었다.

꽤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손을 뻗어 내가 가슴에 달고 있는 흑장미 브로 치를 매만졌다.

그녀가 직접 선물해 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아티팩트.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물어온다.

“흑장미의 꽃말을 아시나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다.

“이별이에요.”

그렇게 말한 크리스틴의 눈동자는 완전히 차갑고 탁하게 식어 내렸다.

내가 그녀를 저렇게 만들었다.

내 계획에 크리스틴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족에게 배신당한 그녀에게 복수를 종용했다.

그녀가 지독한 허무감에 몸서리치는 것을 알고도, 그녀의 뜻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거리를 두었다.

그녀를 위로하는 대신 프랑지아를 위해 싸운 끝에 더 나은 미래를 그녀에게 쥐여주겠다는, 나 자신조차 기만하는 헛된 이상을 좇았다.

나는 천천히, 가슴에 달고 있던 브로치를 떼어냈다.

크리스틴은 그런 나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크리스틴.”

“말씀하세요, 라파예트 후작님.”

“그래서, 제가 싫습니까?”

크리스틴이 쓰고 있던 가면이 깨졌다.

“제가 정말로 싫으면 저를 거부하고, 두 번 다시 다가오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크리스틴이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그건, 그걸. 어떻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저를 거부하지 말아주세요.”

회귀 전에는 고작해야 대화 몇 번 나누어본 사이였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가족들의 손에 배신당해 죽게 내버려 두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크리스틴이 탄식하듯 묻는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 제게 얼마나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할 작정이에요.”

그녀를 살려낸 것이, 미래를 바꾸기 위한 내 모든 것의 시작인데.

지금껏 내가 바꿔온 모든 일이 크리스틴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매 순간 그녀는 언제나 최우선이었는데.

그래놓고 정작.

당장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지 못해 살도록 내버려 두고, 더 나은 미래따위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흑장미의 꽃말은 다른 것도 있었죠.”

정말로 모르길 바란 건지, 아니면 알아봐 주기를 바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준 선물의 의미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평소의 차분한 태도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려,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되도록 다정하게.

그러나 새기듯이 말했다.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

마침내 크리스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니.”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뻗어, 내 가슴에서 떼어낸 흑장미 브로치를 그녀의 가슴에 달아주며 청했다.

“당신도 제 것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무너져버리는 크리스틴을 품에 끌어 안았다.

자신을 배신한 가족을 죽이고,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웃으며 춤을 권했던 사람의 오열이 가슴을 울려서.

회귀 전에 구하지 못한 그녀에게, 이제야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 그녀에게 사죄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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