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2화 (22/258)

내전기 - 라파예트의 전장 (3)

연이은 포성이 지나간 뒤, 대다수의 기사와 기병들은 인간의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운 좋게 살아있는 자들조차 잃어버린 팔이나 다리를 붙잡고 비명 지르며 바르작거리고 있거나, 완전히 얼어붙은 채 이성을 잃은 자들뿐.

그걸 옆에서 본 아군은 물론이고, 포격을 가한 포병들도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거나 심지어 구토하는 자들까지 나왔다.

나는 그 꼴을 보자마자 말을 다그쳐 포병들의 앞으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재장전 서둘러!”

“재장전 개시!”

작전이 제대로 먹혀서 기사들을 쓸어버렸다고 해도, 적 병력은 우리 2배를 아득히 상회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달려들던 적들도 처음 보는 형태의 전투에, 주력 중의 주력인 기사들과 기병들이 일거에 쓸려버린 상황을 보고 멍하니 굳어있다는 것뿐.

포성은 이쪽보다, 저 후방의 고지대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혼란만이 가득하던 적의 전열에 또다시 강철탄이 날아들자, 적들이 더욱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화승총병 사격 준비시켜! 빨리!”

“예, 옛!”

“재장전 완료!”

“발사!”

포병들이 귀를 틀어막고, 이번엔 원형탄이 근처까지 다가온 적병들에게 날아들었다.

이 거리에서는 처참하게 비명 지르다 강철탄에 으깨지며 날아가 버리는 적병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총병대 준비되었습니다!”

“발사!”

이내 그 뒤를 따라 화승총병들의 총이 불을 뿜고, 무수한 병사들이 쓰러지자 기사들의 최후를 목격한 적의 중앙부터 양옆으로 점점 동요가 번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소후작님, 적 마법사가!”

그러나 꽂을대로 열심히 총구를 쑤시고 있던 총병들의 머리 위로 물세례가 떨어지며, 순식간에 수십 명의 총이 못 쓸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저 정도면 아직 괜찮아!

“장전하고 계속 사격시켜! 적들은 이미 머리를 잃었다!”

이제, 곧.

그러자마자 숲에서 튀어나온 기병들이 가스통을 선두로 하여, 멍하니 서서 포격과 사격을 얻어맞고 있던 적병들의 측면으로 내달리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나도 바로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전원 발검시켜! 돌격 준비!”

“저, 전원 발검!”

“돌격 준비!”

화승총병들이 급히 총을 내던지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고 창병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지만,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자들이 미적거리는 것이 답답하기 그 지없다.

“돌격하라! 쓸어버려!”

결국 내가 말을 박차서 제일 먼저 내달리기 시작하자, 기겁한 자들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헉, 소후작님을 따르라! 총 공격!”

“돌격! 돌격하라!”

머리를 잃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연이은 사격과 포격에 얻어맞은 적들에게, 순식간에 아군이 쇄도한다.

완전히 패닉과 혼란에 빠진 적들의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건 이겼다.

-

데미앙 드 미르보는 완전히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공격하려다가 기사들이 몰살당하는 충격적인 광경에 그대로 멈춰 선 병력들이 포격과 사격에 난타당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라파예트 소후작.

그자를 상대할 때는 언제나 이겼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처절한 패배의 순간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겁쟁이처럼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데미앙도 이런 처참한 패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4,000과 1,500의 싸움.

기사도 이쪽이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공작과 백작의 깃발을 앞세워 돌진했던 기사와 기병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공작도, 백작도, 심지어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형까지.

문자 그대로, 군대의 머리와 주력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사태에 국왕군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고, 공! 아니 각하! 이제 각하께서 책임자십니다!”

“무, 뭐?”

측근 기사 카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서 멍하니 대답한 데미앙에게, 카젤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백작 각하도, 소백작님도 전사하셨습니다! 데미앙 드 미르보 각하! 이제 각하께서 지휘관입니다!”

“전령! 숲에 매복해 있던 적 기사와 기병들이 측면으로 돌격해오고 있습니다!”

“각하! 어찌해야 합니까, 각하!”

“저, 적 돌격 개시! 적의 총공세입니다!”

사방에서 절박하게 지시를 요구하는 아우성이 먼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토록 갈구했던 미르보 백작의 자리에 강제로 올라버린 데미앙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수적 우세가 무색하게 완전히 혼란에 빠져 대형이고 뭐고 엉킨 채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국왕군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밀물처럼 이쪽을 향해 밀려드는 적들과, 그 선두에서 라파예트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해오는 기사까지.

울부짖는 사자의 문장. 익숙한 라파예트의 문장을 본 데미앙은 등에서 강렬한 환상통을 느꼈다.

첫 번째로 조우에서 그에게 당해 낙마했을 때의 감각, 그리고 두 번째로 조우했을 때 도망치다 화살에 맞았을 때의 악몽과 같은 기억이 그에게 소름 끼치는 기분을 안겼다.

“저, 저자에겐 이길 수 없어.”

“예?”

“도망쳐!”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하!”

그나마 후방에 있던 기사와 가신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데미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퇴각시켜! 전군 퇴각! 각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라!”

-

“으, 으아아-! 저리 가! 저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자의 등을 그대로 검으로 갈라버리고, 그보다 조금 앞에서 달아나던 자는 단도를 뽑아 날려 처리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뇌부가 무너져버린 적들은 완전히 와해되다시피 했고, 가스통과 기병들은 무자비하게 그들의 뒤를 추격하며 전과를 확대하는 중이다.

적의 구체적인 피해 수준은 모르겠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아군의 피해가 경미하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뒤쪽에서 말에 탄 채 이쪽으로 접근 중인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 바로 말을 달려 그 쪽으로 다가갔다.

“...축하드려요, 소후작님. 솔직히 걱정이 컸는데, 생각도 하지 못한 대승이 네요.”

일행의 선두.

평소의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군복 바지 차림에 멋들어진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말에 탄 크리스틴이 담담한 말을 건네왔다.

저런 차림으로도 검은색을 고집하는 것은 퍽이나 그녀답다고 느껴졌다.

“백작님의 후방 지원이 적절했던 덕분입니다. 이곳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빠듯했을 텐데, 제때 맞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숲속의 고지에서 포격 지원을 지휘하던 건 크리스틴이다.

그녀는 내 요청대로 비밀리에 양성한 1,000의 군대를 이끌고 제때 합류해 주었고, 정확히 내가 주문한 대로 공작의 심기를 긁어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죠?”

“저는 바로 전군을 수습해서 니베르네 평야로 향할 겁니다.”

“후작 각하의 본대를 지원하시는 거군요.”

“그래야죠. 이쪽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본대가 무너지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 다만....”

“카론 남작이 영지의 병력을 소집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적의 잔당을 섬멸하고 라파예트의 영지를 방어하는 건 아키텐에 맡겨주세요.”

“...그건 고마운 말씀이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그래도 적 병력은 여전히 상당할 거다. 산산조각 난 오합지졸이라곤 해도 후작령을 아예 비우고 이동하기는 부담되지.

그러지 않아도 내가 부탁하려고 하던 일이긴 했지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나선 크리스틴은 놀랍다.

내가 맡겼던 병력을 데리고 와서 일부를 지휘하는 것까지는 계약에 포함된다 치더라도, 아키텐의 영지 병력을 데리고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명백한 내전참여니까.

“뭘 새삼. 국왕에게 경고장을 보낸 것도 미리 깔아둔 포석이죠. 혹시나 소후작님이 여기서 패배하셨다면 그대로 영지로 내빼서 모르는 일인 것처럼 굴었겠지만, 이기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크리스틴은 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의 비밀 동맹은 끝입니다. 이제부터는 정식 동맹 자격으로 바쁜 소후작님을 대신해 이미 무너진 적에게서 수확을 거두도록 하죠. 이미 이긴 전투에서 과실만 거두는 일을 마다할 상인이 있나요?”

아, 정말이지 못 당하겠네.

“진심으로, 당신이 동맹이라서 다행입니다. 백작님.”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 악수를 청하자, 크리스틴도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공교롭네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요, 소후작님. ...앗?”

나는 힘주어 그녀를 가까이 당겨,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덧붙였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크리스틴. 아까 보니 후방에도 기사가 몇 있었습니다.

당신의 안전이 어떤 전과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크리스틴은 내가 당길 때 조금 놀란 것이 무색하게 도발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누가 할 소리를. 당신이야말로 조심해요, 피에르. 저는 당신을 믿고 이 싸움에 투자한 거니까.”

절로 웃음이 나와서, 그녀의 손을 놓고 물러섰다.

“하하, 알겠습니다. 주의하죠, 백작님. 제 덕분에 챙긴 전리품은 나중에 조금 분배해 주시겠죠?”

“소후작님 하시는 거 봐서요.”

역시나 단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군.

나는 바로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깃발을 알아본 하사관들이 집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나는 흘긋 크리스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나를 등진 채 가신들에게 지시하느라 바쁘다.

나도 곧 말머리를 돌렸다. 맞닿을 리 없는 등이 맞닿은 것 같은, 든든한 감각을 느끼며 다음 전장으로 향한다.

다음은 메인 디쉬, 루이 왕이니까.

-

프랑지아 왕국 동부, 베르?

오를레앙 공작의 군세와 로렌 공작의 군세는 처음 조우한 며칠간은 산발적인 탐색전을 벌였으나, 이내 서로를 마주 보며 진을 친 채 눌러앉아 있었다.

멋들어진 털모자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병 제복을 입은 장신의 남자는 말에 오른 채 저 멀리에서 한가롭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진영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대장!”

“여어, 수고들 한다. 나 오늘도 좀 잘 생겼지?”

“하하, 예에, 예. 잘 생기셨습니다요.”

남자는 제법 뻔뻔한 질문을 던지고, 이미 익숙하다는 듯 반쯤 영혼 없는 대답을 들어가며 진영 정중앙의 천막 앞에서 말에 내렸다.

“대장님.”

“어어, 수고해. 나 들어간다?”

“예, 예.”

적당적당하고 대충대충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천막으로 들어선 남자는 이내 아주 대놓고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코 고는 소리는 천막의 구석에 놓인 야전침대 위에 놓인 이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이, 사령관.”

당연히 답은 없었고,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이불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드르렁- 컥! 무, 뭐야!”

“전장에서 근무 중에 대놓고 코를 골며 처자고 있기는, 아무리 귀족 놈들이 건성으로 싸운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가, 이불을 치우며 일어난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제롬. 어차피 우리 안 싸운다니까? 귀족 새끼들은 그거 빤히 알 테니 시찰도 안 할 거야.”

“얼씨구, 네가 무슨 예언자냐.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러니까 네가 내 부관이고 내가 네 상관이지. 제롬 모렐.”

“허, 그러셔. 잘 나셨수다, 발리앙 나으리. 이 돌대가리는 나으리의 혜안이 도통 이해가 안 되니, 친절한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제롬 모렐이 절친한 친우의 재수 없는 발언에 한껏 비아냥을 담아 말하자, 라파엘 발리앙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군은 6,000이나 되지만 기사가 거의 없어. 오죽하면 우리 같은 도시 병력을 용병으로 데려왔겠어? 저 높으신 오를레앙 공작은 애초부터 싸울 생각 없이, 그냥 보이기에 그럴싸한 머릿수만 챙겨서 온 거야. 아마 주력군과 기사들은 저 중부에 다 몰려있을걸. 왕이 청기사 목이라도 딸 작정인가 보지.”

“허.”

“이쯤 되면 로렌 공작이 병신이 아니면 수상한 걸 느끼고 공격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로렌 공작은 병신이 맞거든. 전체적인 대국보다는 괜히 더 많은 병력 찔러봤다가 자기 병력 잃는 게 더 아까운 소인배야. 그러니 양측 이해의 일치로 교전은 없음. 가짜 전쟁만 질리게 할 테니, 우리는 그냥 용병비만 두둑이 받고 배 두드리며 집에 가면 되는 거라고. 이해돼?”

그렇게 말한 라파엘 발리앙은 다시 하품을 하더니, 이불을 끌어안고 꾸물거리며 야전 침대로 기어올랐다.

“그러니 걱정 붙들어매고, 내 낮잠을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에이, 염병. 모처럼 말에 타고 멋지게 활약해서 무용담이나 쌓고 싶었는데, 텄구만?”

혀를 차는 친우의 목소리에, 라파엘 발리앙은 한번 더 하품을 하더니 동의했다.

“그러게. 나도 기왕 나왔으니 좀 싸워봤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말이야. 이 빌어먹을 기사 왕국에서는 영 기회가 없어요.”

실로 나태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을 한 라파엘 발리앙은 이불을 뒤집어쓴채 잠시 뜸을 들였다가, 짐짓 유쾌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살벌한 말을 덧붙였다.

“아아, 어디서 나라 한번 확! 안 뒤집히려나? 그러면 조금은 재미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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