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게임 체인저
루이 왕의 군대를 격파한 뒤.
나는 라파예트의 봉신들, 앙쥬 백작령의 군대를 인솔해온 소백작, 그리고 리오넬 백작과 함께 회의를 열어 전리품을 분배한 뒤 각자의 영지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남부와 중부에서의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동부 방면군과 한 번 싸워보지도 않은 로렌 공작과는 어떤 상의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영지로 귀환하고, 2개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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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무실에 앉아, 영지의 업무와 들어온 각종 문서들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도 뤼미에르에서 시작된 혁명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모양이다.
긴 세월 이어진 숱한 탄압과 착취. 평민들, 제3신분에게 동기는 차고 넘쳤다.
구체제의 압도적인 힘 때문에 일어설 용기가 없었을 뿐, 내전에서 대부분의 기사들이 소모되고 수도에서 혁명이 성공하는 걸 보자 더는 저들에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즉위하고도 내전을 끝내지 않은 국왕이 승리를 위해 자신들을 악마들에게 팔아치우고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수도의 소식이 워낙 많이 들어와서 남부에 위치한 후작령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다.
어떤 정보에 따르면 북부에서 수천, 수만에 달하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살해당한 귀족들의 머리가 도시를 가득 장식하고 있다고도 하고.
어떤 소문은 혁명군은 지극히 정의로워 오직 프랑지아 국민들의 친구일 뿐, 피의 학살극은 국왕과 귀족들의 날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고 내가 섰던 법정과 단두대를 떠올렸다.
최소한 수도와 혁명이 번지고 있는 도시들에서 적지 않은 귀족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내고 집무에 한창일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듀몬트입니다, 후작 각하.”
“들어오세요, 남작.”
여전히 나온 배가 들어갈 줄 모르는 로베르 드 듀몬트 남작은 안으로 들어와 내게 예를 갖추더니 입을 열었다.
“로렌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후작 각하.”
“아, 드디어 왔군요.”
내가 로렌 공작과 상의도 하지 않고 다른 영주들과 함께 영지로 귀환한 뒤, 그는 지난 2개월 간 몇 번이고 내게 사자를 보내왔다.
처음에는 내게 상의를 하자며 로렌 공작령으로 부르더니, 거부당하니 봉신을 보내서 상의하자고 했었지.
그것도 몇 번 거부당하자 결국 그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인내심이 다했는지 직접 찾아오겠다고 통보해왔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후작 각하?”
매번 굳이 각하도 아니고 자부심에 찬 얼굴로 후작 각하라고 강조해서 부르는 남작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적어도 회귀 전에 내가 후작이 되었을 때도, 그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잇값 못하는 듀몬트 남작의 행동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나도 참 유치하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셨으니, 일단 얼굴은 봐줘야 예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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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 보기 어려운 얼굴을 드디어 보는군.”
로렌 공작은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라파예트 후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렌 공작님.”
내심 평기사 출신이 세운 후작가를 깔보던 위세 높은 공작이, 친히 여기까지 오려니 영 싫으셨나?
로렌 공작은 잠시 매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짐짓 관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대 후작의 전사는 유감이오. 흠, 그와는 별개로 라파예트 후작이 된 것을 축하드려야 맞겠지. 유서 깊은 왕국의 공작으로서, 그대가 앞으로도 왕국에 충성을 다하고 작위에 걸맞은 행동을 하길 바라겠소.”
그 후작의 전사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지. 말하는 것만 봐선 그가 내 왕인 줄 알겠다.
“선대 후작 각하께서도 공작님께서 늦게나마 방문하여 유감을 표해주신 것을 기뻐하시리라 여깁니다. 그건 그렇고, 공사가 다망하신 공작님께서 친히 후작령에까지 방문해 주셨으니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공작은 내 말에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생각보다는 예의를 갖추어 입을 열었다.
“후작도 알다시피, 수도에서 시작된 평민들의 반란이 삽시간에 북부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소. 이번 전투에서 전사해버린 영주들의 영지는 이미 반란에 휩쓸려 무너졌다더군.”
로렌 공작의 말대로다.
당장 공작이 나에게 당한 브르타뉴 공작령은 행정 공백 사이에 가장 빠르게 혁명군에게 무너졌고, 사실상 수도 뤼미에르부터 북서부 전역에 이르는 영역이 이미 혁명군의 세력권이다.
“루이 왕은 수도 입성에 실패했고, 지금은 오를레앙 공작의 영지에 있소. 병력 손실도 크고, 지금으로서는 오를레앙 공작의 영지가 국왕에게 남은 유일한 세력권인 셈이지.”
로렌 공작은 손으로 수염이 자란 턱을 매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 후작. 이럴 때 비교적 세력을 온존한 우리가 다른 영주들을 규합하여 싸운다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소.”
“글쎄요, 지금 왕국 각지에서 프랑지아의 국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을 텐데요. 당장 공작님의 영지에서도요. 왕을 손에 넣는다고 치고, 지금 상황에 그게 큰 의미가 있기는 하겠습니까?”
“반란군들은 모조리 쓸어버려야지. 국왕이야 그대에게 대패해서 세력이 부족했다지만, 우리가 연합한다면 저들쯤은 능히 쓸어버릴 수 있을 걸세.”
반란군. 그래, 로렌 공작의 현실 인식은 딱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미 수도에서 봉기의 성공을 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저들은 쓸어버린다고 해서 간단하게 쓸리는 수준이 아니다.
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면 아마 프랑지아 전체 인구의 몇 할은 날려야 할 텐데, 로렌 공작은 그걸 알고는 말하는 걸까.
나는 대충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라파예트는 지난 전투에서 남부 방면군과 중부 방면군의 주력을 맡았습니다.
공작님께서는 그리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병력 손실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럴 때 영지를 비우고 출진했다간 그나마 멀쩡한 우리 영지까지 흔들릴 것 같습니다만.”
“...내가 알기로 남부 지역에는 저 반란군의 여파가 그리 심하지 않을 텐데?”
아, 그야 그렇지.
내가 최선을 다해 전쟁세 추가 징세와 약탈을 막은 결과, 후작령의 민심은 그 럭저럭 양호하다.
거기다 내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사이, 에리스는 라파예트 후작가의 대리인으로서 영지의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선을 베풀고 내전과 역병으로 고통 받은 이들을 도와주기까지 했지.
내 개인 자산도 있지만 루이 왕을 패퇴시키고 얻은 소득과, 내가 깨부순 남부 군의 패잔병을 처리한 뒤 크리스틴이 분배해 준 전리품 덕분에 민심을 보듬는데 쓸 자금도 충분하다.
덕분에 북부 전역에서 번져나가고 있는 혁명의 열기에 비해, 라파예트 후작령은 아직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다.
상대적으로 상단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 굳이 영지를 착취하려 드느니 상공업을 활성화시키는 쪽이 더 효과적이고, 크리스틴이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아키텐도 그렇다.
좀 운이 좋은 케이스지만, 혁명 직전에 에리스가 돌아다니며 영민들을 보살폈고 백작도 비교적 협조적으로 나와 준 앙쥬 백작령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이보게, 후작. 중립파였지만 참전한 아키텐과 앙쥬 가문이 전부 그대의 사람들이란 것을 알고 있네. 비교적 상황이 좋은 남부 가문들이 나서고자 한다면 능히 나설 수 있을 거란 것도.”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제 봉신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크리스틴이 백작위에 오르는 데 내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그에 대한 보답을 넘치도록 했다.
크리스틴 본인이 나를 적극 도와주고 있지만 그건 내가 그녀와 아키텐에게도 이득이 되는 행동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독립 영주인 그녀를 봉신처럼 다루려고 하면 그녀 본인 이전에 아키텐의 봉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지난 전투에서 결정적인 증원군을 보내준 앙쥬 백작도 사실상 에리스가 병에 걸린 아들을 고쳐주고, 민심을 얻어준 것에 대해 보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작은 뭐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굳히더니 턱- 하고 발을 응접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새끼가?
“이보게, 후작. 우리 편하게 이야기하세나, 편하게. 솔직하게 말이네.”
그렇게 말한 로렌 공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오를레앙 공작을 처리하고 반란군만 밀어버리면, 우리는 루이 왕을 꼭두각시로 세우고 이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
오호라, 이건 나름 신선한 발상이다.
어차피 왕의 지지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으니 남은 측근들까지 싹 쳐내고, 아예 왕권을 시궁창에 박아버린 다음 실권자가 되자?
“자네는 사실상 남부 세력의 맹주지만, 결국 중앙 정계에서는 영향력이 없어.
자네에게 부족한 건 다른 고위 귀족들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네. 그러니 그걸 나에게 맡겨. 내 자네를 이 왕국의 이인자로 만들어주겠다, 이 말이네.”
나는 그에게 픽 웃어주었다.
“외람되나, 공작님. 단독으로 왕을 잡을 능력도, 북부 전역을 뒤덮은 반란을 억제할 힘도 없으셔서 여기까지 와서 손을 벌리고 계신 것 아니십니까?”
공작의 얼굴은 바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작해야 청기사의 휘광을 뒤집어쓴 애송이가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해!”
“우리가 피 흘려 싸우는 동안 가짜 전쟁이나 벌인 분 정도는 무시해도 될 것 같군요.”
“네, 네놈. 뭘 믿고 내게 이러는 건가? 이 로렌 공작 앞에서 이따위로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네놈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국왕과 손을 잡을 수도 있음이야!”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농담도, 공작님께서 바로 1왕자 전하의 측근 아니셨습니까? 국왕이 받아들일 리가 없죠.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탔고, 공작님께서는 지난 전투에서 다른 영주들의 실망을 사셨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라파예트가 공작님의 수하가 아니라 대등한 동지라는 것을 좀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네놈, 후회할 줄 알라!”
로렌 공작은 울분에 차서 그렇게 떠들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고, 옆방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듀몬트 남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후작 각하? 로렌 공작이 정말로 국왕과 손을 잡아버리기라도 하면....”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남작. 오늘 있었던 일을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자가 우리 동맹에서 이탈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입장에선 평기사 출신 가문인 내가 그를 이토록 무시한 모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라도 왕을 찔러는 보겠지.
그가 왕에게 손을 뻗으면? 왕은 아마 잡을 거다.
실제로, 회귀 전 국왕은 몇 번의 격돌과 혁명군의 봉기 이후 다급해지자 우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걸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간단하게 동맹 파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로렌 공작을 도발한 거다.
저들도 우리 쪽이든, 로렌 공작 쪽이든 세작 정도는 두고 있을 거니 세력 간불화 소식이 전해지면 의심도 줄겠지.
아예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라파예트와 달리 로렌 공작과는 마지막 전투에서는 가짜 전쟁만으로 끝났으니까 상대적으로 로렌 공작에게는 미움도 덜할 테고.
군세는 다 잃고 수도도 함락당한 상황에 이미 뭘 가릴 처지도 아닌데 로렌 공작은 지난 전투에서 군세를 멀쩡히 온존한 세력이니, 그렇지 않아도 나를 증오하고 있을 국왕에게 나와의 불화 끝에 손을 뻗는 로렌 공작은 제법 매력적으로 보일 거다.
그렇게 왕과 로렌 공작이 손을 잡는다고 해서, 저들이 라파예트에 공세를 가할 걱정도 없다. 저들에겐 당장 세력권인 북부와 수도 탈환이 더 급선무니까.
로렌 공작을 손절하고 국왕에게 넘겨 저들이 북부를 장악한 혁명군과 충돌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우리는 구체제와 어느 정도 선을 그은 별개의 세력으로 보일 수 있다.
“버려진 자들끼리 손잡고 혁명군과 치고받도록 놔두죠. 그들이 우리에게 귀중 한 시간을 벌어줄 테니.”
민심이나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세력권을 공고히 안정시키는 거다.
어차피 지금 당장의 혁명군은 자신들 스스로도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막 나가는, 체계 없고 혼란스러운 집단일 거다.
저들이 폭주 끝에 최소선의 정부 형태를 갖추고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충분한 힘을 유지하고 있어야 혁명군이 섣불리 우리를 적대하지 못한다.
“허허. 로렌 공작은 꽤 긴 시간 같은 편에서 함께 해온 강대한 영주인데, 그를 버린다라. 저로서는 후작님의 생각을 따라가기 어렵군요.”
나는 듀몬트 남작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는, 확실히 우리와 함께 갈 자들과 버릴 자들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설프게 이 세력 저 세력 끌어들이려 하다간, 우리까지 같이 몰락한다. 그런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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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흘긋 눈을 돌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닿지 않는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놓인 소파에, 에리스가 비스듬히 앉아 굉장히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한동안 에리스를 바라보고 있자, 연주를 멈춘 에리스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어왔다.
“제게 용무라도?”
“보통은 후작의 집무실에 들어와서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용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뭘 새삼. 저택 안에 있을 때는 편하게 있으라면서요? 그냥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에요. 방해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집무실에 난데없이 들어와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데 방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좀 어이가 없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녀의 말이 맞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방해는커녕 피로도 덜하고 집중도 잘되니까. 이것도 아마 그 기원인지 신성력인지의 힘이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청기사의 시신과 함께 후작령으로 돌아왔을 때도, 에리스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집무실에 들어와서 하프를 연주해주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에리스. 솔직히,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후작을 죽게 내버려둘 지를 고민했을 걸.
-무척 사이가 나쁘셨나 보네요.
-흔한 귀족 가문의 부자 갈등보단 좀 더 심했지. 네게도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을 텐데?
-그랬죠. 솔직히, 저도 엄청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니 그쯤 해도 돼.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별로 기뻐하시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에리스는 그 말로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었지.
나는 청기사가 죽고 후작이 되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가 무수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그 자신에게는 후회 없는 최후를 맞이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면 내가 성장한 모습을 그에게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멋대로 전설로 남을 공적을 세우고 죽어버려서?
어느 쪽이든, 그날 그녀의 연주가 나에게 꽤 위안이 되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내가 별말을 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제법 좋은 실력에, 그녀 특유의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확실히 듣는 것만으로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비단 그날이나 오늘만이 아니라, 그녀는 자선활동을 위해 자리를 비울 때 외에는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장소도 가리지 않고 내키는 곳에서 연주를 들려주곤 한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다가 픽 웃었다.
“오늘 기분이 좋나봐?”
“네, 조금 느낌 있어서. 오늘은 후작님의 집무실이 끌리더라고요.”
“나는 에리스, 네가 나를 꺼려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요? 후작님을?”
보랏빛의 눈동자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라, 오히려 내가 어이없어졌다.
“...네 입으로 너와 나를 혼인시키면 라파예트가 왕을 배출한 가문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잖아?”
“아하하, 그건 그냥 결혼‘당하는’ 게 싫었던 거죠! 소심하긴, 그런 걸 다 마음에 담아두시다니!”
내가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려서 손으로 이마를 짚자, 에리스는 아예 놀리기 시작했다.
“설마, 후작님. 제게 마음이 있어서 상처 입으신 건가요~?”
“아서라, 어린애한테는 흥미 없다.”
“...이래도 나름 왕녀인데, 무례하긴.”
“편하게 대해달라고 한 건 너잖아.”
에리스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연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이 삭막한 상황에 여유를 주는 건 그녀의 기원 탓일까, 아니면 그녀 본연의 자유로운 분위기일까.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
그 말을 들은 에리스는 특유의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만약, 이 나라를 위해 왕위에 오르셔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리 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