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42화 (42/258)

혁명기 - 서전 (2)

“발사!”

포병이 점화봉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귀를 막으며 물러나자, 대포가 굉음을 내며 뒤로 튕겨나간다.

나는 망원경으로 대포가 쏘아낸 포탄이 날아가, 성벽을 강타하는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끄으응-”

뒤로 주욱 밀려난 대포를 포병들이 안간힘을 쓰며 다시 앞으로 밀고, 봉으로 달아오른 포구를 식히며 닦아내 준다.

그런 뒤 다시 장약과 마개로 발사 준비를 하고, 낑낑대며 포탄을 밀어 넣고.

“발사!”

다시 점화봉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포병들이 물러나자, 대포가 굉음과 함께 뒤로 튕겨나며 포탄을 날린다.

실로 느려터지고 반복적인, 그러나 더럽게 힘이 드는 작업을 하는 포병들이 점점 지쳐가는 것이 내 눈에도 똑똑히 보인다.

나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포탄이 성벽을 강타하고, 반쯤 균열이 간 성벽에서 파편들이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리오넬 백작령의 마을들은 대부분 크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고, 백작은 영지의 수도 요새에서 항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요새를 포위하고 6일째 공성을 벌이고 있는데, 항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리오넬 백작이 나름대로 존중받는 영주라는 증거겠지.

지난 작전회의 때 보여준 모습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이 떠올라서, 입맛이 쓰다.

내가 상념에 빠진 사이 다시 대포가 굉음을 내고, 이내 쿠르릉- 소리와 함께 성벽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망원경을 부관에게 건네주고 말머리를 돌렸다.

“돌입 준비시켜.”

“옛, 돌입 준비!”

-

통일된 혁명군의 군복을 입은 이들이 머스켓을 어깨에 얹은 채 행군하고, 그 뒤를 서부 지역에서 징병된 이들이 불규칙적인 옷을 입고 뒤따른다.

성벽을 둘러싼 평야지대에 울려 퍼지는 군인들의 기계적인 발소리에 피리와 북이 내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무너진 성벽 가까이 다가간 순간.

“발사!”

양옆의 그나마 온전한 성벽에서 일제히 일어선 궁병들이 쏘아낸 화살이 날아들었다.

“크헉!”

“아악!”

나는 바로 검을 뽑아들어 날아드는 화살들을 쳐냈지만, 가장 앞에 있던 총병들은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조준!”

그러나 단기간 안에 빡세게 훈련받은 이들은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옆의 동료가 쓰러져도, 앞사람이 쓰러져도 여전히 대형을 유지한 채 기계적으로 머스켓을 들어 올리고, 가방에서 꺼낸 화약을 쏟아 넣고 총구에 총알을 밀어 넣는다.

“발사!”

이내 총성이 연달아 울리며 흑색 화약 특유의 희뿌연 연기가 눈앞에 자욱하게 흩뿌려졌다.

이번엔 성벽 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몇몇 불운한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허우적대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듯 공평하게 성벽 위의 적들이 공격하고, 우리 쪽의 사수들이 공격하는 것을 번갈아 가며 몇 차례 반복한다.

쓰러지는 것은 게임의 말이 아니고, 게임이 끝나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차이점이라곤 겨우 그뿐인 불합리한 게임 끝에 성벽이 고요해지고, 내 지시를 받은 창병들과 검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도 말에서 내려 그들의 앞에 서며 읊조렸다.

“준비.”

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냉병기를 든 자들과, 자신의 머스켓에 다급하게 총검을 끼워 넣고 있는 병사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

내가 검을 뽑아 든 채 앞장서 달리고, 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뒤따른다.

성벽 위에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이 있었는지 화살이 몇 발 날아들었지만, 쓰러지는 자들의 비명을 돌진하는 자들의 함성이 흩어버렸다.

“거창! 막아라!”

무너진 성벽의 잔해 사이로 벌어진 틈에서 창을 든 병사들이 나와 길을 틀어 막았다.

“헉!”

그러나 내가 앞장서 뛰어들어 창대를 토막 내버리자, 그들의 저항은 헛된 것으로 전락했다.

“후작님을 따르라!”

“공화국 만세!”

저지력을 잃은 창병들에게 군사들이 뛰어들며 비명이 터져 나오고 피가 튄다.

“으아악!”

검을 휘둘러 한 병사의 가슴을 가르고, 다른 병사의 목에 찔러 넣었다 비틀어 뽑아냈다.

“히, 히익-!”

“끄륵-”

어설프게 엉거주춤하니 있던 적을 그대로 발로 차서 넘어트려 버리고 검을 횡으로 긋자, 뒤에서 뒤늦게 달려들던 병사는 목을 부여잡고 피거품을 물며 넘어갔다.

“네놈!”

병사들이 나를 피해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하자, 기사가 갑옷이 철컹대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군복에 가벼운 흉갑만을 착용한 나에 비해 중무장한, 불과 1년 전만 해도 지극히 당연했던 기사의 모습.

“라파예트! 귀족의 배신자!”

노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사가 내지른 창을 몸을 꺾어 피하고, 그대로 마력을 실은 검을 찔러 넣었다.

허공에 창을 내지른 기사가 다급하게 몸을 보호하려고 두른 마력은 내 검에 의해 허무하게 깨졌다.

“컥, 크헉...!”

직격하는 총탄을 막아주지도 못하고, 움직임을 제약할 뿐인 갑옷은 마력을 두른 검에 연결부를 찔린 주인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리오넬 백작 각하.... 으, 으으...아아아!”

기사는 검에 찔리고도 발악을 하려는 듯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지만, 내가 검을 비틀어 뽑자 피를 쏟아내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바르작거리던 몸뚱이는 얼마 안 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헉, 가, 가슬리 남작님!”

“마, 말도 안 돼...!”

내가 처치한 기사가 지휘관이었는지, 적들에게 대번에 동요가 퍼져 나간다.

이 자가 리오넬 백작에게는 듀몬트 남작 같은 자였을까?

아니, 그 배불뚝이 아저씨가 이런 일을 할 순 없겠지.

나는 씁쓸하게 헛웃음을 흘리며 전장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적들은 내성 쪽으로 물러나고 있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아군과 이곳저곳에 쓰러진 채 고통에 차 신음하는 이들만이 남아있다.

나는 한발 늦게 내성으로 들어온 에리스를 발견했다.

그녀가 바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기원을 사용하려고 해서, 나는 빠르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에리스.”

“후, 후작님?”

“설마하니, 적아군도 가리지 않고 전부 살려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확인된 아군 부상병과 항복을 선언한 적만 치료해 줘.”

베일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기색으로 알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일이 치료하는 사이 죽는 사람들이....”

“네가 살려낸 적이 옆에 있던 아군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이 성녀님에게는 가혹할지 모르겠지만, 종군을 결심한 이상 그녀에겐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자각시키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적아군 관계하지 않고 다 살려내고, 네가 기진맥진해있을 때 적이 기습이라도 해오면? 지휘관인 내가 눈먼 화살이라도 맞으면 그때는?”

침묵 끝에,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어요, 후작님. 명령대로 할게요.”

“좋아, 성녀님. 뒤는 부탁하지.”

“...미안해요.”

에리스답지 않게 약한 목소리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구하려는 성녀가 뭐가 나쁘겠어. 구할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정해두는 놈들이 나쁜 거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마저 고한다.

“...그러니 책임은 나한테 떠넘겨 둬.”

-

부대를 수습하여 내성에 도달하자, 성문 앞에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리오넬 백작.”

경갑 차림의 백작은 검과 방패를 든 채, 검으로 나를 겨누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레오 드 리오넬이 그대에게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하겠소.”

결투, 결투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결투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그대가 이긴다면, 내 가신과 군사들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지체 없이 항복할 것이오.”

“백작님께는 송구하나, 이대로 싸워도 리오넬의 패배는 확정입니다. 굳이 제가 생명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리오넬의 군사들이여, 그대들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투항하는 자에겐 책임을 묻지 않겠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성벽 위에서 이쪽을 보는 자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과연, 그 내전을 겪고 고립되어 공격받고 있는데도 따르고 있는 충성스러운 자들이라 이거지.

차라리 리오넬 백작이 로렌 공작 같은 간신배였더라면.

내가 내심 혀를 차고 있자, 리오넬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는 외세에 맞선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대에게는 군사들의 생명과 시간, 양쪽 모두 절실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를 모르는 선택을 하는 겁쟁이라면, 귀족을 배신한 공화국의 끄나풀은 거기까지라는 소리겠지.”

“하....”

“후, 후작님.”

그러지 않아도 공성 중에 전령에게 남부군이 레오폴트 대공에게 맞서게 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심란하던 중인데, 내 상황을 아주 잘 알고 계시네.

“어쩌겠어. 어울려 줘야지.”

내가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자 내 병사들과 리오넬의 병사들, 양쪽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어쩐지 촌극과 같이 느껴져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전장에서는 유독 쓴웃음만 짓는 것 같네.

“선대 후작 각하와 같은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신 리오넬 백작 각하. 기사의 명예를 걸고 하신 약조는 지키시리라 여깁니다.”

“...기사의 명예와 부하들의 생명을 위해 결투에 나선 후작에게 경의를 표하지. 나의 명예에 걸고, 약조는 이루어질 것이오.”

간단한 말이 오가고 잠깐의 침묵.

리오넬 백작은 검과 방패를 쥔 것이 무색하게 빠르게 내 앞으로 뛰어들었다.

“쯧!”

그의 검을 검으로 쳐내기 무섭게 방패가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나를 밀쳐낸다.

바로 뒤로 뛰어서 피했으나.

“우오오오오-!”

리오넬 백작은 기합을 지르며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돌진해왔다.

“이런, 제길.”

마력을 두른 왼팔로 방패를 받아내자마자 팔이 삐걱이며 비명을 내지르고, 그 고통에 인상을 쓰기가 무섭게 리오넬 백작이 내 목을 노리며 휘두른 검과 내 검이 부딪혔다.

“북부에서 외세에 맞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빤히 아시는 분이, 농민봉기를 부추기셨습니까?”

리오넬 백작은 콧수염을 꿈틀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내 왼팔이 비명을 질러, 발로 방패를 걷어차 거리를 벌렸다.

백작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달리 길이 있었는가?”

그의 검이 나를 향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저 반란군이 나와 내 가문을 토벌할 터인데, 그러면 가만히 앉아서 파국을 기다려야 했단 말이오?”

“저는 공화국과 함께 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저와 아키텐 백작이, 우리와 함께 한 영주들이 지금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흐아아압!”

리오넬 백작이 다시 한번 방패를 앞세우며 돌진해 온다.

방패는 왼손, 검은 오른손.

나는 뒤로 피하는 대신, 그에게 마주 돌진해 간발의 차로 방패를 피해 오른쪽으로 파고들며 그의 사각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큭?!”

찔러 들어간 검이 리오넬 백작의 마력을 뚫고 가슴팍을 조금 파고 들어갔지만, 백작은 마력이 버텨준 짧은 시간 사이에 빠르게 몸을 틀며 찔러 들어가던 내 검을 쳐냈다.

쯧, 얕았다.

우리 둘 모두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다가,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는 저들에게 붙어서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우리는 내전에서 뭘 위해 그토록 피 흘렸지?”

백작의 가슴팍에 피가 번지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건재하다.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백전노장이라서 그런지, 만만하지가 않네.

“그 긴 내전 동안 충성스러운 가신과 기사들, 내 병사들을 너무도 많이 잃었어.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가? 왕자에 대한 충성? 아니! 리오넬의 영지, 리오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소.”

리오넬 백작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후작, 나는 그대가 전쟁터에 처음 나서기도 한참 전부터 나의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아 온 이 땅을, 이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을 싸워왔다! 그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이 목숨만 건져 살아남는다 한들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백작님의 삶에 의미를 남기고자 벌인 일로, 죽을 필요 없는 무수한 이들이 죽는다 해도 말입니까. 그런다고 한들, 백작님을 위해 죽은 자들이 구원받습니까?”

리오넬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리오넬의 영주요. 다른 자들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해, 리오넬의 눈물과 피가 쌓아 올린 땅을 져버려야 하는가? 후작, 반란군과 농민들에게 칭송받는 공화국의 영웅이여. 그대는 라파예트의, 툴루즈의 영주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적어도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로 인해 과거에 쌓아 올린 것을 잃어버렸지만, 대신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고 있으니.”

“그래, 후작.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군.”

백작의 눈빛은 죽지 않는다. 결국 말로는 닿을 수 없다. 그의 결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그에겐 그가 처한 입장에서, 그의 테두리에 있는 이들을 품고자 고른 최선이 이 길이었겠지.

어쩌면 그와 나의 간극은 회귀라는, 그저 있을 수 없는 기회로 인해 빚어진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고르며 검을 고쳐 잡았다.

백작의 시선이 아주 잠깐 검을 쥔 내 오른손을 스쳐 지나가고, 둘 모두 땅을 박찼다.

“라파예트-!”

백작의 방패가 내 쪽으로 쇄도하는 순간 나는 검을 왼손으로 바꿔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단도를 뽑아들었다.

오른쪽으로 파고들 것처럼 다리를 움직이고-

“흐아압-!”

백작이 후려치는 방패를 피해 반대로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큭?!”

당황하는 백작의 검과 내 검이 부딪히며 격렬한 진동을 울렸다.

그와 내가 모두 팔을 울리는 저릿함에 움찔거리는 사이, 내가 오른손으로 던진 단도가 방금 전 검에 찔린 백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력까지 실은 단도임에도, 후작의 마력 보호와 강인한 신체를 다 뚫어내지는 못했다.

“크, 으-아! 이렇게는-!”

단도가 가슴에 반쯤 파고들었는데도 백작이 노성을 지르며 저항하려 드는 순간.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박힌 단도를 걷어차 버렸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칼날이 단단한 근육을 찢어발기고 살코기를 헤집으며 박혀 들어가는 감각이 다리를 타고 그대로 전해지고서야, 백작은 검과 방패를 놓치며 무릎꿇었다.

“배, 백작님!”

“백작님을 구하라!”

성벽 위의 적들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뛰쳐 나오려고 하는 순간.

“내 마지막 명예마저 더럽힐 참이더냐!”

가슴이 엉망진창이 된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대한 고함이 전장의 소음을 모조리 일소시켜버렸다.

고요해진 전장에서, 놀라운 투기와 의지를 빛내던 기사가 지칠대로 지쳐버린 노인의 음성으로 한탄했다.

“그 긴 싸움의 끝이, 이런 결말인가.”

백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다가, 기침을 하며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셔가는 피를 바라보았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들, 질. 그 아이, 는. 내 계획에 반대했었다오. ...이곳을 빠져나갔지.”

“그렇습니까.”

“...리오넬의 땅과 명예는 나와 함께 하니, 리오넬의 씨앗은 그 아이에게....”

백작은 힘없이 나를 바라보며,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그 아이만큼은, 모른 척해주겠소?”

“그가 그저 이 땅을 떠나, 누구도 피 흘리게 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부탁하지. 선조들이시여, 부끄러운 저를 용서....”

백작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성문이 열리고 백기를 내건 이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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