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9화 (29/258)

혁명기 - 꼬리밟기

혁명군과 국왕군의 격돌이 끝나고 완연한 봄이 피어난 시점에, 나는 라파예트에 우호적인 독립 영주들과의 회합을 열었다.

크리스틴의 아키텐 백작가, 에리스 덕분에 엮이게 된 앙쥬 백작가, 그리고 우리가 약탈을 막아준 것으로 엮여서 내전의 최후 결전에서 로렌 공작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 준 리오넬 백작가.

그러나 내가 들고 나온 안건에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후작, 지난 국왕군과의 결전에서 저 반란군이 생각보다 훨씬 선전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평민들의 반란군과 손을 잡을 생각이라니, 제정신입니까?”

리오넬 백작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주변 국가들은 저 반란군을 위협으로 보고 있고, 루이 왕의 도움 요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 전쟁에서 프랑지아에 패했던 게르마니아 제국이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잖습니까.”

“백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루이 왕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입니다. 저들의 정부도 외국의 개입 가능성을 보고 위기를 느끼고 있으니, 지금은 우리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여길 겁니다. 적의 적과 손을 잡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평민들의 반란군이라니. 무엇보다 저자들은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후작도 아닐 텐데.”

봉건제도의 폐지. 사실상 혁명이 번진 지역에서 귀족들의 자산을 압류하고 그것을 지지기반인 부르주아지들에게 분배해 주기 위한 조치이자, 민심을 얻기 위한 가장 강력한 명분.

기실 봉건제도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프랑지아 왕국에만 남아있는, 결국 언젠가 사라지고 말 제도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저들과 협력을 이루려면, 아마도 우리 영지의 소유권은 저들에게 넘겨야 하겠지요.”

“허. 지금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영지를 저 평민 무지렁이들에게 넘기자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나 귀족 영주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아니겠지.

“조금 편하게 생각한다면, 영지의 소유권을 넘기는 대신 그만한 대가를 받아오면 됩니다. 조세권은 물론이고, 영지나 작위의 매매는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크리스틴의 가문이 유서 깊은 옛 명문 귀족 아키텐의 모든 것을 사들여서 생긴 신진 귀족이다.

“...후작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만, 나는 귀족들을 마구잡이로 죽여 대는 저 위험한 반란군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습니다. 내 선조로부터 이어받아온 리오넬의 땅을 포기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말을 마친 리오넬 백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리오넬 백작가에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파예트도 무탈하기를 빌지요.”

말을 마친 리오넬 백작은 그대로 성큼성큼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장남 질 드 리오넬은 머쓱해하며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행운을 빕니다, 후작님.”

“리오넬이 주었던 도움에는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상황이 변하여 생각이 바뀐다면 도울 의향도 있으니,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고마운 말씀, 기억해두겠습니다.”

질은 나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나마 장남은 조금이나마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가 잘 설득해준다면 좋으련만.

리오넬의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느긋하게 앉아 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앙쥬 백작이 입을 열었다.

“끌끌, 안건이 너무 파격적이군.”

“앙쥬 백작님께서도 부정적입니까?”

“흠....”

앙쥬 백작은 대답하는 대신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는 찬성입니다. 아키텐은 원래부터 영지보다는 상단이 주 수입원이었고....”

조금 뜸을 들인 크리스틴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브르타뉴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지아 북부 상권에 뻗어 나갈 기회인데, 다소 위험하더라도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죠.”

“아키텐이 뜻을 함께해 준다니 고맙군요.”

크리스틴에게 감사를 표한 내가 다시 앙쥬 백작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턱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과연, 젊은 신흥 영주들의 생각은 따라가기 힘들구려. 헌데, 실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 물어도 좋소?”

“말씀하시죠, 백작님.”

“두 사람,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가?”

“예?”

여기서 그 질문이 왜 나와?

“약혼이 파기되긴 했다지만 그건 선대 아키텐 백작이 결정한 일이고, 그 뒤로도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이 늙은이는 아들놈의 배필로 아키텐의 백작님이 굉장히 탐이 나는데, 두 사람이 이미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관계라면 눈치 없이 끼어들 순 없거든.”

말을 마친 앙쥬 백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크리스틴으로 향했고, 그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미소 지으며 답했다.

“후작님이나 저나, 이제 겨우 20세가 되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시기에 굳이 급하게 혼담을 논할 필요가 없겠죠.”

“으하하,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확답도 하지 않으시겠다?”

“벌써부터 자신의 가치를 낮출 필요가 있나요?”

크리스틴이 짐짓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앙쥬 백작은 입맛을 다셨다.

“거 쉽지 않은 레이디구려. 뭐, 좋소. 나 같은 늙은이로서는 영 충격적인 내용이지만, 내 아들놈들은 가능하면 그대들과의 공조를 이어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하더군. 그러니 우선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쪽으로 해두지.”

말을 마친 앙쥬 백작은 습관인 듯 턱수염을 다시 쓰다듬더니 덧붙였다.

“어쨌든 후작과 엮인 뒤부터 우리 영지가 제법 운이 좋다고 느끼는 일이 잦은 건 사실이니까 말이오. 역병도 진정되었고, 아키텐 상단이 오가며 제법 돈도 만지고 있으니. 저 반란...아니 혁명 정부에서 괜찮은 조건을 받아올 수만 있다면야.”

“그러시다면, 앙쥬 가문에서도 만족할만한 조건을 받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급한 건 저쪽이니까요.”

“벌써부터 정평이 난 수완의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의 백작이시니, 기대하겠소.

리오넬의 이탈은 아쉬워도 라파예트와 아키텐, 앙쥬만 있어도 왕국 남부를 아우르는 세력이다.

혁명이 일찍 터지기도 했지만, 국왕의 세력이 너무 빨리 무너진 탓에 도리어 외세의 개입이 빨라졌다.

원래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태세를 정비한 뒤에 외세의 침략을 맞이했을 혁명 정부지만, 급속도로 혁명을 퍼트리고 빠르게 라파엘 발리앙을 기용해서 대승을 거둔 것이 도리어 역효과로 작용한 셈이지.

혁명정부도 위기감을 느끼고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일 테니, 이제는 우리가 움직일 때다.

-

회합이 끝나고 난 뒤, 석양이 저물어가는 시간.

나는 크리스틴과 마주 앉아 그녀가 넘겨준 보고서들을 보고 있었다.

라파엘 발리앙은 내전이 한창인 북부 도시들을 전전하며 약탈을 방어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맡다가, 최근 혁명 정부의 주요 인사중 하나인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에게 본인이 직접 접촉하여 혁명군에 기용되었다고 한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라면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종용하던 원고이자 단두대 학살마로 악명을 떨친 작자인데, 왜 하고많은 자 중에 그 자인지.

내전이 한창이던 북부, 그것도 전선 도시들을 전전했다니 아키텐 상단이 찾지 못한 것까진 그렇다 치겠는데, 뜬금없이 라파엘 발리앙이 혁명군에 기용되어 국왕군을 사정없이 깨부순 건 나로서도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라파엘 발리앙이 혁명군의 군대를 이끌기 시작한 시점은 이보다 훨씬 뒤였다. 저쪽은 또 왜 일찍 등장해서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상황이 변했으니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이제 와선 정말로 내가 아는 미래지식들의 효용성이 떨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보고서는 다른 쪽이었다. 이미 크리스틴에게 전서구를 받기도 했지만, 아직은 심증 단계인데....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크리스틴의 빨아들일 것처럼 깊고 탁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에마뉘엘 시에예스, 시에예스라.”

이 시에예스라는 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의심을 샀는지 전혀 알 수 없겠지. 그러니 신분을 다시 세탁하는 대신, 이용하기 편리한 B급 마법사 신분을 그대로 썼을 거다.

우리는 혁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남부의 영주다.

원래라면 터지기도 전인 혁명군의 수뇌부나 신분론 같은 책의 출처 같은 것에 미리부터 관심을 가지고 조사할 이유가 없다.

하물며, 신분론의 출간일자가 회귀 전보다 앞당겨졌다는 점 따위에서 의문을 품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신분론을 펴낸 자가 뤼미에르의 주교 아르노 리슐리외고, 시에예스가 그 책을 펴내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자가 혁명이 터지고 얼마 안 있어 아키텐의 가신이 되고자 청했다? 수상하다 못해 냄새가 풀풀 풍긴다.

혁명군의 첩자인가?

하지만 우리는 혁명 정부를 적대하기는커녕 도시 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왔다.

혁명 직후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혁명군이 주적도 아닌 우리에게 벌써 첩자를 파견했다고?

내가 고민에 잠겨있자, 크리스틴이 다소 뜬금없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후작님.”

“예?”

“방금 전 앙쥬 백작님이 한 말에, 제가 마음대로 대답한 거요.”

“아, 그거 말입니까.”

크리스틴은 앙쥬 백작에게 여지를 두는 것처럼 말했지만, 본인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었지.

남편이 생기면 그녀의 동생을 살려둘 리가 없으니.

“저는 당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크리스틴.”

혼담 문제로 피곤한 건 그녀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서 내게 수시로 혼담을 들이밀며 제발 결혼 좀 하라고 보채고 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마주 앉은 크리스틴의 검고 이지적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약혼이 파기된 이상 나와 그녀는 공식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그녀 덕분에 어지간한 귀족 영애는 눈에 차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게 잠시 마주 보고 있자, 크리스틴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일, 우리-”

그때 창가에서 톡톡- 하는 노크를 닮은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하고 봤더니, 새카만 깃털에 붉은 눈동자를 가져 마치 까마귀처럼 보이는 비둘기가 창밖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다.

내가 창문을 열자, 비둘기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입을 열어, 기괴한 느낌의 음성을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아키텐 백작 각하. 저는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프라이드’ 사 소속의 할파스라고 합니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틴도 이런 건 처음 보는 듯 다소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새는 제 사역마로, 본체는 아닙니다. 부득이하게 간접적으로 인사드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는 지극히 정중하게 말하고 있으나, 나는 지금 막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그 새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용서하기 싫다면?”

내가 검을 뽑으며 말하자, 새는 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것은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나, 저는 ‘프라이드’ 사를 대표하여 두 분 영주께 유리한 제안을 드리고자-”

“제안이 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하도록.”

비둘기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검에 목이 잘렸다.

잘려나간 목에서 피 대신 시커먼 마력이 새어 나오고, 비둘기는 그대로 천천히 가루로 바스러져 흩어져 버렸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

“네, 피에르.”

“‘슬로스’사의 대표이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아직은 원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했죠?”

“맞아요.”

크리스틴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게 받아 나에게 건네주었던 수정구,

거기서 파이몬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와 직접 대화할 수 없어 굉장히 유감이라고.

“제가 본 바로, 그런 수단이 있다면 그자는 바로 시도했을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도 그래요.”

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도 호기심으로 가득 차, 나를 만날 날만을 고대하겠다던 악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하자 크리스틴도 선뜻 동의했다.

신분론의 출간일자가 회귀 전보다 앞당겨졌다.

그 시점에 내가 한 행동 중 외부에 영향을 줄만한 부분이라곤 내가 산업혁명에 대비해 이득을 챙겨 군비를 조달했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그에 흥미를 가졌다는 점 외엔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 신분론의 출간에 크게 관여한 자가 내 영지에 와 있는데, 악마의 사역마가 나타났다?

“이번 상행에 그자 외에 최근 합류한 자가 있나요?”

“아니요, 그자 외에는 전부 라파예트로의 상행에 평소 따르던 자들만 데려왔어요. 그게 아니면 간자 확인이 안 되니까.”

여상하게 말하는 크리스틴에게, 나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당신도 그 정도는 감시하고 있겠죠, 피에르?”

“물론입니다. 혁명이 터진 이후, 영지에 드나드는 자들의 신원은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악마들이 기만을 위해 있는 수단을 숨겼을 가능성은?”

“몇 달 전에 우리에게 접촉한 자가 이런 일을 예견하고 있는 패를 숨겼다....

그런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한 집단이라면 우리가 뭘 해도 당해낼 수 없겠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꼬리를 밟을 일도 없고?”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지 아닌지는 뽑아봐야 알겠지만, 난 하고 싶습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신분을 숨기고 첩자로 숨어든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처분해도 저들에게 할 말이 없을 테니. 당신은?”

크리스틴을 보며 묻자, 그녀도 진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좀 궁금하네요. 악마들은 자기들이 당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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