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흑장미 (2)
괜스레 발리앙의 말이 신경 쓰여,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뤼미에르에서는 총성과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다급하게 현장에 가서.
쓰러진 채 피 흘리고 있는 크리스틴을 발견하고.
그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 냄새가 떠나질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크리스틴을 내려다보았다.
피로 물든 드레스와 붕대,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당장의 고비는 넘겼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심각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에 뜨겁고 질척한 무언가가 눌어붙은 듯한 감각에 숨이 막힌다.
“...후작님. 카론 남작의 치료가 끝났어요.”
등 뒤에서 에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에리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작님, 하다못해 피범벅인 옷이라도 갈아입어요. 그러고 있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나는 등을 돌려 에리스에게 무어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을 한 에리스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아무 죄도 없다. 한 거라곤 크리스틴과 카론 남작을 살리겠다고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힘을 쓴 것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가.
내가 손으로 다시 얼굴을 쓸어내리자, 에리스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저, 먼저 쉬러 가볼게요.”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제 일이니까요.”
에리스는 쓰게 웃으며 등을 돌려, 비척거리며 방을 나섰다.
성녀인 에리스를 저렇게까지 고갈시킨, 뭔지도 모를 저주받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총탄.
원리는 모르겠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고, 신성력으로 상처가 낫는 것까지 방해한다. 일반적인 사제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
운 좋게 에리스와 함께 온 것이 아니었다면, 크리스틴과 카론 남작 둘 다 반드시 죽었다.
그 사실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죽이고 싶었나?
뤼미에르 한복판에서 시민들이 휘말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공화국이 적이라고 선포한 악마들의 힘을 빌려서까지?
대체 크리스틴이, 우리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해서?
“라파예트 후작 각하.”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카론 남작이 서 있었다.
크리스틴을 지키다가 자신도 죽을 뻔한, 그녀의 심복.
“...카론 남작도 같은 총탄에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쉬셔야 할 텐데.”
“이래도 기사입니다. 백작 각하를 지키지 못했는데, 제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편히 쉬겠습니까. 송구하오나, 지금은 이것을.”
카론 남작이 건넨 것은 서류였다.
내가 그것을 읽기 시작하자, 남작이 입을 열었다.
“유사시 라파예트 후작님께 전하라고, 아키텐 백작 각하께서 명하신 물건입니다.”
그 말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사시 자신이 전하지 못하게 되면, 카론 남작에게 전하라고 명했다.
어쩌면 그저 매사에 대비가 철저한 그녀답게 내려둔 명령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명령을 내린 크리스틴이 저 말로를 처리하고 잊힌 소녀처럼, 그녀 자신조차 패로 여긴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그녀에게 그런 자리를 맡기고 의존한 것 같아서.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만이 끓어올랐다.
-
회귀 전, 나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려서부터 촉망받던 기사로서의 미래는 기사제에서 가스통에게 패배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몇 번 만나 좋은 인상을 가졌던 약혼녀, 크리스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사로 위장하여 살해당했다.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고, 청기사의 의도대로 철저히 실패자로 낙인찍힌 나에겐 귀족으로서 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영민들만을 바라보았다. 그들만은 내가 평민에게 패배한 귀족의 수치라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족인 내가 그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친절을 베푼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좋아해 주고, 칭송해 주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끄는 군사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랬기에 나를 따르던 이들도, 내 군사들도 혁명군 앞에서 무너져 내렸을 때.
혁명정부의 재판에서 그 모든 것이 그저 영주라는 내 지위로 얻은 헛된 자위에 불과하며, 나 또한 다른 부패한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부정당한 순간.
내 인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석양이 저물어가는, 피처럼 붉게 물든 뤼미에르 시내.
나는 정신없이 말을 달린 끝에 한 건물 앞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렸다.
카론 남작에게 건네받은, 크리스틴이 준비한 서류.
거기 있던 지도에 그려진 건물. 숨겨진 급진파들의 모의 장소, 소위 생쥐스트클럽.
“...주변 통제해. 그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후작 각하.”
나는 검을 뽑아들고 문을 두들겼다.
“누구시오? 헉, 라파예트 후-”
문을 열고 나온, 귀찮아 보이던 남자의 눈초리가 경계로 덮였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내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밀치며, 남자의 목을 검으로 그어버렸다.
“끄르륵....”
피거품을 뱉은 남자가 천천히 무너졌다.
하수인 하나를 죽여도, 피를 끓여버릴 것 같은 미칠 듯한 분노는 쉬지 않고 내달린다.
그 분노에 몸을 맡겨, 남자를 내던지고 문을 걷어찬 뒤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쾅.
걷어차인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서,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이민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똑같이 목을 그어버렸다.
“허, 헉-”
뒤늦게 나와선 그 광경을 보고 다급하게 권총을 뽑으려던 자의 미간에 단도를 박아버리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넘어진다.
그 외에 다른 움직임은 없다.
주변을 흘긋 둘러보니 청동 조각상이 있어서, 검으로 일부러 그것을 쳐서 소음을 내자 다시 누군가가 확인하러 나오고.
그자를 죽인다.
몇 번 반복하자, 저택 안이 고요해졌다.
복도 끝의 방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자, 방문이 열렸다.
“어이, 이봐. 왜 이리 소란-”
이제야 아는 얼굴을 마주했다.
크리스틴이 기록한 리스트에 있던, 급진파의 의원 중 하나.
그 비대하게 배가 나온 남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가 순식간에 소란이 되었다.
나는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이내 소란이 혼란으로 번져가기 시작할 때쯤 마력을 실어 문을 걷어찼다.
“허, 허억!”
“으아앗!”
썩은 나무토막처럼 떨어져 나간 문짝이 방 안으로 쓰러지고, 안에 있던 의원들이 기함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열.
생쥐스트를 포함해 크리스틴의 리스트에 있던 의원들이 전부 모여 있어, 나는 실소를 흘렸다.
수고는 덜겠네.
“공사다망하신 의원님들이 이렇게 쥐새끼들처럼 한자리에 모여 계시다니, 별일이군요.”
내 말에 답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피로 물든 내 옷에 박혀있다는 것을 깨닫자, 실소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하하, 하하하. 무슨 생각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튄 피는 아닙니다.
아키텐 백작의 피거든요.”
아키텐 백작이라는 말에 의원들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완전히 피에 절어서 의식을 잃은,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내달릴 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지옥에라도 떨어진 것 같던 순간의 기억을 상기하자 기분은 한층 더 저조해졌다.
나는 의원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왜들 말이 없으십니까?”
댁들 잘하는 거 있잖아.
혁명의 대의니, 공화국의 정의니.
자유, 평등, 박애.
입에 발린듯한 그럴듯한 위선을 걸어놓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부 다 구체제의 악으로 매도해버리는 그 기만적인 행동들.
내가 천천히 방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자, 의원들은 나를 피하듯이 방의 구석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충격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이들의 리더 생쥐스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라, 라파예트 후작.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뭐가 말이 안 됩니까?”
“그 피, 밖에 사람들은, 대체.”
“아, 의원님의 수하들이라면 다 죽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타들어가는 것 같다.
이들에게 윽박지르고 싶은 말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이건, 미친 짓이오. 우리는 후작의 이 무도한 행위에 대해 의회에서 고발-”
생쥐스트의 말은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겨누자 그대로 멈췄다.
“...이상하군. 시체가 고발을 어떻게 하지?”
“허, 허억!”
“히이이!”
문 근처에 있던 의원이 헐레벌떡 문으로 달리기 시작해서, 바로 단도를 뽑아던져 그 의원의 다리에 박아버렸다.
“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 으아아아!”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의원의 다리에 박힌 단도를 그대로 밟아버렸다.
끔찍한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진다.
봐라,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잖아.
인간도 아닌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지?
의원들 모두 혈색이 싹 가신 채 덜덜 떨고 있는 와중에, 한 의원이 권총을 뽑아들고 쐈다.
그 헛된 저항은 내 마력에 그대로 튕겨나갔다.
“아, 아아....”
모두에게 절망의 빛이 서리는 가운데, 의원 중 하나가 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후, 후작! 살려주시오! 생쥐스트 의원이 모든 일의 주동자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끌려와 있었을 뿐이오!”
“베, 베흐나흐 의원! 무슨 소리요!”
“저 혼자 살겠다고! 라파예트 후작, 저 베흐나흐야말로 적극적으로 찬동한 자요. 나는 처음부터 이게 그런 미친 테러를 하려는 모임인지 몰랐소!”
“하....”
헛웃음만이 흘렀다.
이런 자들이, 내 지난 삶을 부정했다고.
“자유가 어디에 있지?”
민중을 약탈했다고 나를 비난하며 처형시킨 자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민중을 반역자로 몰아 학살하려 들었다.
“평등은?”
지금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귀족에게 빼앗은 저택에 모여, 사후대책을 논하고 있던 이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뤼미에르의 시민 따위 몇 정도 죽어도 상관없다고, 시가지 한복판에서 테러를 벌인 자들이 진정으로 민중을 평등하게 여긴다고?
“박애는?”
프랑지아인의 단결과 의회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자들이 크리스틴을 왜 죽이려고 들었지?
뤼미에르 시민들의 삶을 안정시켜주었다고 그녀가 칭송받아서, 그녀 때문에 의회를 자기네들 뜻대로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되어서.
자기네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민주주의로는 이길 수 없으니까, 저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악마들의 힘을 빌렸다.
-저들만의 이상론에 잠식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바치기에, 후작님의 충성과 헌신은 지나치게 값집니다.
모르지 않았다.
나만이라면 차라리 상관없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의 헌신에 기대어 기생하는 곰팡이들을 위해, 후작님 자신과 추종자들이 치른 희생에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그러나 나에겐 책임져야 마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까지 요구하여, 이들의 공화국과 함께 하려고 노력해왔다.
애써 외면해왔으나 계속해서 커져온 마음의 균열에, 발리앙이 뿌린 씨앗이 파고든다.
-과연, 후작님이 저 공화정부와 함께 추구한 대의가 무언가를 이루어내기는 했습니까?
최선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켜 왔다.
공화국이 승리했고, 내가 패배했으니까.
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고, 이들의 자유가, 평등이, 박애가 옳았노라고 선언하며 나를 처형했으니까!
그랬기에 나를 믿어준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이들과 함께 했다.
이들이 실제로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충성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저들이 아니라 프랑지아에 충성한다고, 이 나라의 국민들을 지킨다고.
최소한 매국노로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목숨만 건지는 것보다 낫다고, 그렇게 애써 자위하며 여기까지 왔다.
왜? 이들이 노래하는 민주주의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애국심으로 포장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을 내가 지켜야 할 자들로 각인시키기라도 해야.
그렇게라도 해야.
최소한 지켜야 할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명예를 쌓아올린 아비와는 다르게, 나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싸운다고 납득시킬 수라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결과가 뭐지?
과연 나와 나를 따른 이들은 그 희생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나?
눈물을 쏟으면서도 나를 믿고 영지를 포기한 봉신들.
최후까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영지를 포기할 수 없던 리오넬 백작.
시체처럼 축 늘어져 힘없이 흔들리던, 피로 물든 크리스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후, 후작, 제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살려주시오.”
이름조차 알 가치 없는 가축이 짖었다.
“그 말, 후회할 텐데.”
나 자신조차 내가 이렇게 싸늘하게 웃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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