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기 - 구시대의 종말
청기사의 목을 베고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사기는 그 목을 벤 장본인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폭발 사산해버리는 충격적인 광경에 그대로 꺾였다.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들고 접근하던 군대는 소후작의 외침을 듣고 아예 함성을 지르며 국왕군의 후방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돌격, 돌격하라!”
가스통의 외침과 함께 기사와 기병들이 돌진하고, 후방에서는 대포가 불을 뿜어 강철탄을 날리자 배후에서의 공격에 화들짝 놀란 국왕군은 혼란에 빠졌다.
“뭐, 뭐야? 후방에서? 아군이 아니었어?”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보고, 후방에서 접근하고 있는 군대가 증원군이라고 알렸던 것은 국왕군에게 재앙으로 작용했다.
청기사의 괴물 같은 용맹에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적의 증원이 도착하여, 어떻게든 군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조치의 대가는 비쌌다.
“브르타뉴 공작이 배신한 거야!”
“뭐라고?”
국왕과 가신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증원군인 줄 알았던 아군이 배신하여 후방에서 달려들고 있다는 오해가 진영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나마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하사관들까지 번번이 소후작의 화살에 맞자,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던 국왕군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후작께서 도우러 오셨다! 공격하라!”
“라파예트 만세!”
“돌격하라! 청기사의 복수를!”
반면 청기사의 죽음을 보며 절망하던 라파예트의 군세에게, 청기사를 죽인 근위기사단장을 저격하며 원군을 끌고 등장한 소후작의 존재는 더는 없을 사기를 불어넣었다.
“앙쥬 백작 각하의 명을 받들어, 라파예트의 소후작께 진 빚을 갚으러 왔다!
앙쥬 백작령의 군대는 지금부터 라파예트의 군대를 지원한다!”
거기에 드디어 도착한 앙쥬 백작령의 군대까지 합세하자, 국왕군은 완전히 전 의를 잃어버렸다.
“이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더냐. 내, 내 기사들이, 내 근위기사단장이, 내 군대가...!”
루이 왕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그나마 군대를 지휘할 근위기사단장과 기사들이 전멸해버린 국왕군은 이미 수습 불가의 대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폐하, 폐하! 이제 곧 적들의 군대가 이곳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피, 피하라고?”
긴 내전 끝에 뤼미에르에서 영광스러운 대관식을 올리고 위풍당당하게 2만의 군대와 무수한 기사들을 이끌고 출정할 때, 루이 왕은 승리를 확신했었다.
청기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동요하기는 했으나, 그만 잡으면 승리할 줄 알았다. 청기사가 죽었는데도 패배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국왕은 상상해본 적도 없고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진 건가?”
“송구하나, 폐하. 이 전투는 이미 틀렸습니다.”
루이 왕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청기사가 지나간 자리에 쓰러져 있는 그의 기사들의 시체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대혼란과 아비규환 속에서, 양면으로 공격받으며 무너져 내리고 있는 그의 군대도.
“뤼, 뤼미에르로 후퇴한다.”
위풍당당했던 2만의 대군과 수백의 기사들. 그는 자신이 두 번 다시 그런 자들을 이끌 날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절망적인 말을 내뱉은 루이 왕은 멍하니 눈을 돌려, 이제는 아예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내던져버리고 라파예트의 깃발을 든 채 몰려들고 있는 적들을 보았다.
그들이 들어 올린 라파예트의 문장, 울부짖는 사자의 저주받을 형상이 국왕의 눈에 새겨졌다.
“라파예트, 저놈들만, 저놈들만 없었더라면, 나는...!”
“폐하를 모셔라! 어서!”
국왕의 깃발은 포위당하기 직전,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대다수의 병력은 뒤에 남겨진 그대로였고, 그 광경을 본 국왕군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항전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
저물어가는 석양이 전투의 열기가 사그라든 평야에 피처럼 붉은 빛깔을 드리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국왕군이 목숨을 잃었고, 그 못지않은 숫자가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아군의 사상자도 그만큼 많았다.
나는 전장이었던 평야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무수한 군사들의 시체가 쌓인 전장에, 딱 후작이 말을 몰아 질주한 길만 그를 피해 도망치느라 시체가 없어 말이 지나갈 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언덕 위의 막사까지의 길을 따라 수백의 시체가 쌓여있는 전장에 다다라, 그 즐비하게 쌓인 기사의 시체들을 보며 말에서 내렸다.
토막 나고 잘려나간 시체와 그 모두를 뒤덮은 피의 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디뎠다.
사방에 후작이 휘두르고 내던졌던 병장기들과 그것들이 박힌 시체들이 늘어져 있어, 직접 보지 못한 전투의 양상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후작이 어떤 식으로 싸우며 어떻게 돌진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천천히 그 길을 따라 언덕에 올라, 마침내 본연의 색을 잃고 핏빛으로 물든 갑옷에 도달했다.
목이 없이 하늘을 보고 누운, 후작의 시신.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자,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회귀 전, 내가 후작의 진영에 호출되었을 때 내 길을 안내해 주었던 기사는 한쪽 눈에 뻘겋게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의 손에는 익숙한 투구를 쓴 목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너무도 귀중한 보물처럼 든 채, 내 앞까지 온 기사는 무릎을 꿇으며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송구합니다, 소후작님. 후작 각하를 최후까지 모시지 못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가 건넨 투구를 받아들고,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대, 이름은?”
“...다니엘, 마르탱입니다. 소후작님.”
그의 얼굴은 진심 어린 송구함을 담고 있다.
나는 브르타뉴 공작을 격파하고 최대한 서둘렀다. 후작의 전장이 이 정도로 열세일 거라고는 현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알지 못했으니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또는 후작이 이 정도로 날뛰지 않았더라면.
그때는 내 증원으로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세가 기울어 있어, 이 전투가 패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후작의 목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투구의 덮개를 올렸다.
드러난 후작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회귀 전에는 역병으로 허무하게 죽었던 이 남자는, 당신의 최후에 만족스러워 했나.
“...선대 후작 각하께서 전사하셨으니, 이제부터 소후작님께서 라파예트 후작각하십니다.”
옆에서 후작을 섬기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선대 후작 각하의 시신을 후작령으로 옮기고자 방부처리 하려고 합니다만....”
문득, 그는 이 전장에 묻히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답은 달랐다.
“그래, 그러도록.”
“허면, 선대 후작 각하의 갑옷은....”
비록 목은 잘렸지만, 청기사의 상징이자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갑옷.
동시에 라파예트의 소후작이었던 내가 그의 갑옷을 입는 것은 곧, 내가 청기사로서의 라파예트 후작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될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지나온 길에 쌓인 시체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일만의 군세를 가르고, 수백의 기사를 쓰러트리며 돌진한 후작의 경이로운 용맹은 무수한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겠지.
당장 다니엘 마르탱.
회귀 전에는 내가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남자는 그 자신 또한 기사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이 처절한 혈투에서 살아남은 안도보다는 후작의 죽음을 더 원통해하고 있다.
그러나 후작의 그 싸움과 자기만족을 위해, 그를 따라 돌격한 자들은 수도 없이 많은 시체로 변했다.
라파예트 후작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왕국에서 가장 위대했던 기사의 마지막 전투가 남길 전설.
그 전설에서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 돌격한 자들의 죽음은 그저 영웅 신화에 필요한 희생 정도로 잊힐 거다.
“...갑옷은 선대 후작 각하와 함께 매장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각하.”
나는 투구의 덮개를 덮고 방부처리를 위해 남작에게 건네준 뒤 시선을 돌려, 국왕군의 거점이었던 진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도열해 있던 라파예트의 가신과 봉신들, 그리고 군사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회귀 전, 청기사가 허무하게 역병으로 죽고 라파예트 후작이 되었을 때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툴루즈 백작가의 진실을 알고 아비에 대한 반항심만 키우고 있던 나는 영주로서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후작이 벌이던 내전을 이어나가야 했고, 그 이후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이들을 이끌며 혁명군에 맞서 싸웠다.
“라파예트의 문장 아래 선 자들이여.”
나도, 이들도,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모른 채 싸웠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있던 전투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회자될 것이며, 그 전설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이 전투에서, 청기사는 쓰러졌다. 위대한 기사의 명예로운 죽음이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으리라.”
그때의 나에겐 내 명령 아래 쌓여나가는 희생의 가치 같은 걸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선대 후작 각하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전에 그대들과, 이 전장에서 스러진 이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다름 아닌 그대들의 피와 희생이 오늘의 승리를 이끌었다.”
혁명군이 왜 그토록 우리를 증오하고 혐오하는지, 어떻게 해야 그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을지 따위를 고민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을 위해 눈앞만을 바라보며 싸웠고, 그랬기에 무가치하게 죽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던 대부분의 이들까지.
“그대들은 오늘 위대한 라파예트의 깃발을 들고 싸웠고, 라파예트의 한 시대가 끝났다.”
이들은 오늘 무엇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희생되었는가? 라파예트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면 죽은 1왕자에 대한 충성을 위해서?
그것을 알고는 있었나? 이 전장의 희생자들이 죽어가던 순간, 그들은 후작의 전설적인 싸움에 동참한 것을 명예롭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죽어갔을까?
나는 도저히, 단 한 명의 위업을 위한 그 수많은 희생을 찬양할 수 없다.
“이제는 새로운 라파예트의 시대다. 제군.”
인정하지,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가장 위대했던 프랑지아의 기사.
나는 기사로서 당신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나를 돌려보낸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결코 그런 것을 위해 나를 보내지 않았을 터다.
“나는 나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그대들을 전장으로 이끌지 않겠다. 라파예트의 명예는 깃발 아래 선 그대들 모두의 것일지니! 그대들이 나를 따르는 동안, 누구도 그대들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게 해주겠다!”
나는 선대 툴루즈 백작대부터 이어져 온 충성을 품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영주이자 그들을 이끄는 기사가 명한다는 이유만으로, 보답받지 못할 사지로 돌격하여 피 흘린 이들의 얼굴을 새겼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라파예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든 기수에게서 그 깃발을 받아 들어 올렸다.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했으나, 내가 책임지지 못한 이들에게 두 번의 생의 무게를 지워 고한다.
“이제는 내가, 라파예트가 그대들을 위해 깃발을 들겠다! 따르라! 그리하면 그대들이 라파예트의 명예가 되리라!”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가신과 군사들이 일제히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하는 외침이 평야를 뒤덮고, 나는 후작의 시신에서 등을 돌렸다.
프랑지아 왕국, 구시대의 영웅이던 청기사는 죽었다.
국왕군은 대부분의 기사와 병력을 잃으며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구시대의 종말이 되겠지.
원래부터 일촉즉발이었던 혁명의 위기는 왕국이 힘을 잃은 것을 깨달은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며 전 프랑지아를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을 거다.
회귀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파도에 휩쓸릴 뿐이었고, 정신을 차렸을 즈음엔 나와 내 사람들은 물론이고 프랑지아의 대부분이 폭주한 혁명의 광기에 불타버린 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단코, 이들이 구시대와 함께 희생되게 두지 않겠다.
우리는 혁명의 방관자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구시대를 쓸어내릴 주도자가 될테니.
이 부패하고 타락한 왕국은 무너져야 한다. 그 악취로 모두가 미쳐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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