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8화 (28/258)

혁명기 - 누구나 계획이 있다

뤼미에르 남동쪽의 평야지대.

하늘에서 봄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어 풍성한 보리밭을 비추고 있지만, 그 땅에 펼쳐진 광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혁명군이 국민개병제로 급하게 징집한 10,000의 혁명군과 오를레앙 공작, 그리고 로렌 공작이 지휘하는 8,000의 국왕군이 평야를 뒤덮은 채 서로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양군의 대포가 연달아 포성을 터트리고, 강철의 포탄이 서로의 진영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양측이 입은 타격은 크게 달랐다.

“으아악!”

“대, 대포가!”

혁명군의 포병이 쏜 탄들은 위협적인 명중률로 전열의 병력을 타격했고, 와중에 대포 1문이 포탄에 맞아 통째로 박살 나면서 파편이 무자비하게 주변에 있던 포병들을 덮쳤다.

그러나 국왕군이 쏜 포탄은 너무 가깝게 떨어지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혁명군을 제대로 타격하지도 못했다.

로렌 공작은 그 광경을 보며 이를 갈았다.

“에잇, 같은 대포를 쏘는데 왜 이리도 한심하단 말이더냐! 내 친히 네놈들의 경을 쳐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소, 송구합니다, 공작 각하. 아직은 병사들의 숙련도 문제가....”

“한심한 놈들 같으니!”

로렌 공작이 답답해하며 역정을 내는 동안, 혁명군의 진영에서 망원경으로 포격에 강타당하는 적진을 들여다보고 있던 발리앙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라파예트 후작의 활약을 주워듣고 대포를 끌고 나오긴 한 모양인데, 저 양반들 탄도학이란 걸 배워본 적은 있나 몰라. 이쪽 포병들은 내가 도시들을 전전해 다닐 때 직접 가르친 친구들이라고?”

“대포를 공성병기로만 취급하던 귀족들이 뭘 알겠습니까. 거대한 성벽이야 대충 쏴도 맞겠지만, 원거리 포격전을 벌일 정도의 포병을 순식간에 양성할 수는 없겠지요. 돈만 있으면 쉽고 편하게 고용할 수 있는 마법사를 쓰면 썼지.”

“그렇지? 그래서 신기하단 말이야. 라파예트 후작이란 사람,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데....”

발리앙은 망원경을 슬며시 내리며 덧붙였다.

“애초에 이 나라는 잘나신 기사 나리들 때문에 교리가 지나치게 낡아빠졌어.

당장 저 동쪽에는 신식 교리로 게르마니아 황제의 군대를 깨부수고 대왕이라 불리게 된 남자가 있는데 말이야. 그걸 보고 배우지는 못할망정.”

“전투 중에 그렇게 사심 드러내지 마시죠, 장군.”

“으하핫, 그 대왕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남자니까. 아, 그보다 다시 한번 불러주겠나?”

발리앙의 말을 들은 부관은 꽤나 질색이라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직급을 다시 불러주었다.

“아, 예. 장군님. 집중하십쇼.”

“장군, 장군 좋지. 하하하....”

발리앙은 반대편에서 접근 중인 국왕의 군세를 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기왕이면 많이 먹어치우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발리앙은 적의 양익으로 움직이는 기병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아무래도 잘나신 기사 나리들이 인내심이 다하신 모양이야. 오를레앙공작과 로렌 공작의 깃발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브르타뉴 공작 꼴 나긴 싫은가 보군.”

“모렐 부대에게 명령을 하달할까요, 장군?”

“눈치 빨라서 좋군. 자네 이름이 뭔가, 부관?”

“베르테르입니다. 알렉상드르 베르테르.”

“좋아, 베르테르. 내가 출세하면 자네를 내 참모로 중히 쓰겠어.”

“일단 이기고 얘기하시죠, 장군.”

“아하하하! 자네 마음에 들어!”

-

군사들이 진군하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은 좌익으로 향하는 그의 기사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국왕이 그의 기사들 상당수를 빌려 갔다가 청기사에게 바친 탓에, 기사와 중무장 기병들은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전력이다.

그런 반면, 우익으로 향하는 로렌 공작의 기사와 기병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병력보다 훨씬 많다.

오를레앙 공작은 혀를 차며 적진을 내려다보았다.

적의 병력이 이쪽보다 많기는 하지만, 정예도에서는 이쪽이 압도적인 우위에서 있다.

그나마 내전 중 귀족들의 약탈을 방어하기 위해 도시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민병대는 나름대로 정규 훈련을 받고 제대로 된 장비로 무장한 자들이지만, 그런 자들은 적 병력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기껏해야 저 반역자들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급하게 징병하여 훈련조금 시킨 뒤, 낡은 화승총이나 창을 들려서 내보낸 징집병에 불과하다.

적어도 오를레앙 공작은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 공작은 고심하다가 다시 지시했다.

“기사와 기병들에게 우선 대기하라고 해.”

“예? 하오나 각하, 좌익과 우익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작전이었을 텐데요.”

“그대는 저 로렌 공작의 충성심을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 섣불리 우리 기사와 기병들을 허비했다가, 로렌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누가 국왕 폐하를 보필하겠나?”

“아, 알겠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으로 싸웠던 자들이 그저 이해의 일치로 맺은 연합은 중대한 전투에서조차 그들의 결속을 삐걱이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뿔피리가 울려 퍼진 순간 로렌 공작의 기사와 기병들만이 측면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겨울에 파종되어 한껏 자라고 있는 보리밭 옆의 평야지대를 질주하고 있을 때, 총성이 울렸다.

“크악!”

“매복이다! 자신을 보호하라!”

명령이 떨어졌지만 기사들이 마력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전면 정도다.

보리밭 곳곳에 산개한 채 매복해 있던 경보병들이 일어나 사방에서 총을 쏴대자 여기저기서 총에 맞고 낙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 쥐새끼들 같으니!”

격분한 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보리밭으로 뛰어들자, 열심히 총을 쏘던 경보병은 그대로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죽여주마!”

기사는 기세를 높여 그를 뒤따르다, 그대로 강력한 충격을 느끼며 낙마하여 목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쪼, 쫓지 마라! 놈들이 보리밭에 함정을 파 두었다!”

보리밭 밑에 말뚝을 박고, 그 사이에 팽팽하게 묶인 로프는 기사는 몰라도 말은 확실하게 넘어트릴 수 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이 일부러 우리가 보리밭으로 유도되게 진형을 짠 거야!”

온갖 곳에 설치된 함정과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총질에 기사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적의 기병들까지 달려들기 시작했다.

“보리밭으로 뛰어들지 마라! 적들의 기병을 상대하라!”

그래도 프랑지아의 기사와 중기병들이 용맹함을 발휘하며 돌진하기 시작했으나, 달려들던 기병들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며 총신이 짧은 총을 들고 쏴대기 시작했다.

“저, 저 비열한 놈들...크억!”

기사와 기병들이 도망치는 적 기병을 추격하려고 하자, 보리밭에서 뛰어나온 경보병들이 그들의 등 뒤에 대고 총질을 해대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오를레앙 공작 그 개자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사방이 적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젠장, 쫓아, 쫓으란, 으아악!”

왕국군의 지휘관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마법사들을 윽박질러도 보고 궁수들로 사격 지원이라도 해보았지만, 밀집대형도 아니고 보리밭에 숨은 채 산개해있는 자들에겐 큰 효과가 없었다.

결국 로렌 공작의 기사들이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광경을 본 오를레앙 공작은 그들을 돕기 위해 기사와 기병들을 급파하는 대신, 전력을 온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하, 하하하! 이거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서 돌격만 해오는 바보들을 상대하려니,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나올 지경인데!”

혁명군의 기병대를 이끄는 제롬 모렐은 왕국군의 용맹한 기사들이 그들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새도 없이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전투 앞에 개죽음 당하는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공격, 공격하라!”

왕국군 최후의 희망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중앙의 보병대였다.

“조준- 발사!”

그러나 길게 횡대로 늘어선 혁명군 전열보병들의 신형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자, 돌격하려던 중보병들의 사슬 갑옷 따위는 우습게 꿰뚫려 버렸다.

차라리 마법사들을 중앙의 힘 싸움에 투입했다면 어느 정도 막았겠지만, 보병들보다 기사를 훨씬 중요시하는 귀족들이 헛된 곳에 마법사들을 투입한 사이 일제사격의 막강한 화력은 그대로 국왕군을 강타했다.

일제사격의 총성이 전장을 뒤흔들고 적진으로 달려들다가 수백 단위의 동료들이 픽픽 쓰러지자, 귀족들의 기대와 달리 긴 내전으로 지친 국왕군의 병사들은 바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돌격하라! 저놈들은 한낱 민병대에 불과하단 말이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들은 나에게 죽는다!”

하사관과 귀족 지휘관들의 윽박에 마지못해 다시 돌격하려는데, 혁명군 쪽에서 먼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군!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다!”

출정 전 레베리 총재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젊은 지휘관이 검을 들며 외친 말에, 혁명군 전체가 호응했다.

“용기를 품어라! 여기서 물러나면 저들은 우리와 가족을 다시 노예로 만들 것이다! 자유를 위해!”

“자, 자유를 위해!”

“전원 착검! 지금이 바로 공격할 때다! 혁명 만세!”

“혁명 만세! 와아아아!”

징병되었다고는 해도, 그 긴 압제 끝에 해방을 맛본 자들에게 자유와 용기를 노래하며 돌격을 명하자 그건 그대로 기세가 되었다.

믿었던 기사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무너졌고, 왕국군은 이미 일제사격으로 흔들린 뒤였다.

수적으로 우세하기만 할 뿐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도리어 기세를 드높이며 돌격해오자, 왕국군은 동요 끝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저 친구 이름이 뭔가?”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보던 발리앙이 묻자, 베르테르는 작전배치도를 휙휙 넘기더니 답했다.

“니콜라 네라는 친구입니다.”

발리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사들을 가지고 놀던 제롬의 기병대가 검을 뽑아들고 패주하는 적병들을 추격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끝났군. 시시한데, 좀 더 제대로 된 적은 없나?”

-

어두워진 밤의 아키텐 백작령.

한때 뤼미에르에서 리슐리외 주교 옆에 머물던 남자, 시에예스는 여관방에서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밤만큼이나 칠흑과 같은 깃털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비둘기가 그의 팔로 날아들어-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의 ‘전서구’를 회수한 시에예스, 할파스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긍지 높은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사의 일원인 그는 최근 운이 영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루이 왕에게 추가 대출을 제공하며 그를 충동질하여, 불확정 요소인 라파예트를 치자는 안건에 ‘슬로스’사의 대표이사가 반대했었다는 소식은 그도 전해 들었다.

7인의 대표이사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방침을 결정하는 대표이사 회의에서 소수의견이 나오는 경우 자체는 그렇게 드물지 않다.

그러나 소수의견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던 경우는 흔하지 않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7개 기업은 일단 방침이 결정되면 철저한 상호 공조를 통해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것을 규정으로 정해두었다.

각 회사의 담당업무에 대한 월권, 방해는 결코 허용되지 않으며, 이를 대외전략과 내부관리를 하는 ‘프라이드’사가 감시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회사가 찬성한 안건이 실패해버리는 경우는 그만큼 드문 것이다.

그러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예상과 달리 루이왕은 라파예트에게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도 모자라 추가 손실을 피하기 위해 루이 왕에게 대출 잔액의 상환을 강요했더니, 그들의 의도보다 훨씬 빠르게 혁명이 터져버렸다.

덕분에 원래라면 브르타뉴 항구로 이동하여 귀국할 예정이었던 할파스는 브르타뉴 전역이 혁명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을 금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왕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거래에 격노한 프랑지아인들은 브르타뉴지역 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자산을 파괴하고 상선까지 약탈했다고 한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으로서는 극히 드문, 뼈아픈 실책이다.

특히나 ‘프라이드’사의 프랑지아 잠입요원으로서 사업들을 총괄해온 할파스로서는 등골이 서늘했다.

“이 미개한 인간 놈들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이해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인간들을 불사르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한때 중앙대륙의 공적이었던 마왕의 왕국 판데모니움이 무너진 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인간과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모토를 세우고 저들의 적개심을 희석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 년이다.

그렇게 적개심을 희석시킨 뒤 중앙대륙, 신대륙, 구대륙을 잇는 독점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눈부시게 진보해온 어비스 코퍼레이션으로서는 쓸데없는 무력행사로 그들의 사업을 망칠 이유가 없다.

미개한 인간들을 협박할 때야 전쟁위협도 불사한다지만, 실제로 전쟁안건이 대표이사 회의에 올라가면 만장일치로 기각될 것이 뻔하다.

별수 없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오가는 상단을 운영하는 아키텐으로 왔으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분이 꽤 컸던 브르타뉴와 달리 아키텐의 상단은 감시가 엄중하다.

밀항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자칫하다 발각당하면 일이 피곤해지고 무엇보다 긍지 높은 마족인 할파스로서는 인간들 몰래 비좁은 배에 비참하게 숨어드는 것 자체가 싫다.

게다가, 지금 빈손으로 귀국해서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를 만나도 좋을 것이 없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규정상 서로에 대한 적대행위는 하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부 감시자여서 다른 회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프라이드’사의 체면을 구긴 그는 영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할 거다.

“흥, 또 한 건 만들면 되는 거지. 그래 봐야 인간들. 우리가 움직이는 체스말에 불과한 미물들이니.”

결국 프랑지아의 사회에 숨어들어 씨앗을 뿌리는 것은 그의 전문이니, 할파스는 뭐라도 성과를 챙겨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할파스는 아키텐의 백작저를 방문했다.

아키텐의 상선에 밀항하는 자존심 상하고 위험한 일을 벌이느니, 아예 아키텐상단의 일원이 되면 간단하다.

마침 최근 불확정 요소로 대두된 라파예트의 동맹이기도 하니, 밑 작업을 해둬서 나쁠 것이 없다.

잠시의 기다림 끝에, 그는 아키텐의 젊은 백작과 대면할 수 있었다.

“아키텐의 고귀한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마법사, 에마뉘엘 시에예스라고 합니다.”

크리스틴 다키텐은 턱을 괴고 의자에 앉아, 그가 제출한 B급 마법사용 신분증명서에 검증용 마도구를 가져다 대보더니 입을 열었다.

“신분증은 확실하네. 마법사로서 아키텐 가문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기묘할 정도로 탁하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그를 예리하게 훑었지만, 그래봐야 어린 인간 여자다.

할파스는 여유를 가지고 크리스틴을 대했다.

“전에는 어디서 일했지?”

“뤼미에르에 있었습니다, 각하. 하지만 아시다시피, 현재 불온한 사태가 발생하여 남부로 몸을 피한지라....”

“그래, 힘들었겠네. 하지만 왜 아키텐이지? 우리는 군사력이 강한 가문도 아니고, B급이면 대우받을 만한 마법사인데 더 나은 곳도 있지 않나?”

크리스틴의 물음에, 할파스는 허허롭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재 프랑지아 왕국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곳은 조금 꺼려지는지라....”

“아하. 그래서 덜 위험하고 봉급 밀릴 걱정도 없으면서 마법사가 귀할, 이곳에 왔다?”

“그렇습니다, 각하.”

크리스틴은 할파스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좋아. 요구한 봉급도 싸진 않지만 과하진 않고,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이네.

아키텐에 온 것을 환영할게, 마법사 시에예스. 시종장에게 말하면 숙소를 마련해 줄 거야. 마침 내일 호위가 필요했는데, 잘 되었네.”

“호위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파예트 후작령으로 가는 상단을 내가 인솔할 예정이거든. 별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봉급 값은 해야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각하.”

할파스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계획이 약간 틀어지긴 했지만, 역시나 기회가 오지 않는가.

할파스, 그에겐 언제나 계획이 있었다.

가뜩이나 불확정 요소로서 주목받고 있는 라파예트에 적절한 씨앗을 뿌린다면 그도 대표이사에게 할 말이 생긴다.

그렇게 할파스가 즐거운 계획을 세우며 물러간 뒤.

홀로 집무실에 남은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법사 신분증은 기본적으로 왕국에서 발행하기에 확실하고도 편리한 신분증명이 되고, B급 정도면 왕국 최고는 아니어도 어디 가나 대우받을 만한 마법사다.

그러니 대충 위조해낼 수 있을 만한 신분은 아니고, 지나치게 주목받아 그 신분에 구속되는 A급 마법사와 달리 편하게 활동하기에 딱 좋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어둔 책을 꺼내 들었다.

신분론.

원래라면 귀족들은 흥미조차 보일 일 없거나 혐오할 책의 책장을 익숙한 손길로 슥슥 넘기던 크리스틴은 이내 편지를 쓴 후, 전서구의 발에 묶어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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