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37화 (37/258)

프랑지아 공화국의 수도, 뤼미에르.

‘빛’이라는 뜻의 이름이 무색하게, 도시의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을씨년스러운 비가 추적추적 쏟아졌다.

그런 날씨여도 공화국의 급진파 중에서도 더욱 호전적인, 일명 말로파 의원들이 자주 찾는 클럽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원래부터 귀족의 소유이던 저택답게 제법 그럴싸하게 장식된 장소에는 값비싼 와인이나 시가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고, 모임에 참석한 의원들은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즐겼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파벌이었던 레베리 전 총재를 단두대로 보내다니.”

이 파벌의 리더 격인 쟝 말로는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이지도르 의원이 지나치오. 게다가 저 겁쟁이들과 함께 남부 귀족들을 끌어들이겠다니. ‘부패할 수 없는 자’께서도 결국 변심은 하시는 모양이오.”

“하지만 말로 의원, 게르마니아 제국과 노던 연합 왕국에서 선전포고와 함께 4만이나 되는 병력을 파병하여 지금 프랑지아로 오고 있다지 않습니까. 공동의 적에 맞서려고 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닌지.”

실제로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을 위시한 남부 귀족 연합의 요청에 갑론을박하며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외세의 선전포고 이후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흥, 그렇다고 귀족에게 혁명군 총사령관직을 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미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말로는 코웃음을 쳤다.

“혁명의 순수성을 잃어서야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왕족과 귀족은 인민의 적! 그렇기에 일어났던 혁명이 아닌가! 이지도르, 그자가 타락하고 만 게야!”

“어허, 이런, 말로 의원이 많이 취하셨구려. 목소리 좀 낮추시오.”

동료 의원이 말렸지만, 말로는 클럽 안에 다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이, 이봐! 한 잔 더 가져와! 이 혁명 투사님께서 매일 마시던 걸로!”

-

“쯧쯧, 저래서야 귀족 놈들하고 뭐가 다른지.”

바를 관리하던 직원은 마침 옆에 기다리고 있던 점원에게 쟝 말로가 늘 마시던 술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술을 받은 엘렌 다비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혁명이 이루어지고, 누군가는 많은 것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도 말했다.

적어도 귀족가의 저택에서 일하던 부모를 모두 잃어버린 다비 가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소녀가 벌 수 있는 돈은 자신의 배를 곯아도 어린 동생들을 제대로 먹이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까.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돈을 보내주었을 때는 마치 하늘에서 구원이 내려온 것 같았다.

결국 그런 구원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고용주는 그녀의 목숨을 패로 쓰고자 그녀를 고용했다고 밝혔다.

고용주가 정말로 동생들을 위한 집과 그녀가 감히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을 보내주었을 때, 엘렌은 진지하게 도망쳐야 할지를 고민했다.

고용주의 소개로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급료를 받으면서 일하게 되자 굶주림을 견디던 생활은 빠르게 잊히고, 어쩌면 부모님의 원한을 잊고 살아가는 것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그러나 공화국이 남부의 귀족들과 협력하는 안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혁명의 대의를 들었다.

자유, 평등, 박애.

귀족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고, 신분과 무관하게 평등하며, 서로에게 박애를 품고 단결한다.

모두가 혁명 만세를 부르짖으며, 공화국의 대의에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섬기는 귀족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멍투성이로 집에 돌아와 아직 어린 그녀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던 날을 기억한다.

어머니를 구타한 귀족에 대한 울분을 품다가도, 다음날이면 그 귀족에게 굽신 거려야 했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녀의 부모님이 대체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했기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부모님의 어떤 행동이 혁명의 대의에 어긋났기에 귀족들과 함께 죽어야 했지?

그게 정말로 필요한 죽음이었다면, 저 높으신 분들은 대체 왜 다시 귀족과 손을 잡는다는 걸까?

엘렌은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약병을 꺼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각오했을 텐데도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럼에도 약병은 그녀의 기대보다 너무도 쉽게 열려, 기묘하리만치 불길한 분홍색의 빛을 발하는 가루를 드러냈다.

엘렌이 그 가루를 술에 붓자, 닿자마자 녹아들며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귀족들은 결코 믿을 수 없어!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간교한 속삭임이 말하는 것은 전부 거짓임이 틀림없소!”

거나하게 취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자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귀족들이 나쁜가? 아마도 나쁠 것이다.

혁명의 대의가 훌륭한가? 아마도 훌륭할 것이다.

어쩌면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민 출신인 그녀는 자신이 그런 걸 판단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날, 도시 전역을 뒤덮은 횃불들이 출렁이며 보여준 광기를 기억한다.

부모님이 걱정되어서 무작정 달려간 귀족의 저택 앞에서, 밖으로 끌려 나와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부모님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를 기억한다.

죽음이란 걸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동생들이 그녀를 붙잡고 부모님은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칭얼대다, 결국 지쳐 울음을 터트리던 광경을 기억한다.

엘렌은 그녀의 부모님이 죽은 그 희생의 끝에, 귀족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흥청망청 대며 큰소리를 치는 저자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귀족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쟝 말로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말로의 옆에 앉은 의원이 흘긋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혀를 차며 다시 돌리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거려, 엘렌은 그녀의 심장소리가 높으신 의원들에게 들리는 것은 아닌지 긴장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실수인 것처럼 이 술을 바닥에 쏟아버리면, 점장에게 혼나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뤼미에르에서 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로운 집을 얻고, 너무도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동생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좋아하던 광경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뭘 대가로 누리는 행복인지도 모를 텐데.

어쩌면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슬픔이 훨씬 클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걸음을 앞두고 엘렌이 망설이려는 찰나, 쟝 말로가 대뜸 다가왔다.

“왜 이리 늦어!”

엘렌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잔을 들어 올린 쟝 말로가 멋대로 건배사를 외치고, 마지못해 호응하는 의원들과 함께 술을 들이켰다.

엘렌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비척대는 걸음을 창가로 옮겼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음울하기 그지없게 안개로 덮인 도시의 정경이 내려다 보였다.

술을 건네준 점원이 자리를 비켜주기는커녕 멋대로 창가에 다가가 밖을 보는 모습에, 취기가 거나하게 오른 말로가 호통을 쳤다.

“어이, 지금 뭐- 우욱!”

치려했다.

말을 마치지도 못한 말로의 입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와, 바닥에 철퍽떨어졌다.

“헉!”

“무, 무슨 일이!”

“아, 아, 아아아-!”

의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가운데, 눈에 핏대가 선 말로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파낼 기세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엘렌은 흐릿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에는 압도되어 떠올리지도 못했던 말.

되도록 그 남자가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뒤늦게 연락책에게 전 했으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은 고용주가 들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완전히 피에 젖은 목을 긁어대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말로의 모습을 보니, 고용주는 그녀의 하찮은 목숨값을 제대로 쳐준 모양이다.

거의 일 분 가까이 비명을 지르며 피거품을 물고 발광하던 말로는 결국 그가 토해낸 피로 범벅이 된 끔찍한 몰골이 되어, 영영 깨어나지 않게 되었다.

엘렌은 멍하니, 그가 죽은 모습이 그자가 죽인 무수한 이들의 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로의 비명과 방안의 참상에 깜짝 놀라 달려온 이들과, 패닉에 빠진 채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지켜본 의원들의 시선이 천천히 엘렌에게로 쏠렸다.

창밖에서 빗줄기가 내는 소리만이 흐르던 정적 가운데, 엘렌은 그들 모두의 눈에 의심과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야속하게도, 통쾌함이나 후련함 같은 것은 없었다.

아, 살고 싶다.

미련만이 짙게 남았다.

다시 한번, 온 가족이 살았던 집을 보고 싶다. 다시 한번, 동생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다시 한번, 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이 웃어보고 싶다.

다시 한번, 동생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랬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행복해하던 그 애들에게, 누이가 너희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줄 텐데.

방 안에 모인 남자들에게서 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엘렌은 창가 쪽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고, 남자들은 그만큼 다가왔다.

머릿속에 베일로 얼굴은 가렸으나 귀를 파고드는 듯이 선명하던 음성의 여자가 떠올랐다.

은인의 존함이라도 들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은 무시했으나, 전해지리라 기대조차 하지 않은 부탁은 들어준 여자.

그 잔혹한 배려가 어쩐지 그녀에게 남은 동생들을 돌봐주겠다는 약속은 지킬테니 안심하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자신의 희망에 불과할까?

-엘렌 다비, 네 의지를 과대평가하는구나.

들었을 때는 오기만 차올랐던 말.

남자들이 달려드는 광경을 보면서, 엘렌은 이제야 실감했다.

-네가 죽는 순간, 네 어린 동생들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은 있니?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하던 동생들의 웃는 얼굴이, 공포 속에서 어느새 사랑스럽지 않게 덧칠되어 간다.

살고 싶은데.

엘렌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허리에 창틀이 닿았다.

그저 하찮은 목숨, 이름조차 알 자격 없는 버림말 일지라도.

최소한, 부모님을 만나 뵈었을 때는 웃고 싶어서.

한 걸음 더.

갈 곳을 잃은 몸이 뒤집히고, 빗물이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엘렌은 먹구름만이 가득해,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헛되이 손을 뻗었다.

눈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비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어머니.

아버지.

저는 좋은 누이였나요?

-

끔찍하게 독살당한 쟝 말로와 투신자살한 용의자 소녀의 이야기는 다음 날 뤼미에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용된 독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제품임이 알려지면서, 쟝 말로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부 습격을 주도했다는 사실과 함께 비열한 악마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용의자 소녀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서 빠르게 잊혔다.

얼마 뒤 게르마니아 제국의 군대가 곧 프랑지아 국경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때의 혁명 영웅 말로에 대한 이야기조차 잊혔다.

?

혁명기 - 뤼미에르

크리스틴은 게르마니아 제국의 선전포고 소식을 받자마자 미리 심어두었던 암살자를 통해 쟝 말로를 제거했다.

우리의 의도대로 쟝 말로의 암살로 시끄러웠던 뤼미에르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보복이라는 그럴듯한 동기에 잠시 주목했을 뿐, 금세 눈앞까지 닥쳐온 전쟁의 위협으로 눈을 돌렸다.

국민의회에서 우리와의 협력을 논의하는데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말로가 사라진 데다 외세로 인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국민의회의 논의는 지금껏 지지부진했던 것이 무색하게 빠르게 끝났다.

내가 요구했던 혁명군 총 사령관직은 역시나 거부되었고 이미 왕국군과의 전투에서 실력이 검증된 라파엘 발리앙이 북부군, 내가 남부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공화국이 군권은 주더라도 모든 혁명군을 귀족의 지휘하에 둘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고, 총사령관직을 요구한 건 어디까지나 협상을 주도하기 위해서였으니 이 정도면 선방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우리 연합의 영주들은 전원 공화국의 장교 계급뿐 아니라 국민의회의 의원직을 받았고, 공화국이 영지의 관리체계를 인수인계 받는 기간을 겸하여 1년간은 영지의 통치도 유예되었다.

그 외에 각 귀족들이 기존에 보유했던 재산을 보장받고, 정부에 넘기기로 한 영지에 따라 면세나 연금, 공직 임명 등의 보상을 받았다.

특히나 크리스틴은 프랑지아 내에서도 아키텐 상단의 면세 혜택을 받게 되었으니, 신성 교국과의 자유무역과 함께 막대한 부를 벌어들일 수 있게 되겠지.

그 긴 시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혁명군과 같은 깃발을 쓰게 되었다.

-

라파예트 영지의 군사들과, 수도 뤼미에르로 함께 갈 이들이 준비에 한창인 시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제니와 마주하고 있었다.

“...괜찮겠나? 에리스와 친해졌다고는 해도 네 가족들은 이곳에 남을 텐데, 굳이 수도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어.”

유예기간을 두었다고는 해도 영지를 정부에게 넘기는 이상, 제니를 비롯한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나는 그저 고용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조심스러운 말을 들은 제니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후작님. 에리스님을 모시는 건 꽤 즐거운 일인걸요.”

처음에 내 시종으로 들였을 때만 해도 뻣뻣하니 긴장한 채 나를 경계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가끔은 에리스에게 은근슬쩍 묻어서 나를 놀려 먹는데 동참하기도 했지.

내가 돌아오고 2년 반이 지났다. 이제는 표정이 꽤 밝아진 그녀는 잔뜩 위축된 채, 측은한 얼굴로 나에게 빵과 마실 물을 주던 여인과 동일 인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내가 상념에 잠겨 있자, 제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작님.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다소 주제넘은 말을 올려도 될지요?”

“음? 들어보지.”

내가 허락하자 제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하녀 출신입니다. 하지만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후작님께선 영주님이기에 아랫사람들이 억지로 섬기고 있던 것처럼 여기시는 것 같네요.”

내가 허를 찔려 말문이 막혀있자, 제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후작님께서는 사용인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보수를 지급하시고, 다른 영주 분들에 비하면 부당한 처우도 내리지 않으십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어딜 가도 이만한 대우를 받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제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자면 저를 갑자기 전속 시종으로 들이셨을 때, 다소 불순한 걱정도 했습니다만....”

“그건 나도 봐서 알아.”

“송구합니다.”

제니는 내 답에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지만, 이내 가볍게 심호흡을 하더니 나를 똑바로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후작저의 일에 만족하고, 또 후작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선대 후작님께서 영지를 비우신 때부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니 저나, 수도까지 갈 다른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후작님을 따르는 것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내 눈치를 보는 제니를 보며 웃었다.

지하 감옥에서도, 돌아온 이후에도 묻지 못한 말에 대한 답.

영주인 내가 이들과 가까워지려고 해도 저들이 곤란해할 뿐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과연 정말로 저들과 공감하며 제대로 대우해 주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신경 써왔다.

그럼에도, 내가 구태여 묻지 않은 질문을 그녀가 스스로 찾아 답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진심이야. ...준비할 일이 많을 텐데, 내가 시간을 너무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후작님.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도에 도착하면 고생한 이들에게 보너스 정도는 챙겨주지.”

“기대하겠습니다, 후작님.”

제니는 방긋 웃으며 물러갔고, 나는 내 집무실로 향하려고 복도의 코너를 돌자마자 듀몬트 남작과 딱 마주쳤다.

어째 배가 더 나온 남작은 눈시울을 붉히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있었다.

“듀, 듀몬트 남작.”

“유리아 아가씨께서도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나는 남작의 말을 듣고,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제 결정에 화나신 것 아니었습니까, 남작?”

“크흠, 그것은....”

공화국에 합류하기 위해 영지를 포기한다.

남부 귀족들의 연합이 전력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봐야 세력을 다 합쳐도 인구로는 수도와 북서부를 차지한 공화국의 절반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외세와 손잡은 국왕에게 대응하기 위해 나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고 나름의 보상도 있으나, 툴루즈 백작령에 충성을 바쳐온 듀몬트와 가신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듀몬트 남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로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생각의 근간이 그리 쉽게 바뀌겠습니까.”

그동안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으나, 공화국으로의 합류를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그에겐 툴루즈 지방의 총독으로서 관리 권한을 주었다.

권한만으로 치자면 남작령의 소유권보다도 훨씬 크지만, 그에게 이건 이성보다는 감성의 문제였을 거다.

“그러나 유리아 아가...선대 백작님께서는 제게 후작님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후작님께 충성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아니요, 남작님. 이제는 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겁니다. 저와 함께, 제 아래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요.”

듀몬트 남작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익숙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남작님. 그러면,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하자, 듀몬트 남작은 좀 어색하게 그것을 받았다.

나는 힘주어 그와 악수를 한 뒤,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남작님.”

남작은 또다시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나잇값 못하시긴.

그래도 그가 있으니 내가 걱정 없이 수도로 향할 수 있는 거겠지.

-

중간에 아키텐과 앙쥬 등 연합의 군대 및 일행과 합류하여 이동하느라 시간은 꽤 걸렸지만, 우리는 겨울이 되기 직전에 수도 뤼미에르에 입성했다.

회귀 전에는 적이었던 프랑지아 공화국의 깃발이 내가 이끄는 군대에서 휘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 생경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혁명 정부는 결국 우리와 타협했지만, 그것을 굴복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 쪽에서 요구하기도 했지만, 혁명 정부는 우리 세력을 외세와 손잡은 부패한 왕정에서 등 돌려 혁명의 대의에 가담한 애국자들로 포장해 주었다.

그 덕분에 뤼미에르의 주민들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뤼미에르의 광장을 둘러싼 채 나를 죽이라고 부르짖던 주민들은 같은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나와 우리의 행렬을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보고 있었다.

와중에 행렬에서 앞장선 아키텐의 상단에서 잔뜩 준비해온 빵을 주민들에게 던져주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순식간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꺼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라파예트 만세’라거나 ‘아키텐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까지 나오자, 그것은 삽시간에 온 광장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의 제안이었고 실제로 효과는 차고 넘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짓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니 부패한 귀족의 처단이니 뭐니 해도, 역시 당장 내 손안에 들어온 빵이 더 기쁜 거지.

“저 폭도들마저 이토록 우러러본다니, 역시 후작님께서는 불세출의 영웅이심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 데미앙 드 미르보! 앞으로도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나는 썩어들어 가려는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며 웃었고, 미소 지은 채로 데미앙에게 답했다.

“그냥 맡은 임무나 잘 해주시면 됩니다, 장군.”

“하하, 하하하, 물론이죠. 네....”

가장 늦게 합류한 데미앙 드 미르보는 그래도 나름 군대를 이끌고 가담했답시고 내 밑에서 복무할 장군 직위를 받았고, 공화국 가담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는다는 확약도 받아냈다.

운도 좋지. 그에겐 좋은 일이긴 한데, 이 미덥지 못한 친구를 받아들인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뤼미에르의 중앙거리에 도달하자, 준비된 연단과 국민 의회의 의원 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그리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온건파의 지도자인 니콜라 브리소가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해서 내가 그와 악수를 나누는 사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가볍게 목례를 한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아키텐 상단이 던져주는 빵을 받고 환호하는 주민들을 흘긋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안경을 고쳐 쓴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고대 제국의 콜로세움을 보는 것 같군요.”

잔혹하고 피 튀는 결투로 관중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들에게 빵을 던져주며 민심을 다스리던 황제들을 떠올린 건가.

나는 그에게 슬며시 웃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들을 위해 싸우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이지도르는 슬며시 눈썹을 틀어 올렸지만, 더 이상 말을 거는 대신 연단을 향해 손을 뻗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연단을 향해 걸음을 디뎠다. 회귀 전, 내가 끌려가 생을 마감한 그 광장을 걷는다.

저 멀리 간이 재판정과 단두대가 놓인 것이 보였다.

그때 나를 죽이라고 부르짖던 군중들의 얼굴은 그때처럼 광기와 환희에 차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저 빵을 오물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누군가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누군가는 경계심을 품은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침내 연단에 오른 내가 심호흡을 하는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더러운 귀족 놈!”

반사적으로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 뒤, 나는 내 앞에서 가로막혀 바닥에 떨어진 것이 썩은 달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마력을 봉인하는 족쇄에 채워진 채 이 광장을 끌려가며 무방비하게 맞았던 그것과 같은 썩은 내가 진동하여, 쓴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감히!”

눈 깜짝할 사이에 군중들을 밀쳐내며 뛰어든 가스통은 순식간에 달걀을 던진 남자를 덮쳐, 그대로 땅에 쓰러트렸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가스통 경.”

“후작님.”

“놔주게. 그도 프랑지아의 국민이니.”

“...분부대로.”

가스통이 남자를 놔주고 물러서자, 그 남자는 분노와 의아함 반으로 일어서서 나를 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침을 뱉고 등을 돌려 멀어져 간다.

나는 집중된 시선이 흩어지기 전에 마력을 실어 입을 열었다.

“금일부로 프랑지아 공화국 남부군 사령관에 임명된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뤼미에르의 시민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군중들 사이에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가 완전히 사라졌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

“여러분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제3신분으로서 공화국과 함께 하겠다고 결정한 저와 제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의 노력은 했고, 안전장치도 준비할 수 있는 만큼은 준비했다.

그럼에도 그걸로 충분하리라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분명, 이 뤼미에르에서 외부와 내부의 적에 맞서 동시에 싸워야 하겠지.

“우리는 긴 시간을 다른 입장에서 살아왔으며, 여러분이 품은 의문은 지당합니다. 저 또한 여러분의 자유를 이해하고, 여러분을 평등하게 대해왔다고, 모든 이들에게 박애를 품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아래에서 크리스틴이 나를 보고 있다.

그 깊고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믿고 있다고, 안심시켜준다.

그래서 나는 의심 없이 말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꺼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 구체제와 국왕의 곁이 아니라 여러분, 프랑지아의 국민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생존을 위해,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나에게 명분과 책임감의 무게를 얹은 존재를 바라보았다.

로브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어쩐지 에리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저의 조국이 외세의 발에 짓밟힐것임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외세에 맞서 조국을 지킬 프랑지아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가스통과 기사들이 내 말을 듣고 있다.

“그대들이 이룩해낸 자유 그 자체가 저들에게 위협이기에, 저들은 구체제의 압제를 지키고자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저들은 구체제의 낡은 사슬로 다시금 우리를 묶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회귀 전 어째서 싸우는지도 모른 채 내 명령에 따라 혁명군의 깃발에 맞서 싸웠던 이들이, 지금은 공화국의 깃발을 들고 도열해 있다.

“숱한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무수한 피를 흘린 프랑지아의 국민들이여. 그 시련 끝에 얻어낸 그대들의 자유가, 그대들의 평등이, 그대들의 박애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아비의 명예를 위해 의미도 모른 채 죽어 나간 자들의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내가 저들에게 따르라며 충성을 요구했다.

오직 내 목표를 위해 저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한 말. 그것이 위선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저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왔다.

“그러나 적들은 아직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저들은 왕의 명령을 받아, 지휘관의 명예를 위해 싸우라고 강요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가족의 평등을 위해, 조국의 박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회귀 전, 나는 저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답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프랑지아의 국민들이여, 감히 묻겠습니다!”

이들이 싸우러 나간 순간 대의를 품고 있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자유를 다시 빼앗길 것입니까?”

“아니오!”

단 한 명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을 시작으로, 같은 답이 순식간에 물결치며 온 광장에 퍼져나간다.

“그대들은 다시 구체제의 노예가 될 것입니까?”

“아니오!”

“그대들은 조국과 국민을 배신한 국왕과 싸울 것입니까?”

“예!”

“저 외세의 위협에 맞서 단호하게 싸우겠습니까?”

“예!”

“우리는 혁명군입니다! 압제자의 강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대들이 이룩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설 자들입니다! 그대들은 최초로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며, 최초로 그대들의 영광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그대들이 프랑지아입니다! 혁명을 위해! 프랑지아 만세!”

“프랑지아 만세!”

“혁명 만세!”

나는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하나 된 것처럼 외치는 소리가 도시 전역을 뒤 흔들 기세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등을 돌렸다.

몇몇 의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덩달아 만세를 부르짖는 가운데, 조용히 서 있던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나를 똑바로 보며 짝-짝-짝-.

정확히 짧고 단조롭게 세 번의 박수를 치는 것이 보인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웃어 보였다.

이제야.

제대로 시작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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