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와일드 카드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
그 말을 들은 에리스는 특유의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만약, 이 나라를 위해 왕위에 오르셔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러시겠습니까?”
“...제가 성난 혁명군에게 죽기를 바라시나요, 후작?”
너무나 서슴없이 나온 답에, 과연 이 마냥 해맑아 보이는 음유시인 성녀님은 의외로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다만 신하 된 자로서, 만약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왕녀 전하께 그럴 각오가 있으신지 여쭈어 본겁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대혼란의 시대고 실권도 없을 왕좌라는 건 그렇게 탐날 만한 자리가 아닐 테니까요.”
“...당신은 지금 일어난 혁명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행동하셨죠. 설명을 요구해요, 후작. 저로서는 왕정을 부정하는 혁명이 일어난 이 나라를 위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후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루이 왕은 저들을 진압하지 못할 겁니다.”
루이 왕과 로렌 공작이야 아직 현실을 모르고 저들끼리 손을 잡으면 혁명을 막을 수 있다고 믿겠지만, 혁명의 전개가 회귀 전보다도 훨씬 빠르다.
그때는 루이 왕과 우리의 군사력이 엇비슷했고, 전세도 지지부진해서 혁명의 발생 자체가 늦었고 번져나가는 것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와 청기사의 존재로 인해 루이 왕이 무리하게 일으킨 군세를 상당히 잃었고, 그만큼 각 영지들의 방비는 회귀 전보다도 허술했다.
당장 나에게 당한 브르타뉴 공작이나 미르보 백작도 회귀 전에는 각자의 영지를 꽤 긴 시간 사수하며 혁명군에 저항하다가, 라파엘 발리앙이 본격적으로 혁명군을 이끌면서 무너졌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혁명군이 프랑지아 전역에서 승기를 잡아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자국 내의 힘만으로 혁명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루이 왕은 외국에 도움을 청할 겁니다.”
“...1왕녀 전하께서 황후로 계신 게르마니아 제국과, 2왕녀 전하가 왕비로 계신 노던 연합 왕국이겠네요.”
“맞습니다. 저들은 혁명군이 장악할 프랑지아를 다시 정당한 왕국으로 돌려놓겠다는 명분으로 이 땅을 침공할 겁니다. 물론 표면적인 명분은 그렇고, 그 김에 프랑지아를 아주 재기불능으로 밟아두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겠죠.”
실제로 혁명군은 루이왕을 끝내 붙잡아 처형했으나 외국들, 특히 게르마니아제국은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고 1왕녀를 왕위에 올리겠다며 프랑지아를 연일위협하고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내가 처형당해서 그 이상의 미래는 알지 못하지만, 정황상 혁명 이후 프랑지 아의 미래도 결코 밝지만은 않았겠지.
나는 에리스가 듣고 싶지 않을 말을 고했다.
“내전과 혁명이 끝이 아닙니다, 전하. 혁명군이 루이왕을 처리한다고 해도 프랑지아가 주변국 지도자들에게 체제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저들은 우리가 파멸하는 순간까지 우리를 위협할 겁니다.”
“...그래서, 저를 확보해두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전하. 저들이 정당한 왕위를 되찾아주겠다는 명분으로 우리를 침공하려 드는 순간, 긴 내전으로 피폐해진 혁명군에게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민심의 지지를 받는 왕족을 왕위에 올리자고 제안하기 위해서요.”
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녀에게 귀족으로서의 예를 갖춰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에리스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사기꾼.”
“일단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약속도 다 지켰습니다, 전하.”
“거짓말만 하지 않았잖아요. 제가 왕녀라는 것도 애초부터 알고 접근한 거고, 혁명이 일어날 것도 다 알고 있었고, 심지어 왕국이 한 번은 무너진다는 것까지 확신하고, 전쟁까지? 대체 당신 정체가 뭐에요?”
나는 에리스의 볼멘소리를 듣고 쓴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네 선택이야, 에리스. 강요할 생각은 없어.”
“여태까지 말해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아니, 정말로. 나는 네가 여왕으로 즉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할 거라고 말할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거든.”
혁명정부가 그녀를 여왕으로 옹립하여 명목상으로나마 군주로 삼는다면 귀족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유화적이 될 테고, 혁명 정부에 거부감을 가진 귀족들을 규합하는 것도 용이하게 되겠지.
하지만 역으로, 섣불리 잘못 건드렸다가 회귀 전처럼 죄 없는 에리스가 단두대로 보내질 위험도 없지 않다.
에리스를 여왕으로 옹립하면 외국이 프랑지아의 왕위에 간섭할 명분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저들이 시민 정부에 추대된 서출 여왕의 정통성을 걸고 넘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황제가 선출직이어서 다른 선제후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게르마니아 제국이니 최소한 시간벌이는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전쟁을 회피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네가 내 후원을 받는 성녀로 남아있기만 해도 나에겐 충분한 도움이 돼. 그러면 너도 네가 좋아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활하며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테고.”
“...전 성녀 같은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지. 그러니 충분히 고민해봐, 내가 후원하는 예술가님.”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자, 등 뒤에서 에리스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제가 그렇게 자유를 희생하고 위험부담을 지면 그게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도움 되기는 할까요?”
“네가 그럴 각오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돕지.”
“그럼 할게요. 제가 그렇게 해서, 이 나라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등을 돌리자, 에리스는 지극히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하게 그 안까지 들여다보이는 보라색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왜?”
-부탁이에요, 소후작님. 저는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외면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지금 이곳에 있어요.
예전 에리스가 내게 했던, 애원에 가까운 말이 뇌리를 스쳤다.
평생 궁에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자라 내전 직전 왕궁을 떠나 조용히 지냈음에도, 역병과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지아에서 굳이 나서서 사람들을 돕다가 끝내 희생당한 사람.
본인이 부정한들, 성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존재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녀겠지.
그래서 그저 궁금했다.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 무수한 이들을 휘말리게 만들고도, 일말의 후회도 없이 만족하며 죽어간 청기사를 경멸한다.
그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주저 없이 다른 이들을 착취하던 귀족들을 혐오한다.
그와는 다른 인간이 되고자 갈망하기에, 내 사람들이 가치 없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걸 통해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에리스는 그렇지 않을 거다. 연고도 없는 그녀는 더없이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에게 선의를 베푼다. 나는 결코 그녀처럼 순수한 선의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하지?
에리스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궁에서 사랑받으면서 호의호식하며 자랐는데.”
“...그래.”
“그때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제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이 나라의 국민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항상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고.”
“지금의 너는 궁에서 떠난 지 한참 오래되었고, 그 국민들은 왕족을 죽이겠다고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래도 제가 가진 재주는 대부분 선왕 폐하께 총애 받아 궁에서 편하게 지낼 때 어머니께 배웠고, 제가 왕녀니까 프랑크 아저씨가 지금까지 저를 지켜주고 계신 거겠죠. ...후작님도 결국, 제가 왕녀라서 이렇게 특별대우 해주시는 거 고요.”
나는 에리스의 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할 말이 없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어리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녀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저럴 수 있을까?
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녀를 배려해서 대답했다.
“...그래, 좋은 어머니셨구나.”
뜻밖에, 내 말을 들은 에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리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완전히 처음 봤기에, 내가 한 말의 어디가 문제였는지를 고민하는데 에리스가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겠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처연한 미소였다.
-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시점.
혁명 정부의 수뇌부는 심각한 얼굴로 회의장에 모여 앉아 있었다.
“리슐리외 주교께선 오늘도 불참이신가?”
“흥, 그 우유부단한 양반은 이제 필요 없소. 어차피 혁명이 일어난 이상, 유순하기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도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인사임은 틀림없지.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국일수록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원.”
그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초대 공화국 총재, 브누아 레베리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오! 국왕과 로렌 공작이 손을 잡아 저들의 군대가 지금 이 뤼미에르로 진격해오고 있다지 않소!”
총재의 말을 들은 회의장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총재 레베리는 회의장 안에 앉은 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오를레앙 공작과 로렌 공작이 지휘하는 군대는 무려 8,000이나 되는 대병력이요. 저 내전을 겪은 군대이니 정예병일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고, 저들이 뤼미에르에 진입하게 두면 혁명 정부는 바로 붕괴되고 말거요.”
혁명 정부 수뇌부의 얼굴은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혁명이 성공한 뒤 국왕이 수도 탈환을 목표로 할 것이 뻔했기에, 혁명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 국민적인 징병제를 통과시켜 병력을 확보했다.
“저들에게 맞설 병력 자체는 충분히 확보되었소. 문제는 그들을 지휘할 장교 자원이오.”
거의 마지막까지 봉건제의 잔재가 남은 전통적인 기사 왕국 프랑지아에서 병력을 지휘해본 자들은 대부분 기사이거나 못해도 귀족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 대부분은 혁명 과정에서 쓸려나갔다.
“끄응, 그러게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다 죽여선 안 되었소. 우리가 제대로 된 형태의 국가를 운영하려면 최소한의 장교들은 살려둬야 했단 말이오.”
온건파의 수장인 니콜라 브리소의 말에, 급진파인 쟝 말로가 코웃음을 쳤다.
“흥, 국민의 적들이 대가를 치렀을 뿐이오.”
“하아,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혁명 정부에 제대로 된 대병력을 지휘해본 자가 없지 않소. 포로로 잡힌 귀족 중 일부 태도가 좋은 자들이라도 기용해보면 어떻소?”
“하! 저 푸른 피들을 어찌 믿고 혁명군을 맡긴단 말이오! 우리가 봉건제 폐지를 선언한 걸 그새 잊은 거요? 저들이 국왕군과 조우했을 때 검을 거꾸로 잡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소?”
“아니, 그렇다고 병사들만 내보내서 싸울 거요? 저들은 고위 귀족들의 정규군이오! 그냥 저택에 쳐들어가서 죽이면 끝인 피래미들이 아니란 말이오!”
“누가 그걸 모르오? 그렇다고 귀족 놈들을 기용하자니, 거 그 귀족 놈들에게 뒷돈 받아먹고 그러는 거 아니요?”
“뭐요? 말 다했소?”
말이 몇 번 오가자, 온건파와 급진파로 대립하고 있던 자들은 급기야 온갖 모욕과 모함을 주고받으며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본 레베리 총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혁명은 순식간에 수도와 북서부를 장악하고 왕국 각지로 번져나가고 있지만, 정작 그 수뇌부는 아직도 혼돈 그 자체였다.
결국 답보 상태에서 회의장이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을 때,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단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입을 열었다.
“적당한 인선이 하나 있습니다.”
“적당한 인선이라?”
반색하는 레베리 총재에게, 이지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귀족은 아니라는데, 용병으로서 도시 이곳저곳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습니다.
내전 막바지에는 저 오를레앙 공작 휘하에서 랭스 시의 1,000 군대를 이끌고 복무해서, 두 공작의 지휘 방식도 잘 알고 있다더군요.”
이지도르가 손짓하자 그의 비서가 그 인선에 대한 자료를 나누어주었고, 레베리 총재는 그것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최근 몇 년간 제법 많은 도시에서 일했군. 1,000이라. 확실히 적지는 않지만, 이번에 맡을 군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지 않소?”
“달리 대안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중 그만큼의 병력이라도 제대로 지휘해본 자가 있긴 하던가요?”
“끄으응, 한 번 만나 볼 가치는 있겠구려.”
결국 총재가 마지못해 말하자, 이지도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지시했다.
비서가 빠져나가고 잠시 뒤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한 청년이 아주 느긋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저렇게 젊다고?”
“경험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긴 한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들이 찔러오는 가운데, 이제 고작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남자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존경하는 혁명정부의 요인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랭스 시의 민병대 지휘를 맡고 있던 라파엘 발리앙이라고 합니다.”
“흠, 라파엘...발리앙 씨. 이 도시 저 도시 자주 전전해 다녔던데, 평이 안좋기라도 했나?”
“하하, 그 반대입니다. 보수를 올려 부르는 곳이 많아서요.”
“국왕이 보수를 올려 부르면 갈아탈 수도 있겠군, 그래?”
“용병으로 일하면서 제일 중요한 건, 고용주가 무작정 돈을 높여 부른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지금 국왕이 보수를 줄 수는 있는 처지일까요?”
발리앙의 넉살에 이곳저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오고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레베리 총재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발리앙. 용병생활을 그만두고 프랑지아의 정규군으로서 복무할 의사가 있어서 이 자리에 왔으리라 믿네.”
“물론입니다, 존경하는 총재님. 저도, 제 부하들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는 지긋지긋하거든요. 좀 높은 자리에도 올라가 보고 싶고요.”
“하하하, 솔직한 친구일세.”
“쯧, 교양 없긴....”
상반되는 의견들이 나오는 가운데, 레베리 총재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대에게 지휘권을 준다면, 지금 뤼미에르를 위협하는 국왕의 군대를 물리칠 자신이 있는가?”
발리앙은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저 구시대의 퇴물들에게, 민중의 군대가 가진 힘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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