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43화 (43/258)

혁명기 - 서전 (3)

알자스 전선, 게르마니아 제국군 사령부.

황후의 요청도 있었고, 레오폴트 대공도 처음부터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 싸워버리면 그것대로 문제가 되니, 적을 도발해서 적당히 한 번쯤 맞붙을 생각이었다.

상대는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전선에서의 경험이라면 라파예트 후작에게 패배한 전투 몇 번 밖에 없는, 이렇다 할 전공도 없는 자.

귀족들의 군대였던 남부군에 라파예트 후작이 부재중인데 군사 지휘를 맡을만한 마땅한 인사가 없다 보니 낙점된 것 같은 자라서, 만만해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대공은 백작을 꾀어내기 위해 부대를 나누고 경기병대, 후사르들을 파견해서 인근 마을들을 약탈하며 적을 도발했다.

적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가 어떻게 대응했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적들은 인근 마을들이 약탈당하든 말든 고지대와 농장을 끼고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데미앙 드 미르보에 대한 평가를 젊은 나이치고 신중한 자로 조정했다.

이번에는 요새화된 진지의 외곽에 공세를 가하다가 패퇴하는 것으로 적들을 유인하려고 시도했다.

인근 마을을 한껏 약탈하는 와중에도 꾹 참으며 방어태세를 굳히던 적들이니, 아군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면 반드시 추격에 나설 거라고 기대했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이번에도 나서지 않았다.

대공 휘하 부대 중 제국에 다소 불충한 제후의 군대에게 사전 언질 없이 공격을 명하여 정말로 요새화 진지에 들이박다가 무너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적은 추격은커녕 공세로 흐트러진 방어선을 재정비하는데 집중했다.

이쯤 되자 레오폴트 대공도 오기가 생겼고, 치밀하게 함정을 팠다.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북서쪽, 로렌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후사르들이 적의 전령을 처리하고 빼앗은 전서구를 이용해, 라파엘 발리앙의 북부군이 로렌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어 적을 추격 중이라는 거짓 소식을 보냈다.

중앙대륙 최고의 경기병이라 불리는 후사르들에 의해 양 전선 사이는 빈틈없이 차단되어 있고, 데미앙 드 미르보는 그런 사태를 타개하려는 움직임도 보인 적 없다.

그러니 기만술이 간파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열세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약탈당하는 마을에서 눈을 돌리고, 눈앞에 보이는 승리와 전과확대도 포기한 채 오직 거점 방어에만 치중해온 적이다.

군인이란 족속들은 근본적으로 호전적이고 전공에 목마른 자들이다. 사령관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휘하 지휘관들의 불만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 와중에 아군의 승전보가 날아들고, 적이 부대를 크게 나누어 다급하게 원군으로 급파했다?

당연히 참고 또 참으며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인 적이라면, 이런 기회를 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데미앙 드 미르보는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젊은 백작은 정치적 입지고 전공이고 다 아무래도 좋다는 양, 그냥 자신의 방어선에 가만히 주저앉아 거점을 요새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휘관들과 자리한 막사에서, 레오폴트 대공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안 걸린다고? 이걸?”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공 전하.”

레오폴트 대공은 심각한 얼굴로 작전지도를 들여다보며 두 손을 모아 깍지 꼈다.

제국에 불충한 제후라고는 해도, 미끼 부대로 쓰고도 적이 낚여주지 않은데 대한 반발은 그대로 대공에 대한 압력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북서쪽으로 이동한 아군도 쓸데없이 멀리 돌아가 매복한 채 시간을 허비하며 불만을 표했다.

제일 심각한 문제로, 로렌 전선의 아군이 정말로 혁명군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북부군의 지휘관 라파엘 발리앙은 지휘 체계가 삼분되어 제대로 연계가 되지 않는 로렌 전선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방어가 아니라 아예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기동과 기습을 통한 각개격파를 반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쯤 되자 레오폴트 대공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상대가 해도 해도 너무 신중했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은 로렌 전선에서 아군이 털리고 있는 동안, 대공은 변변한 전투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뿐이니까.

결국 작전 지도를 주먹으로 내리친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요새화된 진지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 이거지.”

그에 맞춰 자리에 앉아있던 게르마니아 제국군 장교들이 일제히 일어서고, 대공이 명했다.

“저들이 그토록 방어전을 고집한다면 바라던 대로 해주자고, 제군.”

“대공 전하의 분부대로!”

게르마니아 제국의 백전노장은 형형한 눈으로 작전지도에 그려진 미르보의 진지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도록.”

-

알자스 전선, 프랑지아 공화국군 진지.

레오폴트 대공의 예상대로, 데미앙의 지휘관들이 불만이 없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휘관들은 공세를 펴자고 거의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고, 데미앙의 반응은 매번 이랬다.

-여기서 버티다 보면 북부군이 오든 라파예트 후작님이 오든 하겠지. 아무튼 난 반대야! 그래도 공세를 펴고 싶다면, 그러다 망했을 때 그 책임은 자네가질 건가?

-아, 아닙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억누른다고 해도 데미앙이 약탈당하는 마을을 무시하고 절 호의 기회로 보이는 것들을 전부 날려버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부하들의 불만은 터지기 직전까지 쌓였었다.

그러니까, 로렌으로 지원을 갔을 거라던 병력이 다시 나타나 레오폴트 대공의 지휘를 받는 2만의 온전한 군세가 총공세를 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소, 송구합니다. 백작 각하.”

기가 살아서 소리치는 데미앙의 앞에서, 할 말을 잃은 남부군 지휘관들은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다들 알겠지? 목적은 하나도 방어! 둘도 방어! 셋도 방어! 아무튼 존나 버티면 우리가 이기는 거다!”

“옛! 백작 각하의 분부대로!”

지휘관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각자의 부대로 이동한 직후, 데미앙은 어쩐지 자꾸 불길한 감각이 찌릿 거리는 뒷목을 잡았다.

처음 피에르 드 라파예트와 싸울 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째도 왜인지 모를 이상한 감각이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세 번째에야, 저도 모르게 불길함을 느끼며 물러나서 목숨을 건졌다.

부하들이 제발 공세 좀 하자고 자신을 닦달할 때도 매번 같은 감각을 느껴서, 아예 부하들에게 생떼를 부리면서까지 눌러앉아 있었는데.

“쓰읍. 왜 이번에도 느껴지고 지랄이야.”

더는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요새화시켜둔 진지에 적이 정공으로 들이박는데도 경종이 울리는 감각에, 데미앙은 이 자리에 없는 피에르와 발리앙을 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교전이 개시되고 벌써 수 시간.

수십 문에 달하는 게르마니아 제국군의 야포가 불을 뿜고, 굉음과 함께 날아 든 포탄이 혁명군의 진지를 강타했다.

“크헉!”

“아악!”

빠른 속도로 진지를 강타하는 강철의 포탄 앞에 인간의 나약한 육체는 그대로 으깨지고 짓뭉개진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이 날아가 버리는 병사들도 속출하고, 데미앙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해둔 요새화 진지도 곳곳이 박살 나며 휑한 구멍이 뚫렸다.

이쪽도 포격을 가하고는 있지만 포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데미앙은 말 위에 오른 채 정신없이 난타당하는 자신의 진지를 바라보다, 마른침을 삼키고 지평선을 뒤덮으며 접근하는 흰색 군복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데미앙이 그동안 죽어라고 요새화시켜온 농장 건물을 낀 혁명군이 창문에서 열심히 총을 쏴댔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계속 해서 접근한다.

“조심해- 컥!”

“젠장, 너무 많아!”

창문을 끼고 열심히 총을 쏘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마침내 농장 건물에 붙은 제국군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농장 문을 정신없이 두들기고 밀치기 시작했다.

“막아!”

“밀어, 밀어!”

농장을 지키는 혁명군은 몸으로 문을 틀어막으며 안간힘을 썼지만, 너무 많은 제국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자 농장의 문은 금방이라도 박살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씁, 3,4연대로 지원해!”

“옛! 3,4연대 전진시켜!”

보다 못한 데미앙의 지시를 받은 보병연대들이 농장 구원을 위해 투입되었고, 푸른 군복을 입은 혁명군이 열을 맞춰 농장 옆의 적병들에게 접근했다.

반대편에서는 흰색의 통일된 군복을 입고 레오폴트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는 연대가 맞서 나왔다.

“공화국을 위해! 조준-”

거리가 좁혀진 뒤 혁명군이 일제히 총을 들어올리고-

“발사!”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총탄이 날아들었다.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게르마니아 제국군이 쓰러졌지만, 흰색 군복을 입은 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접근했다.

“조준-”

흰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일제히 총을 겨눈다.

“발사!”

“컥!”

“다, 다리, 내 다리가아-!”

사격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제국군이 조금 더 접근해서 쏜 총탄이 빗발치며, 혁명군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물러서지 마라! 혁명 만세!”

“자유를 위해!”

하사관들이 검을 들어 올리며 부르짖는 말에 혁명군이 기세를 높이며, 가방에서 꺼낸 종이를 뜯어 화약을 머스켓에 쏟아 넣고 꼬질대로 총구를 쑤시며 총알을 밀어 넣는 사이.

“조준- 발사!”

그 과정을 먼저 끝마친 흰색 군복의 제국군이 다시 쏘아낸 총탄이 빗발쳤다.

“크학!”

“어억!”

어설픈 손놀림으로 총구를 쑤시던 혁명군의 귀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스치고, 옆에 서있던 사람에게서 터진 피가 얼굴에 튄다.

순식간에 앞열의 군사들이 픽픽 쓰러지고 구멍이 뚫린 전열의 모습에, 공포가 빠르게 번져나간다.

혁명군의 사기가 높긴 하지만, 정신력을 발휘해 봐야 총알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늦게 쏘고도 도리어 먼저 장전해서 재차 사격하는 적들의 위용은 혁명군의 병사들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망할. 저건 뭐 대공의 근위대 같은 건가?”

데미앙은 혀를 차며, 레오폴트 대공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아군을 박살 내고 있는 적 연대를 바라보았다.

‘남부군이 베테랑 중의 베테랑은 얼어 죽을!’

“발리앙, 그 사기꾼 놈...!”

데미앙은 이를 갈았지만, 비보는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백작 각하! 적 중기병이 전진합니다!”

“망할! 가스통 경에게 대응하라고 해!”

“옛!”

가스통의 무용은 그도 라파예트와의 싸움에서 직접 당해봐서 아주 잘 알고 있으니, 중기병을 이끄는 그는 잘 싸워줄 거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프랑지아 왕국의 자랑이던 기사는 내전 동안 거의 다 죽었지만, 게르마니아제국도 프랑지아 왕국 다음가는 기사들을 보유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데미앙은 계속해서 뒷목이 지끈거리는 감각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말의 고삐를 부여잡았다.

요새화된 진지가 아깝긴 하지만 차라리 여기서 물러나서, 병력을 조금이라도 건사해야 하나?

“전령!”

“오! 어디, 뭐야? 왜 돌아왔어!”

전령의 도달에 반색하려던 데미앙은 그가 북부군이 보낸 자가 아니라, 몇 시간 전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낸 전령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팍 구겼다.

“소, 송구합니다, 백작 각하. 적의 후사르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허, 허허, 허허허....”

전선에서는 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고, 적의 경기병들은 이미 사방을 포위한 채 후퇴하는 그의 군대를 추격하며 갈기갈기 찢어버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데미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전장 반대편 저 멀리에서 펄럭이고 있는 레오폴트 대공의 공포스러운 깃발을 보았다.

“이런, 제기랄! 발리앙이든, 라파예트 후작이든 지금 당장 와주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다 죽을 거야!”

-

농장을 구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푸른 군복의 혁명군이 산산조각 나서, 뿔뿔이 흩어지며 패주한다.

레오폴트 대공을 오래도록 모신 역전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대공 연대 앞에서, 피에르가 나름대로 공들여 키운 군대도 그저 평범한 잡병들에 지나지 않았다.

망원경을 통해 마침내 농장의 혁명군이 전부 죽거나 항복하고, 농장에 게르마니아 제국의 깃발이 걸리는 것을 본 대공은 몸을 돌려 양측의 중기병이 맞붙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대공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전장의 모습에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프랑지아의 기사들은 내전에서 거의 전멸했을 텐데.”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허면 저들은 뭔가?”

대공의 말을 들은 참모도 망원경을 꺼내 전장을 살폈으나, 침묵만이 뒤따랐다.

병력의 규모가 다른 만큼, 중기병의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의 중기병들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아니, 2배에 가까운 숫자의 제국군 중기병대가 도리어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에르의 지시로 단기속성으로나마 마나 다루는 법을 배운 이들은 기사에 대적할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제국의 중기병을 상대로는 충분한 우위를 점한다.

그러니 기사들이 제압을 해줘야 하는데....

대공은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광경에 눈을 가늘게 떴다. 단 한 명의 기사가 선봉에서 맹렬한 용맹을 떨치며, 제국의 기사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군.”

수십 년 전 기사로서 참전했던 전장에서 겪은 압도적인 공포. 그 청기사의 위용을 직접 목격한 대공의 눈으로 보기에, 저자가 그 경지에 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자의 존재 자체가 프랑지아의 기사들이 역사를 통해 새긴 제국군의 공포를 자극한다.

대공은 천천히 망원경을 눈에서 떼어냈다.

비록 중기병들이 대공의 기대대로 적의 기병대를 붕괴시키지는 못했으나, 전황은 이미 기울었다.

적들은 충실히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했고 지형의 이점을 잘 이용했다.

더없이 신중하게 싸웠고, 화병기의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것치고 데미앙은 나름대로 선전했다.

하지만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압살당하는 상황에선 답이 없다.

제국군의 손실도 적지 않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남부군을 잡아낸다면 충분히 그만한-

“대공 전하!”

대공의 생각은 다급한 외침에 끊겼다.

“무슨 일인가?”

“남쪽에서 적의 군세가 접근 중입니다!”

“뭐라고?”

“라파예트 후작의 깃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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