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30화 (30/258)

혁명기 - 할파스

야심한 시각.

사용인들에게 이미 경고하여 비워진 복도에 발소리만이 울리고, 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방에서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로브를 입은 채 약간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후, 후작 각하?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에마뉘엘 시에예스?”

“그,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시에예스는 짐짓 무해하고 겁먹은 듯한 얼굴로 내 앞에 조아렸다.

이 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의심을 샀는지 전혀 알 수 없겠지.

애초에 이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부분이니까.

“수도 뤼미에르에서 아르노 리슐리외 주교를 모시고 있었다지?”

“그, 그렇습니다만, 그건 어떻게 아셨는지....”

“그리고 그를 도와 신분론이라는 책을 펴내고, 혁명군의 수뇌부가 조직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그제야 시에예스의 눈에 경계가 서렸다.

“각하, 무언가 오해가 있던 모양입니다. 제가 리슐리외 주교께 잠시 고용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불순한 세력과는....”

“그건 차차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혁명군 수뇌부와 연결된 자네가 이를 밝히지 않고 귀족가에 고용되었으니 구속되어도 할 말은 없겠지?

이제는 완전히 당황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시에예스의 앞에서 내가 족쇄를 꺼내 보였다.

“이건 죄수의 마력을 봉인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족쇄라네. 잠시 마력만 봉인 당하고 끝일 테고, 혐의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풀어주겠네.”

내가 단두대에 서기 전 감옥에서 찼던 족쇄와 같은 물건이다. 성능은 아주 확실하지. 기사도 저걸 차면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어지니까.

저자가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법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진짜 모습을 구경할 수 있을 테고.

“가, 각하. 송구하나 저는 아키텐 백작 각하의 가신입니다. 이곳이 라파예트의 저택이라고는 해도 확증도 없는 혐의만으로 이런 부당한 처사를 내리실 권한은-”

“라파예트 후작께 협조하도록, 시에예스.”

열심히 항변하던 시에예스의 고개가 휙 돌아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선 크리스틴에게로 닿았다.

“그대가 정말로 무고하다면, 고초를 겪게 한 부분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해줄테니.”

크리스틴이 말을 마치고, 내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대가 무고하지 않다면, 신분을 숨기고 숨어든 첩자에겐 무슨 처우를 내리든 정당하겠지.”

시에예스는 낙담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내가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비둘기가 우는 소리 같기도, 인간이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곧, 무수한 비둘기가 울부짖는 듯한 불협화음이 온 방을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윽...!”

크리스틴이 괴로운 얼굴로 귀를 틀어막는 순간, 시에예스의 몸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크리스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방 밖으로 몸을 내던졌고-

우리가 방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폭음이 들리며 무언가 시커먼 조각들이 방 밖으로 튀었다.

그것이 그자가 입고 있던 옷과, 인간의 살가죽이라는 건 조금 뒤에 깨달았다.

나는 크리스틴을 일으켜 세우며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후, 고마워요.”

“본색을 드러냈군요.”

그 순간, 턱-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깃털로 된 무언가가 방문을 잡았다.

그리고 이내, 기괴한 소음과 함께 억지로 방의 벽을 무너트려 버린 그것이 복도로 나왔다.

“감히, 인간 따위가...!”

시에예스, 아니 악마 할파스.

칠흑 같은 깃털로 뒤덮인, 뒤틀린 새의 형상이 세 쌍의 핏빛 눈동자를 빛내며 기괴한 음성을 낸다.

“불확정 요소,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그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자, 그 사이에서 수십 쌍의 핏빛 눈동자가 안광을 빛내고 있다.

“...하, 인간과의 공존 같은 소리 하네.”

모양새를 보아하니 피라미가 아니라 제법 고위 마족이었던 모양인데.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거대한 새 형상의 악마 할파스가 끔찍한 고함을 내지르자, 그의 날개 안에 매달려 있던 수십 마리의 검은 비둘기들이 복도 전역을 울리는 기괴한 합창을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검은 비둘기들이 핏빛의 안광을 빛내며 내 쪽으로 날아드는 광경에, 나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격해!”

동시에 양측 복도의 방에서 내 지시로 숨어있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저, 저게 뭐야!”

“헉, 괴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튀어나온 것이 무색하게 당황부터 했다.

이런, 제길.

“후작 각하!”

그래도 가스통은 다급하게 뛰어나오자마자 날아드는 비둘기들을 검으로 갈라버리며 날뛰었다.

나는 그나마 제정신인 그에게 소리쳤다.

“가스통, 아키텐 백작을 지켜라!”

내가 그렇게 외치자마자 나에게 비둘기가 날아 들어서, 검으로 그대로 갈라버렸다.

갈라버려도 검은 마력으로 흩어질 뿐, 할파스에게서 끝도 없이 생겨난 비둘기들은 계속 날아든다.

“으아악, 내 눈! 내 눈!”

“이 망할 새가!”

비둘기들이 한 기사의 눈을 파먹는 사이, 다른 기사가 그걸 갈라 버렸지만 마찬가지로 마력으로 흩어질 뿐이다.

“이대론 끝이 없다! 정신 차리고 본체를 쳐라!”

나도 바로 양손으로 검을 쥐고 한 발 내디뎠다.

좌에서 우로 대각선으로 검을 올려 베며 한 발.

다시 수평으로 그으며 또 한 발.

내 걸음에 맞춰 비둘기들이 두 동강 나고, 시커먼 마력이 흩어지며 눈앞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수직으로 내리그은 검이 비둘기들을 양단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검을 고쳐 잡자 눈앞에서 할파스가 안광을 번뜩이며 거대한 날개를 휘둘렀다.

“쯧-!”

나는 바로 허리를 숙이며 그것을 피하고 마력과 온 힘을 실어 검을 올려 베었다.

그러나 검은 할파스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마력 장벽에 막혀, 충격과 함께 도리어 내 몸이 밀려났다.

“큭...!”

나는 팔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충격을 억누르며 검을 고쳐 잡았다.

B급 마법사는 무슨 얼어 죽을!

대체 이 망할 악마는 마력이 얼마나 강한 거야!

“마족을 모방해 마력을 쓰는 인간 따위가 감히!”

할파스가 기괴하게 울리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나에게 돌진해 오고, 나는 그 와중에도 나를 물어뜯으러 달려드는 비둘기들을 정신없이 베며 물러나야 했다.

“하, 이런 젠장. 이딴 괴물을 어떻게 잡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에리스를 데려와야 했나?

명색이 왕녀인데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를 마족 제압에 데려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 잘못되었던 건가.

“크아아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는 할파스가 휘두른 거대한 날개를 마력을 끌어모으며 검으로 막아냈지만, 그대로 뒤로 죽 밀려나며 팔의 저릿함을 감당해야 했다.

“이야아- 컥!”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할파스는 등 뒤에서 달려들던 기사를 보지도 않고 날개로 강타하여 날려버리곤 살기를 가득 뿜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건 나 혼자선 안 된다.

판단은 빨랐다.

“크리스틴! 우선 여길 벗어나서 에리스를-”

내가 고개를 돌려 외치는 순간, 크리스틴은 양손으로 권총을 쥔 채 할파스를 겨누고 있었다.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 겁에 질리지 않은 건 고맙지만, 권총 따위로 뭘 하려고!

직후 크리스틴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예상대로 할파스는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족의 마력 방벽 앞에서 권총탄 따위-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할파스가 두르고 있던 마력 방벽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광경이 우리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아니- 컥! 크아아아악!”

마력 장벽을 찢고 할파스의 날개에 파고든 총탄이 하얀빛을 내며 악마의 날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저거, 설마?

“비장의 한 수로 가지고 있던 건데, 잘나신 마족도 돈지랄 앞엔 별거 없네요.

신성 교국에서 직수입한 축성탄입니다.”

“네 년이이이이!”

“하하! 돈 놀음의 악마들이 돈 놀음에 당한다라!”

그 아이러니에 웃음을 흘리며, 나도 바로 울부짖는 할파스에게로 뛰어들었다.

“인간 따위에게!”

할파스가 날개를 거세게 휘둘렀지만, 마력 방벽이 깨진 날개는 마력을 실은 내 검에 무력하게 절단되었다.

“끄아아-!”

비둘기와 다르게 절단된 날개에서 푸른색의 피가 뿜어져 나온다. 이놈들의 피는 진짜로 푸른색이군?

할파스는 그래도 괴성을 지르며 내가 날아드는 비둘기를 베는 사이 반대쪽의 불타는 날개를 휘둘렀지만, 이번엔 크리스틴을 지키다 뛰어나온 가스통이 그것을 잘라내 버렸다.

그쯤 되자 셀 수도 없이 생겨나 계속해서 날아들던 비둘기들의 기세가 확연히 주춤해졌다.

“흐아아압!”

그 틈에 나와 가스통이 동시에 달려들어 할파스의 몸통에 검을 박아 넣자, 할 파스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바르작거리는 할파스를 가스통이 검으로 찍어 누르는 사이, 나는 재빠르게 달려가 복도에 떨어져 있던 족쇄를 집어 들고 버둥거리는 할파스의 다리를 검으로 찍어 바닥에 박아버렸다.

끔찍한 짐승의 비명이 복도 전체를 울리는 와중에, 나는 바닥에 박혀버린 거대한 새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아, 아아- 아아악!”

할파스가 비명 지르고, 기괴하게 뒤틀려있던 거대한 새의 형상이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복도를 가득 메운 채 날아다니며, 기괴하게 울부짖던 비둘기들도 바닥에 떨어져 검은 연기로 화했다.

복도에 숨이 찬 기사들의 거친 숨소리만 울린 뒤, 양팔이 잘려나간 채 뿔이 난 마족의 형상이 된 할파스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나직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시발.”

나는 그 참혹한 모습을 내려다보며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이거 이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인간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지만, 글쎄요. 마족은 잘 모르겠네요. 상태를 봐선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이는데.”

방해되는 구두를 벗어 던진 건지 맨발에 머리는 산발이 된 크리스틴이 옆에 와서 한 마디 해서, 나는 슬며시 눈을 돌리며 지시했다.

“부상자들이 있으니 가서 에리스를 데려와. ...아키텐 백작을 도와줄 시녀도.”

“예, 옛!”

“크큭, 크크큭....”

지시를 받은 기사가 달려가자, 바닥에 멍하니 누워 있던 할파스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미쳐버린 건가?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는 알고 있나? 망한 왕국의 귀족 나부랭이들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적대한다니, 이것 참 참신하고 혁신적인 자살법이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키텐 백작님, 여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직원이 있나요?”

“글쎄요. 주군의 협조 명령을 거부하고 난동을 부리다 잡힌, 근본도 모를 첩자가 하나 있긴 하네요.”

나와 크리스틴이 주거니 받거니 하자, 할파스는 이를 갈았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글쎄. 그건 우리가 경솔하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첩자를 잡아 들였다고 떠들고 다닐 경우겠지. 내가 아는 마족들이라면 인간의 영역에서 불온한 활동을 하다 잡힌 멍청한 첩자가 자기네 소속임을 공인해서 쓸데없이 장사를 말아먹느니, 첩자 하나쯤 잘라내고 말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할파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는데, 반응을 보니 맞군?

이 악마 놈들, 자기네가 늘 우위에 있는 것이 당연해서인지 의외의 사태엔 제법 허술하단 말이지.

나는 할파스의 다리를 바닥에 박아둔 검을 뽑아냈다.

“끄아아악-!”

할파스가 비명을 지르고 다시 한번 푸른 피가 치솟는 광경을 보며, 나는 씩웃었다.

“그보다 넌 네 처지부터 걱정해야지, 악마. 지금부터 우리 미개한 인간님들이 잘나신 마족의 몸을 마음대로 실험해보며 머릿속에 든 걸 전부 토해내게 만들 텐데. 솔직히, 인간의 고문기술이 마족에게는 어느 정도로 유효할지 나도 좀 궁금해.”

“너무 거칠게 하지는 마세요, 후작님. 기왕이면 살려놔야 신성 교국에 비싸게 팔 수 있어요. 후작님을 돕느라 값비싼 축성탄을 썼으니, 그 정도는 만회하게 해주실 거라 믿어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틴의 얼굴이 쓸데없이 진지해서, 나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 물론입니다. 재수 없게 죽어버리면 아까우니, 심문 전에 문헌을 좀 찾아보죠.”

나와 크리스틴이 짐짓 사이좋게 나누는 대화를 듣던 할파스는 치를 떨며 한마디 했다.

“이... 악마보다 더한 인간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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