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서전 (1)
프랑지아 공화국 북동부, 랭스의 혁명군 주둔지.
공화국 북부군 사령관 라파엘 발리앙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남부군의 지휘관들을 맞이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미르보 장군님! 장군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흠, 흠. 반갑소, 발리앙 장군. 미르보 백작이라고 해주겠소?”
데미앙의 말을 듣자마자 미소 지은 채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제길, 너무 고자세였나?’
데미앙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릴 때쯤, 발리앙이 다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렇군요.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미르보 백작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그러도록 하지.”
남부군의 인사들이 안내받은 막사 안에는 작전 지도가 펼쳐진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이 작지는 않았지만, 북부와 남부군 지휘관들이 자리하자 완전히 둘러싸인 형상이 되었다.
발리앙의 손짓을 받은 남자가 데미앙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북부군 참모장을 맡고 있는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라고 합니다. 전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베르테르는 지도 옆에 있던 지휘봉을 집어올린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한 주 전, 노던 연합 왕국의 병력 1만이 로렌 공작령에 도착했습니다.”
“결국 노던 연합 왕국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공세가 없었다는 건, 저들이 봄에 공세를 펼 계획이라는 소리군?”
“예, 북부군의 판단도 그렇습니다.”
베르테르는 지휘봉으로 ‘로렌’이라는 글씨가 쓰인 지역을 짚었다.
“로렌 공작령에는 루이 왕과 로렌 공작의 지휘를 받는 국왕군 6,000, 그리고 하인리히 공작이 이끄는 게르마니아 제국군 10,000이 주둔해 있습니다. 노던 연합 왕국까지 더하면 26,000의 군세지요.”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적의 병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다.
베르테르는 지휘봉으로 다시 ‘알자스’라고 쓰인 지역을 짚었다.
“알자스 변경령에는 레오폴트 대공의 지휘를 받는 게르마니아 제국군 20,000이 주둔해 있습니다. 병력은 더 적지만 저 자는 제국과 크라프테 왕국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는 자이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베르테르가 물러나자, 발리앙이 입을 열었다.
“현재 북부군의 병력은 13,000, 남부군은 12,000이니, 25,000으로 46,000을 저지해야 합니다. 병력으로는 크게 열세입니다.”
“으음....”
데미앙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휘권을 받고 올 때까지만 해도 기회라는 생각만 가득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이건 공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지 않기만 해도 잘하는 것 아닌가?
라파예트 후작이 1,000의 병력을 데리고 남부로 간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병력 상 우리군의 목표는 우선 공화국에서 징병된 추가 병력의 훈련이 끝나고 라파예트 후작님이 합류할 때까지 버티며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으으음....”
“양쪽 모두 위협적이지만, 가장 위협적인 병력은 역시 알자스에 주둔 중인 레오폴트 대공의 2만입니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굉장한 불안함을 느끼며 지도의 ‘알자스’라는 글자를 노려보았다.
레오폴트 대공. 그 이름은 그도 익히 들어보았다.
자그마치 크라프테 왕국의 그 ‘대왕’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던 유일한 제국 장군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역량으로는 벽처럼 느껴지던 라파예트 후작에게 탈탈 털려본 입장에서, 데미앙은 또다시 자신보다 능력 있는 적에게 맞서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병력도 거의 2배여서야....
“으음, 우리가 로렌을 맡으면....”
“저는 백작님께서 남부군을 이끌고 알자스의 적을 맡아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 엉?”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각하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차남이신데도 미르보 백작령의 영주 대리로 임명받을 정도의 능력을 증명하셨지요!”
“그, 그렇지....”
데미앙은 조금 당황했지만, 발리앙은 속사포처럼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내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라파예트 후작님과 자웅을 겨룬 적이 있으신 데다, 과거의 적임에도 후작님께서 지휘권을 맡길 만큼 신뢰하시는 분!”
이쯤 되자 데미앙도 슬슬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때 장남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촉망받던 자신이, 그 망할 후작에게 패배한 뒤로 얼마나 구박을 받고 치욕을 감내해야 했었나.
이렇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고 칭송해 주는 자를 만나본 것이 얼마만인가?
“게다가 남부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베테랑 중의 베테랑! 저 내전을 경험하고 오랫동안 귀족 지휘관을 섬겨오며 단결된 강군입니다!”
그렇게 외친 발리앙은 은근슬쩍 데미앙에게 가까이 붙으며 속삭였다.
“비록 병력은 북부군보다 조금 적지만, 제가 보기에도 공화국이 대충 징집한 어중이떠중이 북부군에 비할 바는 아니죠. 솔직히 부럽습니다.”
“그, 크흠, 크흠. 이 친구 사람 볼 줄 아는군? 으하하!”
“백작님과 같은 영웅과 마주하고도 그 대단함을 몰라본다면야, 지휘관을 할 자격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마주 웃은 발리앙은 데미앙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부끄러우나 저보다는 백작님과 남부군이 저 늙은 영웅을 상대하기에 더 적합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힘을 빌려주십시오. 무리해서 승리할 필요도 없으니, 백작님께서는 그저 방어에만 치중해 주시면 됩니다.”
용병 출신 나부랭이 따위가 총지휘를 맡는다고 해서 못마땅해 했던 데미앙은 발리앙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내심 양심이 찔렸다.
아예 격퇴하라는 것도 아니고 방어만 하는 거다. 그동안은 운이 없어서 이름을 날릴 기회가 없었지만, 저 늙은 장군을 상대로 적절히 버티기만 해도 그의 이름은 드높아지겠지.
게다가 저들도 병력이 더 많은 적들을 상대하겠다고 하고, 피에르도 발리앙을 존중해 주라고 했으니....
“그,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맡겨주시오. 이 데미앙 드 미르보가 저 늙은 영웅을 멋지게 막아내 보일 테니!”
“오오, 역시나 라파예트 후작님께서 인정하신 명장이십니다! 백작님의 승리를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하하하!”
누가 보면 작전회의가 아니라 연회 같은 분위기 속에 약간의 논의가 더 진행된 후, 데미앙과 남부군의 지휘관들이 떠났다.
“어휴,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드네.”
발리앙이 열심히 손을 털고 있자, 그의 참모장 베르테르가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이 오지 않아서 이야기가 쉬운 건 좋은데, 괜찮을까요? 저 자가 12,000으로 레오폴트 대공을 막을 수 있을지....”
발리앙은 코웃음 치며 답했다.
“미쳤어? 로렌 쪽은 지휘권이 셋으로 분열되어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든 그 틈을 파고들 수 있겠지만, 레오폴트 대공이 단독 지휘하는 2배의 병력? 저건 나라도 버거워.”
“어...그럼? 지금이라도 병력을 조금 보태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병력도 2배야. 이쪽도 만만하지 않은데 그럴 여유가 어딨나. 공 세워서 출세해야지, 참모장?”
“그건 그렇습니다만....”
발리앙은 베르테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은 이 전쟁에 그리 열성적이지 않을 거야. 루이 왕 손에 멀쩡한 프랑지아를 쥐여 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레오폴트 대공이 별로 의욕 없길 바라야지.”
“...만약, 레오폴트 대공이 의욕이 있으면요?”
“그럼 뭐....”
발리앙은 두 손을 모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남부군이 덜 아프게 맞기를 기대해야지.”
-
국민의회에서 승리한 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마침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다가오는 시점.
나는 리오넬 백작을 토벌하기 위해 남부군에서 떼어낸 1,000의 군세를 이끌고 출진했다.
길을 따라 행군하여 남부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겨울이 완전히 끝나 있었다.
우리는 중간에 에리스와 보몽 경이 인솔해온 1,000의 병력과 합류했다.
서부 지역에서 새로 징집된 부대들이다.
에리스가 어느 정도 민심을 수습해둔 상황에 종교탄압령이 해제되고 강탈당했던 교회의 재산도 돌려받자, 서부 사람들도 논의 끝에 공화국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저들이 공화국에서 그나마 신뢰하는 지휘관인 내 휘하에서 이번에 지목된 배후인 리오넬 백작 토벌전에 참가하게 된 거다.
아직은 공화국도 이들을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고, 이들도 공화국에 대한 앙금이 남았겠지만 함께 싸우며 조금이나마 간극을 좁혀나갈 수 있을 거다.
“오랜만이네요, 후작님!”
말에 탄 에리스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폼이, 베일로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신나 보인다.
그녀에게 민심 수습을 부탁하고 수도로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게 지났지.
내가 말을 몰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뒤에 있던 보몽 경이 가볍게 목례하는 것이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성녀님. 수고하셨습니다, 보몽 경.”
“앗, 그렇게 들으니까 뭔가 소름 돋네요.”
나는 픽 웃으며 에리스에게 몸을 기울인 다음, 작게 속삭였다.
“이런 걸로 그러셔서 나중에는 어찌하시렵니까? 미래의 여왕 폐하.”
“으으으...!”
에리스는 장갑 낀 양손으로 어깨를 껴안고 잠시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내 내 가슴팍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 아.
“흐흥-”
에리스의 콧소리에, 나는 슬며시 얼굴을 피했다.
“그러면 부대를 재편하고 재정비 후 출발하도록 하지.”
“후작님~”
“병사들이 식사할 수 있게 해.”
“옛!”
“후.작.님.”
내 지시를 받은 부관이 달려가 버리고, 마침내 말을 걸 상대도 없어진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에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 브로치, 선물 받으셨나요?”
에리스는 내가 가슴팍에 달고 있는, 검은 장미 모양의 브로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어왔다.
얼굴은 베일로 가려져 있지만, 저 안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을 모양새가 빤히 보인다.
“아티팩트야. 보호 마법이 걸려있다던데.”
“그래서, 아키텐 백작님이 주신 거죠?”
“...그래.”
불현듯 출정할 때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던 크리스틴이 생각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달달하네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거든.”
“두 분, 지금 공식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긴 하죠.”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만 두 분 다 들어오는 혼담은 전부 거부하면서 수시로 함께 다녀서, 온 수도에 소문이 무성하고요.”
“...글쎄.”
나는 크리스틴의 탁하고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여성으로서 매력적이기 이전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고,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마음이 없냐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잔혹한 진실을 들이밀며 가족을 해치게 만들어, 그런 눈을 하고서라도 살아가게 만든 것이 나다.
결혼하면 동생인 루이스의 처지가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아질 것이 뻔해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해봐야 뻔뻔한 짓일뿐이지.
“흐음-”
에리스는 내 표정을 들여다보는 듯하다가, 이내 자세를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를 때처럼 청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언제까지고 후작님의 이름을 기릴 것입니다.”
“...어?”
“요한 주교님이 전해달라고 부탁한 말이에요.”
“하하, 그래.”
그제야 웃음이 조금 나왔고, 에리스는 내 어깨를 주먹으로 톡- 쳐주더니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이 나라의 왕녀로서 그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하죠.”
입가에 절로 진한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에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떨어져선, 기지개를 켜더니 기운차게 소리쳤다.
“자, 가죠!”
“그런데, 괜찮겠어?”
“네? 뭐가요?”
“전장에 서는 거, 기피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지금 싸우러 가는 적은 너와 면식도 있는 사람들이야.”
“아.”
에리스가 탄식 같은 소리를 냈지만, 짧은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 성녀로서의 이름과 후작님을 믿고 현지 사람들이 따라와 줬는 데, 여기서 혼자 고결한 척해봐야 저 교국에서 위선 떠는 사제들과 다른 것이 없으니까요.”
나는 에리스의 답을 듣고 픽 웃었다. 그래야 내가 모실 왕녀님이지.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리오넬 백작가.
-행운을 빕니다, 후작님.
장남, 질 드 리오넬과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리오넬이 주었던 도움에는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상황이 변하여 생각이 바뀐다면 도울 의향도 있으니,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단순히 빈말은 아니었다.
-고마운 말씀,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우리의 손을 놓고 나간 시점에, 리오넬과는 결국 이런 식으로 부딪히게 될 거라고.
나는 시선을 돌려, 펄럭이는 프랑지아 공화국의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확고한 신념 아래에서 필요한 희생이라고 주장하던, 이지도르의 확신 같은 것은 나에게는 없다.
그럼에도, 멈춰서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다만 내가 책임진 이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얻기 위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