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39화 (39/258)

혁명기 - 국민의회 (2)

서부 루아르 강 이남 지방에서는 지속적으로 혁명 정부의 종교탄압령과 교회재산 몰수에 불만을 제기해왔다.

그러다 이번에 징병을 위해 파견되었던 징집관과 혁명군이 지역 농민들의 저항 시위대와 마찰을 빚은 끝에, 결국 징집관이 살해당하고 그를 수행하던 혁명군 병사들도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이건 우리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리가 저 농민들을 구체제의 압제로부터 구해주었는데, 감히 혁명에 대한 반역을 저지르다니!”

이 소식이 전해진 국민의회는 온갖 노성과 원색적인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그동안 이들에게 혁명은 정의였다.

구체제는 명백한 적이었으며, 혁명의 기치 아래 단결한 민중들이 단호하게 적에 맞서는 것만이 이들이 그려온 미래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 반기를 든 것은 구체제의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농민들이다.

“저들은 처음부터 성직자들을 옹호하며 우리와 마찰을 빚어왔소. 순진하고 어리석은 농민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에게 놀아난 것이 틀림이 없어!”

국민의회는 농민들이 반기를 들게 한 다른 배후세력이 있다고 여겼다.

“어쩌면 반동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일지도-”

분위기에 휩쓸려 제멋대로 떠들던 의원은 흠칫하더니 크리스틴과 내 눈치를 살폈다.

저 지역은 아키텐 백작령의 수도였던 보르도 바로 위인데, 잘도 저런 소리를 하네.

“하지만 보고에 따르면 징집관과 수행원들이 먼저 주민 일부를 처형했다고 하오. 우선 선후 관계를 확인해본 다음에 대처해도-”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는 것 같자 온건파에서도 조심스러운 의견이 나왔지만, 그것은 이내 맹렬하게 반박받았다.

“그랬다가 저들이 봉기를 일으켜버리면 어쩔 겁니까? 지금 외세와 손잡은 국왕과의 전쟁이 눈앞인데 감히 혁명 정부에 거역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저들이 공화국에 대한 반역자라는 증거겠지!”

“저들이 국왕이나 외세의 사주를 받았음이 분명하오!”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지켜도 부족할 판에 정부에 반기를 들다니, 저들이 반역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반역자란 말입니까!”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급진파의 수장인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구체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중을 위한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민중은 이성으로, 민중의 적들은 공포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의 혁명 정부는 그 자체로 전제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독재이며, 우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것은 곧 저들이 민중의 적임을 말합니다.”

한 지방의 국민들을 통째로 반역자로 모는 말이 이토록 쉽게 나온다니.

이들이 내전에서 적의 영지를 약탈했다고 나를 단두대로 몰아간 그자들이 맞나?

이건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군.

“반역자들에게 죽음-”

“제가 발언하죠.”

터져 나오던 외침은 내 목소리에 끊겼고, 국민의회의 의원들이 일제히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평소에 의회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아서인지, 시선 집중 확실하구만.

“현시점에 저들을 바로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에 징병을 거부하고 우리 정부가 보낸 징집관과 수행원들을 해친 자들이 반란군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 쪽이 먼저 저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외세가 침공해오는 상황에 섣불리 자국민을 탄압했다가, 그들이 루이 왕이나 외세에 붙는 사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남부군의 사령관께서는 신중하신가 보오? 반군 진압을 마다한다니.”

“그 신중함이 우유부단함이 아니라면 좋겠는데.”

여기저기서 비아냥이 날아들었지만, 나는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시겠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겨울이 끝나면 당장에라도 국왕과 외세와의 전쟁이 벌어질 상황인데, 저 반란군을 초장부터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지도르의 말도 일리가 있다.

만약 시간만 끌고 저들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자칫하다가 양면 전선의 위기에 처할 위험도 분명히 있다.

“아직은 반란군이 아니라 시위로, 소요사태 정도로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군세를 일으켜 저들을 진압하려 들면 그때야말로 저들은 전면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크리스틴과 눈을 마주쳤고, 그녀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아직 명분이 부족합니다. 아시겠지만 저들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뭉쳐있고, 신성 교국은 분명히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국가로부터 무역제재를 받은 공화국이 지금 무기와 물자를 어디서 수입하고 있는지는 아시리라 여깁니다.”

“흥, 아키텐 상단의 독점 이익을 지키려고 혈안이 되셨군!”

“어쨌든 신성 교국이 보장한, 현재로서는 공화국 유일의 수입 루트입니다. 우리가 무작정 저들을 반란군으로 선포하고 사제들과 함께 토벌했을 때, 신성교국이 그걸 명분으로 무역을 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안이 있는가?

“당장 치솟는 물가를 통제하지 못해서 임시방편인 가격 상한제로 버티던 시절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외세의 군대가 몰려들고 있는데, 새로 징집한 혁명군에겐 뭘 들려서 내보내시겠습니까? 농기구라도 들려서 내보낼까요? 우선 상황을 파악하고 저들의 요구를 들어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저들이 정말로 혁명 정부와 조국에 대한 반역자라면, 명분은 우리 쪽에게 있겠죠.”

국민의회에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뒤, 이지도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혁명 정부의 요인들을 해쳤습니다. 저들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은 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해서 결과가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고 구체제와 외세에 붙으려는 반란군에게 시간을 벌어준 것이라면, 그 책임은 라파예트 후작. 그대에게 갈 겁니다.”

하여간, 쉽게 넘어가 주지를 않네.

확실히 여기까지 해놓고 일을 그르치면 그건 그대로 내 책임이 될 거다.

하지만 교국에게 약속한 성의 표현 때문에라도, 그리고 혁명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무분별한 박해의 방관자가 될 수는 없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죠. 저들의 행동 근간이 신앙인 이상, 저들이 존중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함께 갈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여왕님은 결코 이런 박해를 인정하지 않을 테고, 교국에게 직접 인정받은 성녀니까.

-

내 명령을 받아 동부 전선으로 출병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데미앙 드미르보는 내가 수도를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나는 결국 에리스와 함께 서부의 시위대와 접촉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수도에서 일어날 일이 무척 신경 쓰이긴 하지만, 크리스틴이라면 수도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줄 거라 믿는다.

시간이 부족해서, 우리는 마차와 번잡한 행렬 대신 선별한 소수의 기사 및 기병대만 대동하고 그대로 도로를 질주했다.

나는 말을 몰면서 내 옆에서 흰 로브를 펄럭이며 말을 모는 에리스와, 그녀의 하프를 등에 맨 채 뒤따르는 보몽 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남부에 있을 적이 생각나는데.”

“엊그제 같네요.”

후드 안에 베일까지 뒤집어쓴 에리스가 키득거리며 답했다.

“벌써 2년 전이야.”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그래.”

“에리스 아가씨께서도 잘 자라주셨지요.”

보몽 경이 어째 아버지 같이 따스한 시선으로 말을 꺼냈지만, 에리스의 답은 잔혹했다.

“프랑크 아저씨, 말투 완전히 노인 같아요.”

본전도 못 건진 보몽 경은 그대로 충격에 빠진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 16살에 불과해서 신비한 외모기는 해도, 아직 애라는 느낌이 강했던 에리스도 제법 숙녀 태가 난다.

입만 다물고 경건하게 있으면 이제는 성녀라는 이름값에 어울려 보일 정도니까.

하지만, 글쎄.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니, 그냥.”

계획대로라면 언젠가 여왕 전하로 옹립해야 할 텐데, 아무리 시간이 가도 주군보다는 동생 같은 느낌이 강할 것 같아서 큰일이야.

“어쩐지 불순한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후작님.”

“..,앞에 봐, 에리스.”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도시의 입구가 가까워져 우리가 말을 멈춰 세우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말했지? 성녀의 자격, 필요할 거라고.”

에리스는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로 걸어갔고, 일행의 선두에서 주교복을 입고 서있던 노인이 에리스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신실한 분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교 요한이 성녀님과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께 인사 올립니다.”

-

“Laudatus dominus deus Sanctus.”

경건한 예배당에 청아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은은한 촛불의 빛이 밝히는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과 피부가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Hosanna in excelsis.”

에리스는 제대로 예배를 집전해본 적도 없을 텐데, 마치 언제나 그래왔다는듯이 신도들의 요청에 응해주었다.

심지어 나는 에리스가 가끔 흥얼거리던 노래들이 신성 교국에서나 쓰는 고대 어라는 걸 여기 와서 듣고야 알았다.

“Dona nobis pacem.”

그렇지 않아도 신비한 외모에 신성력을 담아 고대의 성가를 부르고 있는 그녀는 심지어 내가 봐도 신성해 보일 정도고, 처음에는 불안감을 품고 있던 주민들도 넋이 나간 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에리스에게 저런 걸 가르쳐준 건 역시 그녀의 어머니인가.

내가 한구석에 앉아 그 광경을 보고 있자, 주교 요한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 늙은이가 감히 후작님의 곁에 앉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지요?”

“물론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 왔으니.”

요한은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공화국의 남부군 사령관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소요사태 때문에 오셨겠지요.”

“맞습니다. 공화국 정부를 대표해서 소요사태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급적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보아하니, 주교님께서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이신 듯하군요.”

“부끄러우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후작님께서 성녀님을 대동해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겠지요.”

요한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성녀님의 후원자로서 펼쳐온 자선은 이 땅에도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도 듣는 소식이 있으니까요. 수도의 공화 정부가 그렇게 온건하지 않다는 것도 알지요. ...이 지방 사람들이 쌓아올린 반감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태도는 꽤나 조심스러웠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어느 정도의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지금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이 땅은 가난한 곳입니다. 변변한 자원도 상권도 없는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지역의 공동체로서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또한 마찬가지지요. 교회에서 종교세를 거두어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 지역을 위해 사용하는 공동재산으로서 운영되었습니다.”

“흠, 그렇습니까.”

“그러나 혁명 정부는 교회의 재산을 박탈하고, 그것을 혁명 정부에 기여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주로 이 지방이 아니라, 외지의 자산가들에게 넘어 갔지요.”

그렇군. 그렇다고 한다면, 이 지역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적어도 이들이 보기에 교회는 청산해야 할 적폐가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이었던 거다.

그런데 봉건제 하에서는 엮일 일도 없던 외지인들이 멋대로 구시대의 적폐랍시고 박해하며 재산을 강탈해 가고, 자신들에게나 맞는 규율을 무작정 강요하고 있다면 당연히 불만을 사겠지.

“...그래서 소요사태가?”

“소요사태가 일어나기 얼마 전, 정부가 보낸 징세인들이 무거운 전쟁세를 걷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다시 징집 명령이 떨어지니,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주민들이 거부했습니다.”

요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징세관과 혁명군은 본보기라면서 몇 사람을 처형해버렸고, 그 다음날사태를 안 주민들이 몰려가 그들을 습격한 겁니다.”

이들의 말만 믿을 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이게 진실이라면 혁명군 쪽의 실책이 더 크다.

“...후작님. 얼마 전 인근 영지의 리오넬 백작가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봉기할 거라면 도울 생각이 있다고.”

아, 젠장. 리오넬 백작, 결국 그에게 혁명군은 반란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건가.

“...그걸 알려주시는 이유는?”

“후작님. 혁명 정부에서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나 이 땅의 주민들은 국왕의 편을 들거나, 공화국에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절박하게 애원하고 있다.

“그저 그동안 쌓아온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저희로서도 외세가 쳐들어오는 상황에 이웃과 피 흘리는 사태는 원하지 않습니다. 후작님, 저희의 이야기를 혁명 정부에 전해주십시오.”

나로서는 심정이 복잡하다.

일단 이들이 충분히 억울한 이들이라는 것은 알겠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건 종교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지금까지 이들이 지켜온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자치권을 얻는 것이겠지.

반면 공화국의 혁명 정부, 특히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를 위시한 급진파는 강력한 중앙정부 아래의 중앙집권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로서는 공화국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방 공동체의 자치를 인정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내 입장도 난처하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이들을 수습하고 전장으로 향해야 한다.

당장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며 활약해야, 본격적으로 혁명 정부 내에서의 내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그러나 출발 전 확인한 것과 현지에서 직접 들은 것으로 판단하자면, 이건 적당히 잘못한 이들만 처벌하고 묻어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미약한 희망을 걸고 나를 바라보는 요한 주교와, 더없이 경건한 성녀의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는 에리스를 번갈아 본 다음 한숨을 내뱉었다.

“...하. 쉽지는 않을 겁니다."

신성 교국과의 거래가 아니더라도 이들이 덮어놓고 반기를 든 것도 아닌 이상, 억울하게 진압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여기서 이걸 잘 해결한다면, 급진파에게서 국민의회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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