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하찮은 목숨
난데없이 무릎을 꿇은 데미앙 드 미르보의 행동에 나는 이자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되짚어보니 대충 이해는 갔다.
미르보 백작가는 루이 왕의 파벌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령과 아키텐 백작령의 바로 위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남부와 북서부에 걸쳐있던 루이 왕의 봉신들은 나와의 전투에서 단체로 쓸려나가 버렸고, 그렇게 영주들이 전사한 영지들은 혁명이 터졌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전부 무너져 버렸다.
그나마 멀쩡한 건 오를레앙 공작의 영지였지만, 그 오를레앙의 영지도 바로 얼마 전 라파엘 발리앙이 이끄는 혁명군에 의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주군이었던 루이 왕은 옛 1왕자파였던 로렌 공작의 영지로 도망쳐 외국 군대의 원군만 기다리고 있으니, 미르보는 버림받은 채 적지 한가운데 고립된 셈이다.
데미앙을 호구 잡아서 초기 자금을 마련한 입장에서 말하긴 뭣하지만, 미르보도 참 수난이군.
“그런데, 왜 아키텐도 아니고 라파예트로 온 겁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는 미르보 백작가의 원수일 텐데?”
어차피 굴복할 거라면 내전 기간에 계속 싸웠고, 선대 미르보 백작과 장남을 죽여 버린 나보단 명목상으로라도 중립이었던 크리스틴 쪽이 차라리 낫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키텐의 이름을 들은 데미앙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뭐야, 왜 이러는데?
“...후작님은 바로 니베르네 평야로 이동하셔서 모르시겠군요. 아키텐 백작,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야 크리스틴이 나누어준 전리품이 꽤 두둑해서 좋아하기만 했지, 그녀가 뭘 했는지는 모르지....
데미앙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에 저는 후작님께 패퇴한 남부군을 미르보 백작령에서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키텐 백작은 우리 군을 추격하는 게 아니라 도로와 인근 마을 들을 먼저 점거해버리고 기병을 풀더군요.”
아.
군대가 따라갈 길이나 모일 장소 자체를 미리 확보해두고, 기병대로 쫓으며 완전히 흩어버린다.
원정 와서 길도 모르는 데다 수뇌부가 날아가 버린 국왕군은 혼란에 빠졌을테니, 평소부터 이곳저곳 상행을 다녀 지리를 파악한 아키텐이 앞지른 거군.
어떤 꼴이 되었을지 알만하다.
정신없이 패퇴한 군대가 보급물자나 숙영장비 같은 걸 챙겼을 리도 만무하니, 굶주린 채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제 발로 아키텐의 군대에게 붙잡혔겠지.
크리스틴은 군재도 제법 우수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녀의 보좌들이 꽤 유능하던지.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했으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아키텐 백작은 미르보 백작령의 수도인 베르주라크로 향하는 길을 전부 봉쇄하고, 그렇게 잡아들인 포로들을 무장해제 시킨 뒤 전부 제게로 보냈습니다.”
“....”
“당장 공성 중인 것도 아니니 국왕파의 병사들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없지만, 길을 전부 봉쇄해놔서 물자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기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고 병장기도 전부 강탈당했으니 싸울 수도 없고, 원정 온 국왕군이 미르보 백작가에 충성심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런 상황에 봉쇄되어 쫄쫄 굶는다면, 기껏 구해낸 아군은 그대로 항복하자는 압력이 되었겠지.
내가 내심 혀를 내두르는 사이, 데미앙은 치를 떨며 말했다.
“저는 결국 항복했습니다. 영지의 돈을 바닥까지 긁어내서 바치고서야 아키텐백작이 물러갔죠. 그런데 그동안 점거했던 마을들에서는 일일이 돈 줘가며 물자를 샀다더군요?”
“하하하....”
걸작이네. 크리스틴이 미르보 백작을 가둬놓고 영지를 약탈했으면 짭짤하기는 했겠지만, 그러면 미르보 백작령의 원한을 살 테고 데미앙도 영지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영주는 세금만 걷어가고 보호도 못 해주는데, 침략군은 물자를 제값주고 사준다?
설사 그게 그들의 영주한테 뜯어낼 돈이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차라리 영주가 당하고 있을 때가 나았다’같은 생각을 품게 될 거다.
와중에 수도에서 혁명이 터지고 있으니, 미르보 백작령의 영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안 봐도 뻔하군.
“그러고 난 뒤에야 루이 왕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빌어먹을,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국왕군이고 뭐고 도시에 들여 주지도 않았을 것을...!”
데미앙은 내 앞이란 것도 잊을 정도로 분노에 찼는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데미앙이 희번득거리는 눈을 내 쪽으로 향해서 나도 움찔했다.
“존경하는 후작님.”
언제부터 날 그리 존경했다고?
“아키텐 백작, 그 여자는 마녀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간교하고 비열한....”
열심히 나불거리던 데미앙은 내 표정을 보고는 급히 표정을 고쳐서 다시 말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레이디셨죠. 그 윤기 도는 검은 머리칼하며, 현명하고 차분한 깊은 눈동자는 또....”
다급하게 말하던 데미앙은 내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는 것을 깨달은 듯, 어버버 거리다가 비굴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로 라파예트 후작님 같은 분께서 동맹으로 고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거느린 후작님께 덤빌 생각을 했다니, 과거의 제 어리석음에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제 좀 마음에 드네. 눈치는 있군?
하긴, 그러니 장남이 멀쩡히 있는데도 영주대행을 맡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데미앙은 지금 망했다 이거지.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군대는 너덜너덜하고 영지 자금도 전부 강탈당했는데, 크리스틴의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 덕분에 섣불리 병력을 징집하거나 징세를 하려다간 영지에서 반란이 터질 상황이니 손발이 다 묶인 셈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오를레앙 공작령을 무너트린 혁명군이 남하하든, 나나 크리스틴이 북상하든 가운데 껴서 죽게 생겼으니 이렇게 찾아온 거겠지.
데미앙은 부담스럽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내게 보내며 굽신거렸다.
“비록 제가 한때는 주변 영지를 약탈하던 무도한 자였으나, 후작님께 감화되어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한 몸 받아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에리스의 채찍질에 감화된 거 아니고?
나는 영 미덥지 못한 데미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작자의 전적을 생각하면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어차피 혁명 정부가 검토중인 내용에는 공화국으로의 합류 이전의 죄목으로 귀족을 고발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그걸로 면책시켜주고, 미르보 백작령을 추가로 얹어 주는 걸로 공화국의 환심을 사면 뭐라도 더 받아낼 수 있겠지.
게다가 혁명군에는 제대로 된 지휘관이 부족하고, 내 파벌에서 리오넬 백작이 이탈해버린 이상 대규모 야전의 지휘를 맡을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머릿속에 잠깐 크리스틴이 떠올랐지만, 바로 지워버렸다. 심리전에 능한 사람이고, 데미앙의 말을 들어볼 때 지휘관으로서의 소양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그녀를 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결국, 나는 싱긋 웃으며 데미앙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파예트 후작으로서, 그대를 기꺼이 환영하지요,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적이었음에도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이 관대함! 후작님이야말로 저 루이 왕보다도 더 제 주인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봉신으로서 충성을 다 하-”
“아, 봉신은 필요 없고.”
“예?”
“영지만 있으면 되니까, 백작위는 그대로 가지시고 충성 맹세도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어차피 공화국과 한 배를 탈 거거든.”
데미앙은 5초쯤 굳어 있다가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예에에에에~?!”
그러게 계약을 하려거든 상대 상황부터 먼저 파악하셨어야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씨.
어차피 여기서 내 손 안 잡으면 목 씻고 죽을 일 밖에 안 남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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