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 -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뤼미에르 남동부, 느무르 평야.
루이 왕과 간신히 수습된 패잔병들은 뤼미에르로 귀환하던 중 오를레앙 공작이 이끄는 동부 방면군과 조우했다.
“신께 감사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폐하.”
오를레앙 공작이 헐레벌떡 마중 나왔으나, 루이 왕의 심기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대가 왜 여기 있는가, 오를레앙 공작?”
“남부와 중부 방면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급히 철수하여, 이동하던 중입니다.
폐하.”
“동부는 어쩌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나 중부 핵심지대와 수도 뤼미에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그대의 영지를 지키려는 것이겠지.”
날카로운 국왕의 말에, 오를레앙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오를레앙 공작의 영지는 수도의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국왕의 본대가 대패해버렸으니 만에 하나라도 저들이 북상한다면 수도 이전에 오를레앙 공작 자신의 영지가 위험해진다.
그러니 충심을 가장해, 맡았던 동부지역도 내팽개치고 헐레벌떡 귀환 중이던 거겠지.
그러나 상상도 해보지 못한 패배에 심신이 모두 지친 국왕은 더 이상 공작을 추궁할 기력조차 없었다.
“내가 쉴만한 거처를 내어달라.”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루이 왕은 공작의 명을 받은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천막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두를 내보내버리곤,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허탈한 말을 내뱉었다.
“이 내가, 졌다고?”
귀족스러운 사치와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던 형 대신, 그를 총애했던 선왕이 떠올랐다.
기사왕이라 불린 위대한 선왕. 그러나 그 아들인 자신은 청기사의 위용 앞에 감히 그자와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때는 그도 선왕을 존경하며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며 적진으로 돌격했을 터인데,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된 거지?
그토록 존경하던 선왕이 끝내 그를 왕세자로 책봉해 주지 않고 죽었을 때?
아니면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만해져서?
아니, 아니다.
선왕이 승하하고, 기사들이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하며 그를 지지하던 순간부터였다.
그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라 믿고, 형을 꺾는 것만 신경 써왔다. 기사들의 충성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순간부터 그는 추해졌다.
그들은 용맹한 기사들보다는 아첨하는 귀족들을 더 총애하던 형이 싫어서, 그리고 위대한 기사였던 선왕에게 충성을 바쳤기에 그것을 그저 이어서 바쳤을 뿐이거늘.
자괴감에 쌓여있던 국왕의 머리맡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국왕 폐하.”
루이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새카만 비둘기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네놈이 왜 여기에....”
“기업인이 거래처에 접촉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놀라우신지요, 국왕 폐하?”
루이 왕은 입을 다물고, 표정 따위가 있을 리 없는 생물임에도 짐짓 비웃는 기색의 비둘기가 붉은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시겠지만, 당사에서는 국왕 폐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자금을 충분히 대출해 드렸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물론 적당한 ‘대가’를 당사에 판매하셨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것은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기다려라. 그대들이 바라던 대로 라파예트후작가를 토벌할 테니...!”
“외람되나 국왕 폐하, 당사가 판단하기에 작금의 국왕 폐하께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루이 왕은 비둘기, 할파스의 단언에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당사에서 국왕 폐하의 신용 등급을 과대평가한 듯합니다. 당사가 제공해드린 특별 혜택을 제공받으실 수 없게 되었으니 애석하고, 또 애석합니다.”
라파예트 후작가, 특히 소후작을 토벌하면 대출해 준 금액의 상당 부분을 탕감해 주겠다. 루이 왕은 그것이 당연히 가능하리라 믿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제안을 받아들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폐하의 지불 능력은 건재하시니, 이제 어비스 코퍼레이 션에서는 폐하께 대출금의 상환을 요구해야 하겠군요.”
“뭐라? 아직은 내전 중이고, 짐은 이제 막 전투에서 패배한 참이다. 당장 네놈들에게 돈을 내어줄 여력은 어디에도 없-”
“외람되나 국왕 폐하, 어째서 당사가 폐하의 사정을 고려해야 합니까?”
루이 왕이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며, 비둘기는 울음소리인지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구구구- 소리를 낸 다음 다시 입을 열어 기괴한 음성을 냈다.
“폐하께서는 당사에서 대출을 받으셨고, 당사는 이번 전투로 국왕 폐하의 신용 등급을 다소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원금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대출 잔액의 상환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절차입니다.”
“줄 돈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폐하께서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더욱 무거운 전쟁세를 거두어도 좋고, 아니면 폐하의 신민들을 더욱 많이 당사에 ‘대가’로 지불하셔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폐하께서 이에 응하지 않으실 경우 당사는 부득이하게 집행 절차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금 감히, 악마 놈들 따위가 짐을 협박하는가?”
“오, 폐하. 협박이라니요, 당사는 본질적으로 기업이며 이익집단입니다. 이익실현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요?
물론, 당사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이고 인간과의 공존을 추구합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대출금을 회수하는 등의 다소- 야만적인 계획은 아직은 차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비록 왕국이 자랑하던 기사들이 거의 전사하여, 당사가 판단한 귀국의 전력이 지극히 열등하더라도 말입니다.”
서슴없이 나온 말이 내포한 위협에, 루이 왕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보다 신사적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프랑지아 왕실의 해외 자산 압류와, 대가만 준다면 기꺼이 당사를 대신하여 대출 잔액을 회수해 줄 세력에게 의뢰를 하는 것도 효과적이겠지요. 이를테면, 폐하께 반기를 든 자들이라던가.”
“아, 알았다! 지불하겠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비둘기, 할파스는 다시 한번 구구구-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국왕 폐하. 기일은 세 달로 해두지요.”
“세, 세 달? 그렇게 큰돈을 단 세 달 만에 어떻게 마련하란 말인가!”
“그러면, 앞으로도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함께 진보한 기술과 혁신적인 서비스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할 말만 마친 비둘기는 국왕이 보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루이 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바마마, 제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
프랑지아 왕국의 수도, 뤼미에르.
세금 징수원들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특별 전쟁세 징수를 선언하고, 납부하지 못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처벌을 받게 될 거라는 포고령을 내리자 도시는 대혼란에 빠졌다.
세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한 자들이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판매’된다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더는 안 됩니다! 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낸 단 말입니까! 이건 우리 모두를 저 악마들에게 팔아치우겠다는 선언입니다!
법도 무시하고 폭정을 펼치는 국왕을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국왕은 지금 패배한 군대와 함께 바로 이곳 뤼미에르로 오고 있습니다. 저들이 도시에 입성하기 전에 시민들을 무장시키지 못한다면 대학살이 일어날 겁니다! 한다면 그 전에 해야 합니다!”
숱한 아우성 속에, 그동안 인덕과 신중함으로 그들을 이끌던 아르노 리슐리외주교는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친우 시에예스의 도움을 받아 ‘신분론’을 펴낸 장본인이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자신의 배만 불리려 들 때, 리슐리외는 진정으로 프랑지아의 국민들을 긍휼히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이 깨어나기를 바랐다. 평민 개개인은 나약하여 아무것도 아니나, 그들이 의식을 깨우치고 단결한다면 이 비참한 왕국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국 주교가 원한 것은 제3신분이 뜻을 모아 국왕을 압박해, 그와 이 왕국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피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이제 프랑지아의 국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다름 아닌 압제자들로부터!”
“국왕은 죽어야 합니다! 아니, 제3신분을 착취하던 자들은 모조리 다!”
국왕의 명령을 들은 리슐리외 주교조차 그가 예전의 그 왕자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해도 주교는 그가 뿌린 씨앗이 이런 식의 일을 부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마침내 행동할 의지를 얻은 이들은 리슐리외의 눈에 그저 공포스럽게만 보였다.
이 공간 안에 가득 찬 분노와 증오가 늙은 주교의 피부를 찔렀다.
그의 친우, 리슐리외에게 그만이 진정한 신의 종이자 민중의 벗이라며 따스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던 시에예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애로운 주교를 존경하며 우러러보던 이들의 눈에는 핏대가 섰고, 그들의 목은 살의와 진노를 담은 소리만을 내뱉는다.
“결단해 주십시오, 주교.”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만이 나직하게 고했다.
리슐리외가 보기에, 이지도르의 눈 안에서 차갑게 소용돌이치는 무언가는 뜨겁게 타는 불꽃보다도 더 위험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이미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그가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들을 말리려 든다면, 저들의 눈에 그 또한 저 숱한 ‘제1신분’ 중의 하나가 되리라.
리슐리외는 거의 탄식하듯 말했다.
“...자유, 평등, 박애가 그대들과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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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 밤, 수도 뤼미에르의 밤하늘이 대낮처럼 밝혀졌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것도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중들이 횃불을 든 채 시가지를 행진한다.
“저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군중들이 일제히 합창하는 그 소리가 시가지 전역을 뒤흔들고.
“저들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평소에 거리를 쏘다니며 집집마다 찾아가 윽박지르던 세금 징수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의 분노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신의 이름을 팔아 착취를 일삼던 사제들은 교회의 어두운 고해실로 뛰어들어가 신의 자비를 찾았다.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민중의 목소리를!”
고결한 기사도의 명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기름지고 부른 배를 두드리던 귀족들은 그 비대한 몸뚱이를 끌고 지하실에 숨어 공포에 떤다.
“이제는 들어야 할 터다!”
무수한 군중들의 행렬은 수도 뤼미에르의 무기고 앞에 도착했다.
“듣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그 몸에 새겨줄 테니!”
무기고를 지키는 수비병들은 그 격노한 군중의 무리에 대포를 겨누고 있었다.
“프랑지아의 국민들이여-”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대포를 겨누고 있는 소수의 병사들 모두 도시를 불태워버릴 듯한 열기를 느끼며 긴장했다.
“거리로 나와 우리와 함께 하자!”
그 군중들의 열기가 그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저 마른 침만을 삼키며.
“함께 새로운 삶을 거머쥐자!”
창백하게 질린 채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그들의 지휘관만을 올려다보았다.
“동참하지 않는 자들, 저 압제자들과 함께 하는 자들일지니!”
지휘관은 변변한 무기조차 쥐지 못한 군중들의 외침에 압도되어, 검집을 움켜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과 함께 몰락하거나, 우리의 성전에 동참하라!”
마침내 군중들의 합창이 끝나고, 그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지휘관과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지휘관은 고심했다.
왕국에 대한 충성만으로 이 자리를 지키려 해도 병력도, 식량도, 탄약도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가족이 저 군중들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 나와 부하들의 생명을 보장해주시오. 그러면 무기고를 열겠소.”
“아, 훌륭한 선택이오. 받아들이겠소.”
군중들의 선두에 선 자의 말에, 지휘관은 약간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했다.
그러나.
지휘관과 병사들이 군중들을 피해 자리를 뜨려는 순간, 군중들 중 하나가 뛰어나와 몽둥이로 그의 부하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 무슨 짓이오! 약속이-”
“세금 징수원이.”
군중들의 시선이 쏠리고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몽둥이를 든 남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난달에 그러더군. 이제 이번 계절에는 추가 징세가 없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나는, 루시를, 그 어린아이를 팔아서 가족들을 살렸어.”
눈물을 흘리다 고개를 든 남자의 눈에는 이제 핏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오늘 왕이 뭐라고 했지? 네놈들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데, 우리는 왜 약속을 지켜야만 하지?”
뤼미에르의 시민들은 수도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갖췄고, 그다음에는 수도의 귀족 저택과 교회들이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무수한 사제와 귀족들이 죽었고, 그렇게 죽은 자들 중에는 사제도 귀족도 아니나 그들의 저택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당한 자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마침내 중앙 거리에 도달한 군중들은 잘려진 지휘관과 병사들, 귀족들의 목을 장대에 내걸고 행진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그 광경을 내다본 리슐리외 주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