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31화 (31/258)

혁명기 - 당신이란 사람에게

빛 한 점 흘러들지 않는 지하.

끼이익-

쇠창살이 열리는 소음과 함께, 발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할파스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마침내 코너를 돌아서 나타난 사람이 검은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할파스는 미약하게 안도했다.

“...이건 조금 너무하네요.”

크리스틴 다키텐은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족쇄가 채워진 채 의자에 앉은 할파스에게 다가왔다.

“윽, 냄새.”

크리스틴이 그에게로 다가오다 손으로 코를 가리는 모습에, 할파스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의자에 묶인 채 제대로 용변을 볼 수도 없게 만들어놨으니, 온갖 악취에 찌든 것도 당연하다.

예전 성질머리 같았다면 단숨에 무력한 인간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놓았겠지만, 마력을 봉인하는 족쇄에 구속당한 채 긴 시간 고문당한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

잠깐 얼굴을 찌푸린 채 냄새에 익숙해진 크리스틴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곤 그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할파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가 내민 병의 물을 정신없이 받아마셨다.

얼마 만에 마시는지 모를 물로 목을 어느 정도 축이고 나서야, 할파스는 자신의 모습이 인간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새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미개한 인간 따위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데 대한 분노 같은 건 사그라든지 오래다. 그런 감정을 품기에 그는 너무 고통받았고, 너무 지쳤다.

마족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이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할파스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할파스.”

“...좋은 소식?”

할파스는 쇳소리가 섞인 자신의 음성에 슬며시 미간을 구겼지만, 크리스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접촉해왔어요. 아무래도 당신을 신성 교국에 넘기는 건 원하지 않는 모양이더라고요.”

할파스는 그 말을 듣고 깊이 안도했다.

손해가 된다면 악마 하나쯤 잘라내도 이상하지 않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지만, 신성 교국에 넘겨질 고위 마족이 어떤 식으로 사용될지는 신경 쓰는 모양이다.

크리스틴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저는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거래를 계속해온 입장이라 마족 자체에 그리 거부감은 없어요. 이득만 된다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넘기는 것이 오히려 좋죠. 다만, 라파예트 후작님이....”

그 이름을 들은 할파스는 저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다.

그 악마보다 더한 작자는 악마를 정말 얼마나 격렬하게 증오하는지, 진심으로 노력과 연구를 곁들여가며 할파스에게 가능한 모든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크리스틴은 할파스가 몸을 떠는 걸 보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시겠지만, 그분은 기사답게 악마를 좀, 많이 싫어하셔서요. 게다가, 전에 당신이 흘린 정보가 거짓이란 걸 알고 한껏 벼르고 있죠.”

할파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처음에만 해도 할파스는 크리스틴이나 피에르나 한통속으로 여겼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차라리 죽이라고 외치게 만드는 작자에 비하면, 가끔 찾아와서 별달리 위해를 가하지 않고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크리스틴은 이제 반갑기까지 하다.

“말했듯이, 저는 후작님만 동의하면 차라리 당신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돌려 보내고 싶어요.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이런 일에 돈을 아끼는 곳이 아니고, 저로서도 그들을 완전히 척지기엔 부담되니까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하면서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후작님은 최소한 당신에게서 뽑아먹을 만한 걸 다 뽑았다고 여기기 전까진 결코 동의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여길게요. 저는 후작님이 분노한 나머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서 당신을 죽여 버리는 사태를 바라지 않아요.”

크리스틴의 말을 들은 할파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문만 죽어라고 당하다 신성 교국에 팔려가서 상상하기도 힘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야 다 포기하고 있었지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돌아간다면 그동안 쌓은 실적은 다 잃더라도 잘만 하면 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최악이라고 해도, 신성 교국에 끌려가는 것보다야 한결 나을 것이 분명했다.

할파스의 눈에 미약한 희망이 생겼고, 그걸 본 크리스틴은 특유의 깊고 탁한 검은 눈을 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더 좋은 소식을 가져올 수 있길 바랄게요.”

-

할파스, 고위 마족의 생명력과 끈기는 내 생각보다도 더 대단했다.

머리나 인간의 심장에 해당하는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어지간한 상처는 다 재생해버리는 것 같다.

그나마 마력 구속구 때문에 재생 능력도 크게 떨어졌으니 솔직히 고문 좀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근성 있었지.

결국 크리스틴과 상의 끝에 내가 채찍, 크리스틴이 당근 역을 맡고서야 좀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고도 교차 검증을 하는 데 시간은 걸렸지만, 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꽤 쓸모 있는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크리스틴과 함께 프랑지아 왕국 중부의 도시, 푸아티에로 향하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혁명군과 접촉하기 위해.

밖에서는 마차 안의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방음 처리되고 암막이 쳐진 마차 안에서, 우리는 마력등에 의존하여 서류들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크리스틴?”

“뭐가요?”

“동생을 데리고 가도 되는지.”

크리스틴은 이번 여행길에 이제 막 10살이 된 동생 루이스를 데려왔다.

“제가 그 나이 때엔 상단을 관리했어요. 그 애도 보고 배워야죠.”

크리스틴은 여상하게 답하지만, 그건 그녀라 가능했던 것 아닌가?

“어차피 그 아이 입장에선 제가 없는 저택에서 가신들 눈치 보고 있는 쪽이 더 힘들걸요.”

“그렇군요.”

나는 바로 수긍했다. 그녀는 역시나 안 그런 척 하면서, 동생에겐 꽤 무르다.

나는 다시 서류를 읽다가, 슬며시 헛웃음을 흘렸다.

“혁명군도 개판이군요.”

가장 열성적으로 외적에 맞선 용기와 자유를 부르짖어, 국민 의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브누아 레베리.

그의 측근들이 일부 귀족들과 그들의 사용인, 국왕군의 병사들, 그리고 혁명정부가 판단한 ‘반 혁명분자’들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팔아치웠고, 레베리는 그들이 바친 돈으로 미식과 향락을 즐기고 있단다.

레베리 본인이 그 돈의 출처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악마들이라면 치를 떠는 프랑지아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이런 일이 비단 레베리의 측근에게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공조할 생각을 하고 있던 온건파에서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닿은 자들은 드물지도 않으니까.

“...이 정보는 이번에 만날 니콜라 브리소를 통해 혁명군 온건파에 제공하려고 해요.”

우리에게 흥미를 보였다던 니콜라 브리소는 이미 우리와 간접적으로 몇 차례 접촉했다. 이번에는 직접 만나러 가는 중이고.

“이 정보를 사용하면, 그들이 영향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겠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에,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우려가 되네요. 레베리를 쳐서 급진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온건파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혁명 정부 내에서 급진파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요. 레베리가 축출된다고 해도 급진파가 영향력을 다 잃어버릴 거라 기대하긴 어려워요.”

말을 마친 크리스틴은 두 장의 서류를 들어 보였다.

“레베리를 대체할 만한 급진파의 인물은 두 사람이에요. 쟝 말로, 그리고 막 시밀리앙 이지도르.”

“둘 다 우리에겐 위험하죠.”

말로는 ‘인민의 벗’이란 신문을 통해 귀족과 왕당파들은 전부 인민의 적이니 몰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극도로 호전적인 인사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회귀 전 내 목을 자른 장본인이고.

차라리 레베리는 저 둘보단 온건한 축이지만, 레베리 정도의 거물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온건파의 영향력 강화가 어렵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와 혁명 정부의 협력도 쉽지 않겠지.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대책을 세워 볼게요.”

“...어떻게?”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그녀의 심연같이 검고 탁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 그녀가 답했다.

“그다지 기사도적이지는 않은 방법일 수도 있는데.”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크리스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하세요.”

답은 거의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살짝 미소 지었지만, 이내 그것을 지워버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는 좀 들어보고 싶네요.”

“뭘 말입니까?”

“아키텐 가문은 작위를 사들인 상인 출신이에요. 어차피 이득을 보기 위해 사들인 영지 따위, 더 많은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면 기꺼이 팔아치울 수 있어요. 어떤 의미로 보면, 소위 혁명군의 지도층이란 자들과 절반쯤은 겹쳐있다고 볼 수도 있죠.”

크리스틴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라파예트 후작가는 신흥 가문이라고 해도, 툴루즈백작이기도 한 당신의 봉신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듀몬트 남작과 가신들을 떠올렸다. 혁명 정부와 손을 잡기 위해 영지의 소유권을 넘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입에 거품을 물며 결사반대를 외치던 이들을.

“만일 제가 당신의 입장이었다면 차라리 루이 왕과 손을 잡을지언정, 저들과 손을 잡으려 들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 본인이 뛰어난 기사기도 하잖아요? 당신 한 사람은 능히 평민 백 명을 상대하겠죠. 그런데도 진정으로 저들, 평민들과 대등한 자리에 설 생각인가요?”

말을 마친 크리스틴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력을 사용하는 기사인 나와 그렇지 못한 평민들을 대등하게 여길 수 있는가?

“프랑지아 왕국의 명예로운 기사들은 그 강력한 힘으로 백성들을 지키며, 백성들은 기꺼이 주군에게 복종해야 한다.”

프랑지아 왕국에서 수백 년을 이어져 온 말.

다른 나라에서 봉건 제도가 사멸해가는 가운데서도 흔들릴지언정 그 제도가 이어지도록 만든, 기사가 평민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명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기사이지만 크리스틴, 당신처럼 재정을 관리하거나 정보를 다루는 일에 능숙하지 못합니다.”

마차 천장에 걸린 마력등이 마차의 덜컹거림에 따라 흔들리며, 그녀의 칠흑같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기사로서의 단련에 몰두하느라 서류 작업에 미숙한 귀족들을 교육받은 평민들이 돕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죠. 만약 능력에 따라 인간의 우열이 가려져야 한다면, 그 기준이 왜 무력이 되어야만 할까요? 심지어, 평민 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그 무력을 따라잡는 자가 있는데.”

다름 아닌 가스통이 이를 증명한다. 모든 인간은 마력을 보유한다.

기사들이 기본적으로 평민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가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를 충분히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만으로 평민 전체를 무력으로 압도할 수 있느냐? 글쎄. 내전 이전이어도 쉽지는 않았을 테고, 대부분의 기사가 전사해버린 지금은 가망이 없다.

프랑지아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기사를 지망하기에, 프랑지아 왕국 내 대부 분의 마법사는 귀족들에게 고용될지언정 평민 출신이다.

그러나 평민들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건, 재능이 있고 기회가 주어지면 기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귀족들이 허용하지 않을 뿐이지.

“그 대단한 기사들 대부분은 그들을 모시는 가신들만큼의 내치도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이 깔보는 상인만도 자산을 관리할 줄 모르고, 우수한 기사가 좋은 군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루이 왕이 아주 잘 보여주었죠. 결국 더 우월한 인간이라는 건 기득권층이 자기들 좋을 대로 내세운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대단한 무력을 가졌다는, 우월한 인간인 기사들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라파엘 발리앙에게 패배했다.

그렇게 치면, 우월한 인간보다 더 우월한 인간인 라파엘 발리앙이 귀족들보다도 지배층에 합당한 자여야 하나?

크리스틴은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작님의 생각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반대로 저들, 혁명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부유한 자들이 실권을 잡고, 귀족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기득권층의 교체에 불과하죠. 당장 우리가 저들과 함께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당신은 단 한 번도 흔들림이 없이 이 길을 가고 있어요.”

잠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상인 가문 출신인 저조차도 때때로 이게 맞는 길인지 의심스러워요. 완전한 귀족인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이 길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예언자라서?”

나는 크리스틴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사실 저도 저 혁명 정부에 대해 큰 확신은 없습니다.”

크리스틴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는 걸 보고, 나는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루이 왕과 손을 잡아 저 혁명을 저지하려 들었다면, 우리는 지지부진한 싸움 끝에 승리해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채 게르마니아 제국의 괴뢰국이 되어 지금보다도 더 비참한 구체제를 이어 나갔을 겁니다. 만약 패배하면, 제 사람들과 함께 저 혁명 정부의 분노 앞에 희생당했겠죠.”

적어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미래를 보았고, 이 왕국이 얼마나 타락하고 썩어 문드러진 나라인지를 안다.

“저 혁명은 피의 혁명입니다. 구체제 속에서 쌓인 평민들의 분노는 정당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들이 일으킨 사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겠죠. 저들은 분명히 문제가 많은 집단이고, 미숙하면서 폭주의 위험까지 안고 있습니다. 귀족의 몸이면서 저들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실패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회귀 후에 겪은 일들과 알아낸 진상은 확신을 더해주었다. 구체제를 유지한 채로, 이 나라에 밝은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숱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거머쥘 수 있을 지도 모를 가능성. 미숙하기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이들의 집단. 저는 거기에 제 모든 걸 걸었습니다.”

회귀 전 단순히 툴루즈 백작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따랐던 이들이 맞이했던 그 비참한 운명을 바꾸고 싶다.

“어쩌면 제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골랐을 뿐인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래도 최악보다 낫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그걸 위해 의심을 품는 이들을 설득하고, 도움을 청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군중들의 야유와 혐오와, 조소 속에 내 모든 인생이 무가치하게 부정당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니 저는 저들과 함께 할 겁니다. 귀족이 목숨처럼 여기는 영지를 팔아서라도, 이 손을 피로 더럽혀도, 어떤 고난을 거쳐서라도 구체제에 안주한 끝에 맞이했을 비참한 운명보다는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최소한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위대함만을 추구하던 아비보다는 나은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저는 확신에 차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틴. 그저 최악을 피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길을 가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의, 당신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크리스틴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슬며시 웃었다.

어쩐지 평소에 짓던 우아한 웃음과는 조금 거리가 먼, 그녀의 나이 대에 어울리는 웃음이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보고 있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피에르, 당신. 이제야 조금, 사람 같아 보이네요.”

“...그럼 그동안엔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음, 모든 걸 다 알고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마?”

크리스틴의 말에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그녀도 따라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봤더니 크리스틴이 미소 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는 악마가 아니라 피에르, 당신이란 사람에게.”

나도 마주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저도 잘 부탁드리죠. 이번에는 마녀가 아니라 크리스틴, 당신이란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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