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모의
아키텐 백작가의 소년, 루이스 다키텐은 소파에 앉아서 마도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마도학 서적의 페이지만 설렁설렁넘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좋지 않아요. 그동안 급진파에 눌려있던 것의 반작용이라고는 해도, 지나쳐요.”
방의 중앙에서 그의 누이, 크리스틴 다키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백작 각하. 그렇다고 해서 토지의 무상 분배에, 재산과 무관하게 공평한 투표권을 부여하겠다니요. 부유층이 중심인 온건파도, 귀족 출신인 우리도 급진파의 저런 말도 안 되는 안건에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누이의 심복 카론 남작이 답했다.
“확실히 그런 안건이 통과되면 우리에겐 좋을 일이 없죠. 하지만 그것 외에도 양보할만한 안건은 있었어요.”
집중은 전혀 되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대화 중인 누이와 카론 남작을 바라보았다.
“급진파는 아직도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요, 온건파와 우리가 손을 잡아 일시적으로 과반을 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모든 안건을 각하시켜나가면, 급진파와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 모두 불만을 쌓을 뿐이겠죠.”
“크흠, 그러시다면....”
“온건파와 우리 쪽 모두, 의견 조절이 필요해요. 급진파를 달래기 위한 최소선의 협조는 이루어져야, 차라리 의회를 통제하기에 편해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그러면 저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부탁하죠. 물러가셔도 좋아요.”
카론 남작은 방에서 나가기 전에 흘긋 루이스에게 시선을 보냈고,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책에 시선을 박았다.
카론 남작이 나가고 루이스가 다시 집무실 중앙으로 시선을 돌리자 소년의 배다른 누이, 크리스틴 다키텐은 어둡게 침잠한 눈으로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빠르게 읽고 서명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기계라도 되는 양 서류를 처리해나가는 누이는 그의 시선을 모르는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지 그는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속도로 서류만을 줄이고 있다.
올해로 11살이 된 루이스는 조숙했다. 조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8살의 겨울. 행복했던 유년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어머니는 그가 보는 눈앞에서 누이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그 이후로 아키텐의 모든 이들이 그의 처지를 신경 쓰며 민감하게 굴었다.
아키텐의 가신들은 그를 마치 얼룩처럼 취급했다.
그를 보고 있자면 선대 백작을 죽이고 그 딸까지 죽이려 든 어머니가 떠오를 테니, 루이스는 그들이 어째서 그러는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다는 듯이 불타는 그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괴롭고 힘들었다.
누이를 따라 수도로 올라온 뒤에는 그들과 마주칠 일은 많이 줄었지만, 이곳의 사용인들도 그를 신경 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골육상쟁에서 어머니를 잃은 그를 동정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원치 않는 친절을 베풀고, 누군가는 그가 역신이라도 되는 양 선을 그으며 거리를 두고 피하려 한다.
차라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선 숨통이 트이지만, 어려서부터 다정한 관심을 받으며 자란 루이스는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루이스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은 누이의 집무실이었다.
누이는 쓸데없이 그를 살피며 관심을 주려고 애쓰지도 않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굴지도 않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를 죽여 버린 원수인 누이만이, 그를 이본느의 아들이 아니라 루이스로 바라봐 준다.
루이스는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읽으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하고, 누이를 바라보았다.
21세가 된 누이는 소년이 보기에도 제법 아름다웠으나, 그뿐이다.
누이는 레이디로서 최소한의 치장 정도는 하지만, 언제나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만을 입고 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루이스는 크리스틴의 심연처럼 깊게 침잠하고 탁한, 생기 없는 눈동자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그날 이전의 크리스틴은 저렇지 않았다.
그때도 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느긋하게 책을 읽어주거나 취미를 즐기며 사람답게 살았다.
저런 차갑고 탁한 눈이 아니라 좀 더, 생기 있는 눈을 하고 잘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죽임을 당할 때 루이스는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내막을 가신들이 들이댄 탓에 이제는 이해 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혹시라도 딴마음을 품지 말라는 거였겠지. 어쨌든 어머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죽을만한 짓을 했다.
루이스도 머리로는 그걸 이해했다.
그래도 이본느는 루이스를 사랑해 준 어머니였고, 누이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성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누이가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살았다면. 하다못해 누이가 정당한 분노와 혐오를 자신에게 드러냈다면, 그랬다면 루이스도 그녀를 증오하며 복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죽은 눈을 하고, 왜 사는지도 모르게 지내고 있어서야.
루이스는 저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누이를 불렀다.
“누님.”
차갑게 침잠해있던 눈에 미약한 생기가 돌고, 크리스틴이 얼굴을 들어 올려 시선을 보내온다.
누이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왜 그러니, 루이스?”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배는 달라도 누이와 같은 핏줄인 소년도 제법 총명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파악하고, 어머니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크리스틴을 무작정 증오하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누이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만큼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신들이 그를 혐오하면서도 함부로 해코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누이의 명령 때문이겠지.
왜?
그날 이후, 언제나 묻고 싶었으나 단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만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작위나 사업은 일반적으로 남자가 잇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빤히 10살이나 차이 나고 상단을 휘어잡으며 능력을 입증한 누이가 있는데도, 그가 암암리에 후계자로 여겨졌을 정도로.
이본느와 측근들이 처형당했고 백작도 죽어서 크리스틴이 백작위를 잇기는 했으나, 루이스는 살아있기만 해도 그녀의 위협이다.
왜 나를 살려둔 거죠?
왜 나를 아직까지 동생으로 대해주나요?
“...마법, 배워보고 싶어요.”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크리스틴은 그의 손에 들린 마도서를 흘긋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홀란트로 유학 가고 싶니?”
“...네.”
홀란트.
프랑지아의 북쪽이자 게르마니아 제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인간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인 마도 왕국.
마법에 관심이 있다는 말에, 누이는 바로 홀란트에서 마법사를 초빙하여 루이 스의 적성을 검사하고 기초적인 마도서를 구입해서 선물해 주었다.
“그래. 저쪽에서도 적성은 있다고 했으니, 알아봐 줄게.”
프랑지아의 마법사는 대부분 마력에 소양이 있는 평민들이며, 홀란트의 마법사들에 감히 비할 바가 되지 않는 조잡한 수준에 그친다.
자연히 마법에 뜻이 있는 귀족은 대부분 홀란트에서 마법을 배운다.
그렇다고는 해도, 반역자의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을 정말로 흔쾌히 유학 보내 주겠다는 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여러 가지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내보낸 것은 간단한 말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누님.”
크리스틴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날 이전에 그를 대해줄 때처럼.
루이스는 괜스레 가슴에 달고 있는 브로치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직 어색하니?”
“아니요, 그건 아닌데....”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고 다녀.”
“네....”
루이스가 하고 있는 브로치는 마도 왕국에서 마법사를 초빙하는 김에, 누이가 주문한 보호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다.
루이스는 자신의 브로치를 매만지며 느껴지는 마력을 가볍게 재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죽어도 상관없는 천덕꾸러기에게 사줄 만한 값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루이스의 눈은 누이의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훑었다. 정작 누이는 장신구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처음 누이가 그에게 브로치를 건네줄 때, 흑장미 브로치도 함께 사서 그게 누이의 것이겠거니 했는데 아니었지.
“...그러면, 시간도 늦었으니 저도 이만 가볼게요.”
그래도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유학을 허락받았다. 적어도 유학을 가면, 이렇게 숨 막힐 듯이 남의 눈치를 보는 생활도 끝나겠지.
“그래, 잘 자. 루이스.”
루이스는 누이의 집무실에서 나가려다,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러면, 누이는?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던 눈은 다시 어둡게 침잠한 채 서류를 훑느라 여념이 없다.
루이스는 누이가 흑장미 브로치를 건네준 남자를 떠올렸다.
라파예트 후작, 피에르 드 라파예트.
루이스에겐 꺼림칙하지만, 자신을 제외하면 누이는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렇게 살 거라면 그자와 행복한 모습이라도 보여주세요, 누님.
차라리 자신이 마음껏 질투하고 슬퍼할 수 있게.
루이스는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을 새기며, 누이의 집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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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지아 공화국 수도, 뤼미에르.
공화국 급진파, 그중에서도 생쥐스트 의원이 주도하는 비밀 클럽에는 급진파의 의원 여럿과 그 추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저 빌어먹을 자본가들과 귀족들이 의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니, 실로 통탄할 노릇이오.”
크리스틴의 우려대로, 국민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제 대부분을 통과시키지 못하면서 급진파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더러운 온건파와 귀족파 의원들의 담합만 아니었다면, 이 공화국은 훨씬 더 긍정적이고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거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들, 농민들이 전부 혁명군에 입대해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깨어있는 이들이 전선에 나가고 나니, 혁명의 심장인 이 뤼미에르에서 고작 빵을 싸게 준다고 귀족을 찬양하는 꼴을 볼 줄이야!”
생쥐스트는 한창 성토 중인 의원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행동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행동이라면...?”
“저 푸른 피의 귀족들과 온건파 의원들 사이에는 원래 그렇게 결속이 강하지 않습니다. 구심점만 끊어 낼 수 있다면, 저들의 나약한 연대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겠지요.”
생쥐스트는 차분히 의원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더러운 협잡꾼들로 인해 혁명의 대의가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 이 프랑지아가 저들에 의해 혁명 이전의 구질서로 회귀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의원들의 얼굴에 경계심이 서린다.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니까.
“안타깝게도 제도적으로 저들에게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지금, 우리는 다소 과격한 행동을 취해서라도 뜻을 관철해야 합니다.”
“...테러라도 하자는 겁니까?”
여기저기서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고, 생쥐스트가 답했다.
“필요하다면, 암살이든 뭐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야겠죠.”
“하, 하지만 저들의 구심점인 라파예트 후작은 강력한 기사요. 우리가 그자를 암살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지....”
“후작이 명목상 저들의 수장이긴 하나, 군사령관으로서 바쁜 그가 끼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위험한 자가 수도에서 활개 치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한 의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키텐 백작, 그 검은 요부를 해치우자는 거요?”
검은 요부, 라파예트의 첩, 아키텐의 마녀 등.
사실상 국민의회를 쥐락펴락하며, 급진파에게 온갖 혐오와 경멸을 담아 갖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여성을 떠올린 이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맞습니다. 근본적으로 귀족인 다른 자들과 달리 그 여자는 자본가들의 방식을 이용하면서, 어리석은 민중들의 눈을 가리는 법에도 통달해 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보다도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확실히, 그 여자가 없다면 자산가들과 귀족 사이의 구심점이 사라질 수도 있겠군.”
“그 사악한 마녀의 간교한 혀와 더러운 돈에 넘어간 배신자들을 생각하면....”
의원들이 동의하는 듯해 보여 생쥐스트가 싱긋 웃으려고 할 때, 한 의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지도르 의원은 동의하지 않을 거요.”
생쥐스트는 한때 그가 급진파의 수장으로서 존경해 마지않던 자를 떠올리며 슬며시 얼굴을 굳혔으나, 이내 입을 열어 그럴싸한 소리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그분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시겠지요. 저도 그분의 숭고한 대의와 공명정대함에 찬탄하며, 그분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애석하게도, 정의와 법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생쥐스트는 위험하게 눈을 빛내며 이 자리에 있는 의원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후, 광신 어린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진정으로 혁명의 대의를 위한다면, 누군가는 그분을 대신해 손을 더럽혀야 합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진정한 공화국의 애국자들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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