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협상 테이블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고민에 빠졌다.
온건파에 회담을 청했는데, 급진파의 거두가 거기 동행했다?
심지어 그걸 우리에게 숨겼다.
설마하니 온건파가 급진파와 손을 잡고, 여기서 우리를 습격이라도 할 셈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틴을 안전하게 보호해서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나?
그녀는 반드시 루이스도 데리고 빠져나가려고 할 텐데, 내 기사들이 있다고 해도 전투력이 전무한 두 사람을 보호해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진정하자. 그럴 리는 없다.
혁명 정부, 특히 급진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정적인 니콜라 브리소야 우리를 쓸어버리기 위한 버림패로 쓸 수 있어도, 막 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아니다.
이쪽에 기사도 있는데 습격을 할 작정이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이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모른 척해야 하나?
아니, 아니지.
급진파가 눈치챈 이상, 어차피 온건파와 은밀하게 회담을 진행하는 일은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천천히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 후작님?”
브리소의 당혹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내가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명백해지자 놀란 혁명 정부의 요인들이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췄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눈에 이채를 띈 채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해보였다.
“여기서 혁명 정부의 거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막 시밀리앙 이지도르 의원. 피에르 드 라파예트입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슬며시 한쪽 눈썹을 틀어 올렸고, 의외의 사태에서 그가 보인 당혹스러운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코에 걸쳐 놓은 안경을 고쳐 썼다.
“처음 뵙겠습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프랑지아 공화국 국민 의회의 의원,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입니다.”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강변하던 상대와 인사를 주고받는 상황이라니, 이것 참 기분 묘한데.
옆에서 니콜라 브리소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고, 크리스틴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그 깊고 탁한 검은 눈동자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다.
그 어쩐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와 인물들의 조합이 조금 희극처럼 느껴져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니콜라 브리소 의원에게 청한 비공식 회담에 사전에 언질 받지 못한 거물이 계셔서, 조금 놀란 나머지 참지 못하고 티를 내고 말았군요. 실례가 되었는지?”
이지도르는 딱딱한 얼굴로 살짝 목례해 보였다.
“남부의 이름 높은 기사이자 대영주인 후작님께서 수도의 평민 출신 변호사이 자 민중의 의원인 제 얼굴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무례에 대해 사과드릴 수는 없겠군요. 저는 공화국을 대표하는 의원 중 하나로서, 아직은 이 ‘회담’이 프랑지아 인민에 대한 배신행위인지 아닌지를 결론 내리지 못했기에.”
아,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우리가 온건파에 청한 비밀 회담에 대한 정보가 급진파에 흘러 들어갔고, 니콜라 브리소와 온건파가 귀족과 내통한다는 혐의가 씌워진 건가.
모양새를 보아하니 바로 단두대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 회담의 결과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럴 의향이 가득하셨던 모양이고.
그래서 이틀이나 일정이 지연되었던 거군.
저들 내부적으로 이 건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론이 나서 책임자이자 감시역으로 이지도르가 따라온 모양이다.
슬며시 니콜라 브리소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는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쯧쯧, 온건파 사정이 어렵다는 거야 알았지만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하실 줄이야.
이래서야 온건파의 영향력 강화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번 회담에서 저들의 목숨줄을 붙여줘야 하는 꼴 아닌가?
나는 한숨을 참으며 크리스틴과 눈을 마주쳤고,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의도를 깨닫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마음의 준비가 되진 않았지만, 그녀와 내 사람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상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마침 잘 되었군요.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공화국과 회담을 원하고 있었으니, 어떠십니까? 먼 길을 오신 김에 회담에 참여하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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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자신의 도시에서 충돌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있던 시장은 바로 반색하며 회담 장소로 안내해 주었고, 우리는 바로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먼 회담을 시작했다.
“동맹 제안이 아니라, 아예 공화국에 합류하고 싶다?”
브리소는 반색했지만, 이지도르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르시리라 여기지는 않지만, 공화국은 봉건제도의 폐지와 보통선거의 도입을 실시했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깃발 아래 그대들 귀족, 제2신분의 특권은 어느 것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이지도르는 손으로 다시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덧붙였다.
“무너져 가는 왕국을 버리고, 구체제에서 그대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지킬 생각으로 공화국에 손을 뻗으시는 거라면 잘못 생각하신 거라고 말해드리고 싶군요. 공화국의 기치는 자유, 평등, 박애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대들 제2신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신분과 무관하게 평등하고, 서로에게 박애를 품은 채 그대들의 구체제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 듣기에는 무척 좋으나, 그대들의 영역에 있던 귀족들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던 모양입니다만.”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했고, 평등하게 두지도 않았으며, 존중하지도 않았지요. 수백 년의 시간을 이어온 그 압제의 대가를 이제야 비로소, 극히 일부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내가 가볍게 문제 삼아보았지만, 이지도르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이 즉답했다.
과연, 기싸움 같은 건 의미 없어 보이는군.
나는 살짝 쓴웃음을 지은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 의도를 곡해해서 들으신 모양입니다. 우리는 분명, 공화국에 합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들 제3신분의 일원으로서 함께 하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회담장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제야 조금 여유를 찾은 니콜라 브리소가 입을 열었다.
“이지도르 의원,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 그리고 두 분과 뜻을 함께하는 영주들은 영지를 공화국에 편입시키고, 공화국 법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히셨다고 하지 않았소. 이만하면 진정성은 충분해 보이오.”
이지도르는 슬며시 미간을 좁힌 채로 입을 열었다.
“브리소 의원의 말대로, 정말로 그대들이 공화국과 함께 하겠다는 말입니까?”
“들은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영지를 공화국에 편입시키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통치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우리의 군대도 그대로 공화국군으로 편입시킬 생각이고.”
회담장에 앉은 공화국의 인사들이 저들끼리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들로서는 최상의 조건이다.
수도 뤼미에르를 장악하고는 있다지만, 프랑지아 북서부 외에는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혁명 정부의 정통성은 지극히 약하다.
그런 와중에 현재 공화국의 지배 영역보다 더 큰 영역이 자진해서 공화국의 깃발 아래, 그것도 정규 훈련을 받고 내전을 치른 정예병과 함께 편입된다.
자칫하면 왕뿐 아니라 외국 군대와도 전쟁을 벌일 처지인 공화국에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이 있을까?
이지도르는 잠시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더니,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은?”
“귀족들에게도 동등한 제3신분의 권리를 보장할 것.”
저들이 말하는 자유, 평등, 박애에 의거한 선거권, 피선거권, 재산권, 동등한 법으로 재판받을 권리 등.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제2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저기서 예외 처리되는 귀족에겐 상당히 중요하다.
“...그대들에게 영지의 통치권을 넘길 귀족들에게, 대신 공화국군의 지휘권을 주시죠. 단적으로 제 경우. 공화국군 총사령관직을 원합니다.”
“뭐, 뭐라고!”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프랑지아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사력을 온 전하게 보유한 세력입니다. 그들을 혁명군의 깃발 아래 편입시키고 대대로 이 어온 영지의 통치권마저 넘기는데, 공화국에 그만큼 기여한 제3신분이라면 능히 그 정도 자리는 받을 것 같습니다만. 군 사령관으로서의 제 자격은 굳이 입증할 필요성도 없을 것 같고.”
영지 통치권을 넘기는데, 최소한 군권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지 않겠나?
게다가 저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남부 세력의 군대는 영지 수입에 비해 비대하다. 특히 나와 크리스틴은 영지 수입으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상단과 개인자산을 운용한 이익을 통해 군비를 충당해야 할 정도니까.
영지와 군대의 소속을 공화국에 떠넘기고 우리 측 인사들이 공화국군의 지휘권을 잡으면 군비는 공화국에 부담시키고, 우리는 우리대로 공화국의 녹봉을 타먹으며 군권은 그대로 잡고 있는 셈이다.
어차피 공화국에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곤 라파엘 발리앙과 그 수하들 정도일테니, 싫어도 우리에게 의존해야 하게 될 걸?
“지금 제3신분과 공화국을 지킬 군대를 왕국 출신의 제2신분에게 넘기라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이지도르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물론 공화국 입장에서도 목줄을 넘기는 일이니 쉬울 리야 없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제2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부정합니다. 공화국법 아래, 그대들 제3신분과 평등한 자격으로 놓이기를 원합니다. 그대들도 공화국에 기여도가 높은 국민들에게 ‘혁명에 열성적인’ 이들임을 인정하며 여러 특권과 지위를 보장한 것으로 아는데.”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물었다.
“우리가 한때 제2신분이었다는 것 외에, 그대들이 공화국 국민들에게 보장하는 자유, 평등, 박애의 기준에서 우리만 예외가 될 만한 결격사유가 있는지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담장의 테이블은 순식간에 온갖 아우성 속에 파묻혀버렸다.
내 말에 역시 귀족은 믿을 수 없다며 격분하는 자들부터,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바로 군대를 통해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려 들 거라고 고함을 지르는 자 들까지.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그 안에서 두 손을 깍지 낀 채, 침묵을 고수했다.
그 혼란이 조금씩 잦아들 때쯤, 이지도르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제안은 달콤한 독배로군요. 공화국 국민들의 생명을 귀족의 손에 맡기라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대들이 바라는 제3신분으로서의 기본권부터가 문제입니다.”
말을 마친 이지도르는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보통 선거권을 보장하지만, 성년 남성에 한해서 보장합니다. 라파예트 후작께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유한다 치더라도, 아키텐 백작께는 그런 권리가 일체 없습니다. 그걸 떠나서 뤼미에르의 시민들이 고작해야 영지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만으로 귀족에게 군대를 맡기는 것에 동의할 리가-”
이지도르의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살랑거리던 부채를 착- 소리 나게 접었다.
“그대들은 국민의 재산에 따라 선거권에도 차등을 두었죠?”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하며, 그런 식으로 예외를 둘 수는....”
“공화국 분기 예산의 절반을 드리죠.”
회담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흐르는 동안, 그것을 즐기는 듯 우아하게 미소 지은 크리스틴이 덧붙였다.
“또한, 현재 뤼미에르와 공화국 전역에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 중인 것으로 아는데.”
그 말을 들은 이지도르의 얼굴은 딱딱하게 찌푸려졌다.
긴 내전 동안 북부 지역의 농민들은 군사로 징집 당했고 전투로 인해 농지는 황폐화되었으며, 유례없는 혹한까지 덮쳤다.
심지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부를 혁명군이 앞장서 습격했고, 주변국들이 공화국 정부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식량 수입길조차 요원하다.
살아남고자 일으킨 혁명이지만 저들의 혁명이 국민들을 배부르게 해주진 못했다. 그게 공화국 정부의 잘못은 아니지만 당연히 민심은 그런 걸 헤아려 주지 않는다.
“마침 아키텐 상단은 상당량의 식량을 매입해 두었답니다. 공화국의 일원이 될 몸으로써 국민들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저렴한 가격에 넘겨드릴 의향도 있죠. 제가 제3신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허용 받고, 아키텐 상단에 대해 적절한 면세 특권을 제공해 주신다면요.”
니콜라 브리소는 반색한 얼굴로 말했다.
“아키텐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공화국은 올해 당면한 위기를 상당 부분 넘길 수 있소. 무리한 특권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러나 이지도르는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인 채로 입을 열었다.
“내전과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민중들의 불행을 이용해 불린 부로 공화국을 매수하겠다는 겁니까?”
크리스틴은 따분하다는 듯한 한숨을 내뱉으며 나에게로 시선을 보냈고, 내가 끄덕여 보이자 수하에게서 서류를 받아 그대로 테이블 위로 밀어버렸다.
밀려난 서류가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이지도르의 앞에 놓였고, 미간을 구긴 채 그 서류를 들여다본 이지도르는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민중을 위한다는 공화국 정부의 총재께서, 공화국의 이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래를 통해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만.”
크리스틴의 말에서 시작된 술렁임은 순식간에 테이블에 퍼져나간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아키텐 상단은 공화국 국민들에게 부끄러울만한 거래를 한 적은 없습니다. 혹여 공화국의 평등과 박애는 공화국의 치부를 무시한 채, 공화국에 합류하길 원하는 이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걸까요?”
크리스틴의 입에서 이어진 말 앞에, 이지도르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과연, ‘부패할 수 없는 자’로 칭해지는 이지도르는 어쩔 텐가?
이지도르는 잠시 몸을 떨었지만, 이내 그것을 내려놓고 다른 공화국 인사들이 그것을 읽게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합격점을 주었다. 그는 확고한 우리의 적이지만, 최소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자라는 소리니까.
이쯤에서 손을 보태는 것이 좋겠지.
“루이 왕은 들고 일어난 프랑지아 국민들을 반란군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당장 결혼 동맹 관계인 게르마니아 제국과 북부 연합 왕국에 참전을 요청했고, 저들은 프랑지아의 불행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자 곧 참전해올 겁니다.”
이제는 회담장의 어느 누구도 대놓고 분노하거나 비난을 일삼지 않는다.
“제3신분의 정부를 표방한 그대들이 제2신분인 우리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나, 우리 또한 저 무도한 폭군의 적입니다. 그 폭군의 발악을 명분 삼아 프랑 지아를 침공할 침략자들에 맞설 프랑지아의 국민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의 가능성에서 눈을 돌린 채 이대로 반목만을 이어나간다면, 프랑지아는 무방비한 채로 저들에게 휩쓸리게 될 겁니다.”
나는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우리도, 그대들도, 프랑지 아 인민의 국가조차도.”
저 멍청한 폭군은 외세의 노예가 되어서라도 다 썩어가는 왕국을 되찾고 싶어하는데, 우리끼리 다투다가 다 같이 망할 텐가?
“우리는 꽤 많은 걸 준비해서 왔습니다. 당장 프랑지아의 북서부만 차지하고 앉아서 프랑지아의 정통 정부를 자처하는 공화국에, 우리의 기득권, 프랑지아남부의 영지와 강군을 넘겨줄 준비를 하고 왔죠. 이만하면 최소한 우리가 민중들을 착취하던 저 구제체의 기득권과 다르다는 증명 정도는 된 것 같은데.”
언제까지 평민들만의 공화국이라는 헛된 명분에 얽매이려고?
“그런데 우리 조건을 다 꺼내기도 전에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가 공화국에 군대를 합류시키니 그 지휘권을 받아가겠다는 것조차 이렇게 경기한다?
이래서야 대체 우리가 어떻게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에게 절실한 영토, 군대, 자금, 심지어 식량까지 제시했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 그대들이 내건 혁명의 대의에 합류시킬 수 있는 최대의 세력을 준비해 왔죠.”
그래도 싫다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못 믿어서 손을 내치겠다면야, 우리는 부득이하게 국왕이나 외세에 붙는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지아의 국민으로서 그렇게 된다면 우리로서도 굉장히 슬프겠습니다만, 아무렴 우리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는 집단보다 못하겠습니까?”
완전히 고요해진 회담장을 내가 한 번 둘러보자, 긴 침묵을 지키던 이지도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확답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대들 귀족들과 달리 국민 의회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니. 하지만 그대들과 적정선을 협상하고, 의회에 안건으로 올리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반은 왔다.
나는 그제야 여유를 가지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이제 좀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해지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