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3화 (23/258)

내전기 - 라파예트의 전장 (4)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루이 왕은 격노했다.

일만과 오천, 병력만 두 배의 격차다.

거기에 왕이 바닥까지 긁어모아낸 전력, 왕국 제2검이라 불리는 그의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과 300명의 기사.

그에 맞서는 ‘청기사’ 휘하의 기사들은 기껏해야 100명도 되지 않았다.

국왕은 제아무리 청기사가 상대라 한들,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위풍당당하던 300의 기사와 기병들의 돌격은 맞돌격해온 청기사에게 정면으로 가로막혔다.

인간 흉기 이상의 무언가로 알려진 프랑지아의 기사들을 마치 잡병처럼 베어 넘기며, 300의 기사를 정면에서 위압하는 단 한 명의 기사.

눈으로 그 광경을 본 자들조차 믿지 못했다.

적들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청기사를 뒤따라 돌격한 적 기사들은 그를 지키다가 거의 전멸했고, 기병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흔들리고 무너진 그의 기사들은 동료를 찢어발기던 청기사가 유유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는 것을 보고도 쫓지 못했다.

개전 시에만 해도 2배가 넘는 병력으로 드높던 국왕군의 기세는 그대로 꺾여버렸다.

병사들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사들을 상대로 뛰어들어 헤집다가, 유유히 등을 돌려 귀환하는 청기사의 위용을 보고도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군대는 없다.

암암리에 진중에 도는, 청기사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서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왕의 인내심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경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내 그토록 경을 밀어주었건만, 저 빌어먹을 청기사의 위명을 하나 늘려놓기만 했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은 그저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이기만 했다. 그도 변명은 있었다.

두려움 없이 300의 기사를 헤집고 다니는, 위대한 기사를 보고 고양되지 않을 기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후작의 수하 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청기사를 지키려 들었고, 다르타냥은 그들을 처리하느라 청기사와 검을 맞대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도, 그와 함께 국왕의 앞에 굴욕적으로 무릎 꿇은 기사들도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청기사를 지키려고 달려들던 기사들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해도, 그들의 인명피해 또한 별다를 것 없었다.

국왕이 회심의 카드로 내놓은 300인의 기사 중 100명이 죽거나 다쳐, 지금 국왕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고작해야 200명이다.

루이 왕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고했다.

“저자의 기사들은 거의 다 죽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청기사의 목을 내 앞에 대령하도록.”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다르타냥과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으나, 왕은 씹어뱉듯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자의 목 없이는 돌아오지 마라. 경들 전부 저놈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

라파예트 후작.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는 그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일어날 때면 늘 옆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없어 허전한 감각은 생소하여,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즐겁게 만들고 육욕을 채워주던 애첩은 지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진중을 떠났다.

몇 번째 애첩이었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후작은 픽 웃으며 종을 흔들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비굴하게 굴던 자들도 항상 그가 아닌 그의 승리와 권위에 기대는 자들이었다.

늘 사랑을 속삭이며 애교를 부리던 애첩 또한, 그가 위험해지면 언제라도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나, 그 여자의 빈자리에서 그리 큰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도 그 정도로 얄팍한 관계였다고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시종이 세숫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들어와, 후작은 그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그를 내보냈다.

후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식사 때 먹고 남은 흰 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어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워진.

젊었을 적 전장에서 수도 없이 먹은 차갑게 식은 흑빵보다는 그래도 나은 물건일 터이나, 지금의 그에겐 입에 맞지 않았다.

후작은 쓴웃음을 흘리며 그것을 바닥에 뱉어버리고, 시종을 불러 그의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지난 전투의 여파로 여러 생채기가 나있으나, 그럼에도 광택이 도는 너무나도 유명한 검푸른 갑옷을.

-아들아. 이 아비가 못나 네게 영지 하나 물려주지 못했으나, 그것마저 없는 평민들보다는 나은 처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툴루즈 백작가의 일개 평기사였던 아비는 검약하고 명예로워,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자였다. 그는 그렇게 자위하는 패배자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천부적인 재능과 그것을 개화시킬만한 집념과 야망이 있었다. 전장에 나설 때마다 그의 용맹을 기리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그는 젊은 기사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를 탐낸 툴루즈 백작이 딸을 주었고, 그는 그렇게 귀족이 되어 후작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평기사 따위가 감히 탐낼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었고, 그만한 명성도 얻었다. 젊을 적 그가 누리지 못한 탐욕을 전부 채웠다.

권력, 재물, 육욕, 식욕, 모든 것을 채우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패배자인 아비와 달리 승리자인 자신의 인생과 모든 쾌락을 만끽했다.

갑옷을 전부 차려입은 후작은 천막을 나서기 전에 그가 얻어낸 무수한 전리품과 포상들을 둘러보았다.

더없는 영광이며, 과시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찬미 받아 마땅한 공훈의 증거.

그러나 이미 지겹도록 보고, 질리도록 과시한 그 잡동사니들에서 별다른 감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작은 천막을 나서, 성큼성큼 걸어 지휘막사로 향했다.

“위대한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각하를 뵙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영주와,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사들이 그에게 예를 갖춘다.

후작은 그들을 지나쳐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부터 툴루즈 백작령을 섬겨왔던 봉신과 가신들의 얼굴을 훑었다.

평기사 출신의 반쪽짜리 귀족이라고 고위 귀족들에게 멸시당하고, 백작의 은혜도 모르는 자라며 비난받던 후작이 끝내 얻지 못한 것.

그의 의도대로 라파예트 후작가의 이름 아래 묻혀버려, 이제는 잊힌 이름이 되어버린 툴루즈 백작가에 더는 권력도 명예도 없다.

아비가 선택한 남자를 믿고 신뢰하며, 자신의 권한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그를 돕던 어리석은 여자가 떠올랐다.

그가 빤히 애첩들을 끼고 사는 것을 보고도, 묵묵히 그것을 감내하던 그녀는 분명히 좋은 아내였을 터다.

그러나 툴루즈 백작으로서는 어리석은 자였다. 저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그 이름에 충성하는가?

저들은 어찌하여, 그의 아들이 영민들에게 칭송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 자신의 일처럼 뿌듯하게 말하며 떠드는가?

그가 끝내 얻지 못한 무엇이 있기에, 저들은 왕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인 그와 귀족의 수치로 낙인찍힌 그의 아들을 견주는가?

후작은 끝내 저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이루어낸 그 모든 부귀영화와 쾌락이, 무언지 이해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저들의 무언가보다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다 희미하여, 그가 어째서 그것들을 그토록 갈구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으니까.

“각하, 이제 기사는 겨우 6명 남았으며, 기병도 고작해야 300명이 남았을 뿐입니다.”

“로렌 공작에게 증원을 청하기는 했으나, 그가 원군을 보내준다고 해도 도달은 늦을 것입니다.”

후작은 조소를 흘렸다. 로렌 공작의 원군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도 피에르는 언급하지 않았다.

1,000으로 4,000을 막으러 갔으니, 대패나 안 하면 다행일 테지.

그러나.

-어울리지도 않게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대신, ‘청기사’다운 모습을 보이십시오, 각하. 저는 이길 작정이니까.

후작은 그의 아들이 패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생경하게 여겼다.

“송구하나, 각하. 지난 전투에서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각하의 위명은 왕국을 진동시킬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시어 후일을 기약하심이....”

“어디로 물러난단 말인가? 로렌 공작은 제 영지 건사하기도 바쁠 텐데, 제각각 자신의 영지로 향해 성벽 뒤에 쥐새끼처럼 숨어 제 한 몸이라도 보전해 볼텐가?”

후작의 답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내전이 그토록 길게 이어진 것은 두 세력이 거의 엇비슷한 세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2왕자에게는 우수한 기사들과 군대가 많았지만, 대신 1왕자에게는 부유한 귀족들과 청기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루이 왕이 확연한 우세를 점했다. 여기서 물러나는 순간, 모두가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전황은 더욱 기울기만 할 것이다.

“적들은 지난 전투에서 내 활약을 보고 기세가 꺾였을 터다. 그러니 이번에도, 싸운다.”

후작은 오만하게 선언했다.

-만약 각하께서 그러지 못하신다면, 저는 라파예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청기사’가 아니라 저를 떠올리게 해줄 작정이니까요.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아들이 장성하여, 도발적으로 내뱉은 언사가 그의 등을 채찍질했다.

후작의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다.

육체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위명을 잃어갈 것이다.

노년의 아비가 젊은 그에게 보내던, 경악과 질투가 서린 눈길을 기억한다.

후작은 그런 눈으로 피에르를 보는 자신을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나를 따르라. 그대들에게 다시 한번 승리를 안길 테니.”

“각하의 명을 받듭니다!”

결국 부귀영화와 쾌락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용맹과 위대함을 드러낼 때야말로 그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삶에 남은 것이기에.

-

다시금, 드넓은 니베르네 평야를 양측의 군대가 뒤덮었다.

후작은 특유의 검푸른, ‘청기사’의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선두에 섰다.

양군 모두에 긴장한 기색이 서린 가운데, 후작은 손에 쥔 창을 드높이 올렸다.

일순, 전장의 모든 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따르라!”

넘쳐흐르는 마나를 담아, 전장 전체에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을 전설로 만들어 주리라!”

그렇게 스스로 내뱉으면서, 후작은 희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답 따위 들을 필요 없다.

이 순간, 전장의 지배자는 그라고 확신했다.

후작은 바로 애마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적진의 정중앙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후, 후작 각하를 따르라!”

“청기사를 위해!”

“돌격, 돌격 개시!”

후작은 그의 뒤를 따라 맹렬하게 돌진하는 기사와 기병, 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르는 보병들을 흘긋 돌아보고, 다시 애마의 엉덩이를 박차 속도를 높였다.

그 숱한 부귀영화와 쾌락에도 권태롭기 짝이 없던 몸에 미칠듯한 활력이 내달린다.

압도적인 열세 속에 끝내 스러져버릴 목숨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한번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줄 것이라 믿고 따르는 불나방들의 복종에 전율을 느꼈다.

적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진다.

설마하니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머저리들의 혼란과 당혹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 사, 사격 개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비명과 낙마하는 자들의 소음이 들렸으나, 후작의 마력은 하찮은 미물들의 저항을 가볍게 튕겨냈다.

마법사들이 쏘아올린 불덩이들조차, 후작이 마력을 가득 실은 창을 휘두르자 그대로 두 동강 나 흩어졌다.

“창병대 앞으로! 앞으로! 저, 저걸 막아! 어떻게든 막아!”

적 지휘관의 경악으로 가득 찬 외침에 반쯤 얼어붙은 적병들이 바르작대며 헛된 저항을 시도한다.

그걸 본 후작은 창을 앞세운 채, 마력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누가 감히 청기사를 막느냐!”

귀청을 찢어발기는 고함이 폭풍처럼 적의 진영을 덮쳤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적의 전열이 무너져 내렸다.

창백하게 질려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자들과 아예 등을 돌려 도망치는 자들.

후작은 말을 타고 질주해 그 정중앙을 가로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전력으로 질주해온 가속도를 받은 창에 온 마력을 실어 내지르자, 단번에 살겠다고 바르작거리며 도망치던 자들이 수십 단위로 쓸려나간다.

그 광경에 경악한 적의 기사들이 몰려나오려고 했지만, 도망치는 적병들에게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광경이 우습게 느껴졌다.

일만의 군세가 선봉에 선 단 한 명의 남자에게 쫓겨, 길을 열고 있다.

“도망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도 좋다! 저 자를 가로막아라!”

“부, 분부대로!”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의 다급한 명령에, 마침내 200명의 기사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짓밟고 베어 죽이며 후작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작은 그 광경을 보곤 더욱 기세를 높여 돌진했다.

“막아라! 저 자를 막아!”

“누가 감히 나를 막는단 말이냐! 내가 바로 청기사다!”

후작이 분노를 담아 창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들이 잡병처럼 찢기고 두 동강났다.

“저 선제후와 황제들의 군대를 누가 막았는지를 기억하라!”

그것은 그가 일궈낸 위업이다.

“네놈들이 승리라고 찬양하던 그 전투에서, 내가 피칠갑을 하고 앞장서 검을 휘둘렀다!”

저 뒤에서 겁쟁이처럼 서있는 왕족이 일군 것이 아니다.

“저, 저자를....”

“네놈들이 찬양하던 승리는 나의 승리였단 말이다!”

격앙하며 휘두른 창이 마침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후작은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시선은 기사들로 가로막힌 길 뒤에 있는 국왕에게로 향했다.

후작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자, 저 멀리에 있는 왕은 마치 검에 찔리기라도한 양 움찔거렸다.

“내가 바로 청기사, 네놈들이 그토록 노래하던 프랑지아의 영광이다!”

“저 반역자를 막아라!”

후작과 다르타냥의 고함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후작은 맹렬하게 돌진했다.

달려드는 기사의 투구에 검을 찔러 넣고, 그대로 옆에서 달려들던 다른 기사까지 베어버렸다.

동료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드는 기사의 어깨부터 허리까지를 가르고,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진 검을 그대로 내던져 다른 기사의 머리에 박아버렸다.

허리춤에 찬 다른 검을 뽑는 사이 창에 찔린 애마가 구슬픈 비명을 질러, 후작은 말에서 뛰어올라 눈앞에 보이는 기사의 목을 날려버리며 또 하나의 검을 뽑아들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과 창을 두 자루의 검을 든 채 회전하여 전부 튕겨내고, 그대로 내던져 앞에서 달려들던 기사 둘의 머리에 박아버렸다.

후작은 앞으로 튀어나가 그 둘이 떨군 검과 창을 잡아채 그대로 휘둘렀다.

창에 목을 찔린 기사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러지고, 다른 기사가 검에 잘려나가 피를 뿜는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 지른다.

전신에 피가 끓어오르고, 눈에 핏대가 선 것이 느껴졌다.

막으라는 절박한 외침 따위 들리지 않는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와 병장기의 소음도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오직, 그에게 당하는 기사들의 비명과 절규만이 감미로운 노랫소리처럼 그의 귀를 울렸다.

누구보다 용맹하고 오만한 자들이 내뿜는 공포와 경악의 공기가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저 멀리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국왕이 그의 시야에 자리 잡았다.

후작이 한 걸음을 내딛자, 그를 둘러싼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고, 그를 둘러싼 기사들이 그만큼 물러나려는 순간 후작이 앞으로 돌진했다.

다시금 찔러 들어오는 무수한 검을 쳐내고, 돌격하며 베어낸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베고, 눈을 찌르고, 목을 날리고, 어깨를 쪼개고, 시체를 방패로 삼고, 부러진 검을 내던지고, 새 창을 빼앗아 휘두르고, 새 검을 뽑아 긋는다.

그 무수한 과정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사이, 그가 지나온 길에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가 생기고 후작의 몸 또한 숱한 상처를 입었다.

후작은 이제 방금까지 국왕이 서 있던 지휘 막사의 앞에 서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어지럽고, 팔과 다리에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후작은 내심 자신이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더욱 만족스럽게 싸웠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고통보다도 더 큰 흥분으로 환희에 차,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내 디뎠다.

그의 발에 짓밟힌 시체가 박살 나며 사방에 피를 튀겨, 그를 둘러싼 기사들의 갑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를 둘러싸고 막으려던 기사는 이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숫자밖에 남지 않았다.

후작은 자신의 갑옷이 본연의 검푸른 색을 완전히 잃고 완연한 핏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기사 왕국의 국왕이 단 하나의 기사가 두려워 버러지처럼 도망치다니, 네놈들의 충성도 실로 하찮구나.”

“...그대의 위명과 용맹을 그 명예라곤 없는 입으로 더럽히는구나.”

마침내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이 검을 뽑고 직접 앞으로 나섰다.

“흥, 부하들이 다 죽어나가는 동안 감히 나설 생각도 하지 못한 자가 입만 살았군.”

“네놈...!”

스테판과 살아남은 기사들이 분개하여 검을 겨누었다.

잠시의 대치가 이어지고, 그들과 대치하던 만신창이의 후작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 하!!!”

“...무엇이 그리 웃긴가?”

다르타냥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후작은 이 자리에 없는 그의 아들에게 고했다.

“이 싸움을 넘어서, 이 나를 잊힌 자로 만들 수 있겠는가?”

-

루이 왕은 불안 초조한 얼굴로 기사들과 그의 근위기사단장이 후작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길, 제길, 제길, 어떻게 저거 하나를 죽이질 못해서...!”

일만의 군세를 가르며 돌진해오는 단 한 명의 기사.

후작이 그의 기사 200명을 마치 허수아비처럼 베어 넘기며 그를 향해 돌진해 오는 광경을 보았을 때, 루이 왕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오줌을 지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루이는 후작과 그의 기사들이 싸우는 장소에서 시선을 돌려, 적의 군세 배후에서 이쪽을 향해 접근 중인 군대를 바라보았다.

앙쥬 백작가의 깃발을 높이 세운 군대.

며칠 전 아키텐의 여백작과 앙쥬 백작을 비롯한 중립파 귀족들의 선전포고문을 받고 코웃음쳤건만, 벌써 군대가 도착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들이 도달하기 전에 청기사를 죽여야만 해!”

방금 전 지려버린 아랫도리는 축축한 불쾌감을 주어 그의 조급함을 더욱 부채질했다.

루이 왕을 둘러싼 신하들은 히스테릭한 왕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청기사 앞에서 패닉에 빠져있던 왕은 만약 증원이 오지 않았다면, 신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바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들의 뒤에서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내건 2,000가량의 군대가 접근 중이다.

남부로 향한 저들이 무슨 연유로 귀환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가뭄의 단비 같은 증원이다.

사유는 도착하면 들어도 될 일이고, 의외로 선전하여 라파예트의 소후작을 사로잡거나 해서 일부 부대가 돌아오는 걸 수도 있으니 왕도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고 자리를 지켰다.

병력이 두 배라고는 해도 전투 개시와 동시에 예기치 못한 후작의 행동에 진 형이 무너져버린 상태다. 국왕까지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 전투는 그대로 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단신으로 1만의 병력을 돌파하고, 200의 기사를 거의 다 죽이고, 그러고도 모자라 만신창이의 몸으로 근위기사단장을 상대로 오래도록 버티던 청기사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정적만이 감도는 가운데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이 천천히 쓰러진 청기사에게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마침내 목이 잘린 검푸른 투구가 그의 손에 들리자,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주, 죽은 거겠지? 정말로 죽은 거겠지?”

루이 왕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깊이 안도했다.

국왕군 전체가 환희에 차고,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기세를 타서 잘싸우던 라파예트의 군세가 절망에 빠지는 순간.

“저, 전령!”

불청객이 루이 왕에게로 달려왔다.

“뭐냐?”

“새로이 미르보 백작이 된 데미앙 드 미르보 각하의 전언입니다, 폐하. 남부로 향한 군대가 대패했습니다! 브르타뉴 공작 각하와 선대 미르보 백작 각하께서도 전사하셨습니다!”

“무, 뭐라고?”

루이 왕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브르타뉴 공작이 이끌고 간 4,000의 군대가 대패? 소후작의 1,000에게? 심지어 공작과 백작이 다 죽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아니, 그보다도.

루이 왕은 삐걱거리는 시선을 돌려,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내걸고 그들에게로 접근 중인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엇이더냐?”

그리고 루이 왕은 맹렬하게 말을 달려, 그의 본대를 향해 접근 중인 한 명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전장의 모든 이들의 시선은 잘린 청기사의 머리를 들어 올린 다르타냥에게 향해 있다.

그래서 급속도로 접근한 그 기사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화살을 거는 동안 국왕과 그 신하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기사가 쏘아 올린 화살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고 가속하여-

청기사의 머리를 든 다르타냥에게로 쏜살같이 추락했다.

청기사를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고, 승리에 방심하고 있던 기사는 뒤늦게 마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소진될 대로 소진된 기사의 뒤늦은 저항은 마력과 신성력을 가득 머금어 혜성처럼 푸른 불꽃을 내뿜는 화살을 막아내지 못했다.

모두가 보는 가운데, 청기사의 목을 들고 있던 기사의 마력이 깨져나가고 과도하게 응축된 기운의 화살을 맞은 몸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루이 왕과 그 광경을 보던 모두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경악하는 순간, 마력이 가득 실린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라파예트의 군사들이여, 공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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