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1화 (21/258)

내전기 - 라파예트의 전장 (2)

프랑지아 왕국, 니베르네 평야 북부.

“이 빌어먹을 자들이....”

루이 왕은 지휘막사에서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껏 소집한 삼부회에서 평민들이 사람 수가 많은 제3신분에 더 많은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쳐서, 삼부회의 이야기를 꺼낸 그만 우스워진 꼴이 되었다.

비천한 자들이 귀족이나 성직자와 대등한 자격을 요구한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래도 반란군 토벌을 위해 출정은 해야 하니, 화를 억누르며 진격한 그에게 날아든 서신은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즉위를 축하하며 신이 그를 축복하기를 바란다는 문장으로 시작된 길고, 장황하고, 화려하고, 정중한 서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국왕으로 즉위하신 것은 축하드리나 나라 망하게 생겼으니 그쯤하고 내전을 끝내는 대국적 결단을 해주시면 어떻습니까? 그리하여 주신다면 폐하의 자비를 찬양하는 의미로 금전적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폐하께서 끝내 내전을 이어가 왕국 귀족의 반을 숙청하고자 하신다면, 저희도 부득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아키텐의 여백작과 앙쥬 백작을 비롯하여 내전에서 중립을 지킨 가문들의 서 명이 적힌 서신.

사실상 내전을 끝내지 않으면 중립 귀족들이 적에게 붙을 수 있다는 협박이다.

“빌어먹을, 죄다 반역자 놈들이야. 전부 다 쓸어버려야 해....”

어차피 빚더미에 깔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한 꼴이다. 거기서 또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손을 빌려 출정한 루이 왕으로서는 내전을 끝낸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 대상 외다.

다행히, 마침 들어선 봉신이 그에게 간만의 낭보를 알려주었다.

“위대한 국왕 폐하, 저들도 군대를 세 방면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로렌 공작이 4,000의 군세를 이끌고 오를레앙 공작을, 라파예트의 소후작이 1,000의 군세를 이끌고 브르타뉴 공작을, 그리고 ‘청기사’가 5,000의 군세로 폐하를 저지하려는 듯합니다.”

보고를 받은 루이 왕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렌 공작은 역시나 보신주의고, 청기사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를듯하구나.

고작 5,000의 군세로 짐을 막겠다? 하하하....”

“저들의 어리석음이 실로 크오나, 브르타뉴 공작의 군세가 생각만큼 적을 분산시켜주지는 못한 듯합니다, 폐하.”

“흠. 그건 조금 아쉽군.”

루이 왕은 아쉬움을 느끼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2만이나 되는 대병력의 출병을 가능하게 한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 때문에 라파예트에 대한 공격을 가하긴 해야 했으나, 루이 왕은 4,000이나 붙여줬으니 못해도 2,000은 끌어들일 거라 기대했었다.

“그건 그렇고, 저들에게 인재가 그리 없단 말인가? 미르보의 멍청한 차남을 격파한 것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귀족의 수치를 지휘관으로 삼다니?”

“아무래도 라파예트 후작가 외에는 직접적으로 피해 입는 가문이 없으니 나선 자가 없어서겠지요.”

“흥, 오합지졸 같으니. 브르타뉴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서, 저들을 격파하고 후작령을 철저히 약탈하라고 하라.”

“그리하겠나이다, 폐하.”

고작 1,000밖에 끌어들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브르타뉴 공작의 4,000이면 능히 소후작을 격파하고 후작령을 유린할 수 있다.

지금은 그보다는 청기사다. 다행히 남부로 빠진 병력은 적어도, 로렌 공작이 많은 병력을 동부로 차출해가서 루이 왕이 상대해야 하는 병력은 고작해야 절 반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잔챙이들이 아니라 청기사다.”

기사들의 나라 프랑지아 왕국에서는 병력의 적고 많음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않는다.

하찮은 잡병들이 아무리 많아봐야, 기사들의 돌격을 허용하면 그대로 전투가 끝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 숫자를 신경 쓰는 이유는, 대개 병력 숫자에 비례하여 그만큼 많은 기사들이 편제되기 때문이다. 특히 영주 기사들은 대개 지휘관을 겸하니 더욱 그렇다.

보통은 그랬을 터이나.

루이 왕은 그의 옆에 선 근위기사단장, 스테판 다르타냥을 바라보았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왕국 제2의 기사이나, 오직 청기사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없는 패배의 고배를 마신 그의 기사.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네, 경.”

“예, 폐하. 명심하고 있습니다.”

다르타냥조차 단독으로 청기사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내전 내내, 2왕자파는 청기사의 군대를 피해 도망 다니며 청기사가 없는 군대를 습격하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애초에, 이런 대병력을 운용할 자금을 지원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내건 조건은 라파예트의 몰락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후작을 강조했지만 루이 왕과 그 수하들은 자연스럽게 소후작 따위보단 청기사에 주목했다. 그들에게 라파예트는 청기사 그 자체이므로.

오를레앙 공작이 데리고 나간 6,000의 병력에 기사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의 역할은 단지 로렌 공작의 병력과 기사들의 시선을 끌며 동부에 묶어두는 것이다.

루이 왕은 청기사를 처리하기 위해, 프랑지아 왕국 내에 남은 거의 모든 기사를 소집해 그가 이끄는 1만의 본대에 무려 300명의 기사를 준비해두었다.

사실상 긴 내전으로 씨가 말라가는 기사들을 모두 끌어모은, 오직 왕국 최강이라 불리는 기사를 처리하기 위해 준비된 전력이다.

로렌 공작이 평소 성향대로 보신적으로 나온 이상, 이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전투다.

루이 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확신했다.

“차라리 내전 초기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 이번에는 그 빌어먹을 청기사를 반드시 쓰러트리도록. 그자만 없으면 저 반역자들은 바람 앞의 등불이야!”

-

베리 평야 남부, 프랑지아 중부 숲지대의 초입.

“이건, 조금 놀랍군. 지연전이 아니라, 회전을 걸어오다니.”

미르보 백작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방면군 총사령관, 브르타뉴 공작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4,000의 군세 중 대부분은 미르보 백작과 그의 봉신들이 제공했음에도, 총사령관은 국왕의 권신인 브르타뉴 공작이다.

미르보 백작은 괜시리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가 한때 아끼던 차남 데미앙드 미르보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 머저리가 미르보의 위신을 땅 밑바닥으로 처박지만 않았어도, 남서방면군의 총사령관 자리는 그의 것이었을 텐데!

미르보 백작이 불만으로 가득하든 말든, 브르타뉴 공작은 감탄하는 얼굴로 숲초입에 주둔 중인 적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정보에 따르면 라파예트 소후작을 따르는 군세는 1,000 가량이라고 했는데, 눈앞에 주둔 중인 군세는 아무리 봐도 그보다 많다.

“1,500 정도인가? 우리가 알던 것보다 많은데.”

“그런 듯합니다, 각하.”

거대한 프랑지아 중부의 숲 지대와 조금 거리를 두고 긴 횡대로 진을 친 군세의 모습에, 브르타뉴 공작은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쪽이 압도적인 우세인 것은 다를 것 없지. 하지만 특이하군. 숲을 등지고 횡대로 진형을 짜다니....”

브르타뉴 공작은 여유 있게 관조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미르보 백작으로서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국왕에게 미르보 백작가의 이름을 다시 각인시켜야만 한다.

“우선 전진하시지요, 각하.”

“흠. 좋네, 우선 조금 전진해보지.”

공작의 허가가 떨어지고,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4,000의 군세가 평야를 따라 전진을 시작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대로 제자리에서 진형을 갖추고 있는 라파예트의 군사들이 들고 있는 병기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중앙에 화승총, 양익에 창병대라? 흥미롭군. 긴 횡대로 숲을 등지고 포진해 기사들이 우회하지 못하게 하고, 중앙에서는 화승총으로 화력을 극대화하려는 건가?”

보병이 중앙에서 싸우고, 기사와 기병들이 양익에서 대결하여 이긴 쪽이 적의 측후방을 노리는 것이 프랑지아 왕국의 일반적인 교리다.

그러니 숲을 등진 채 적은 병력을 횡대로 늘리고 양옆을 창병으로 틀어막아, 기병이 측후방을 노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포진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였다.

“나쁘지는 않은데, 어설프군.”

하지만 저 진형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창병들이 기사와 기병대를 제대로 저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총탄도, 창도 다 뚫어버리는 프랑지아의 기사들을 횡대로 늘어선 창병들이 저지할 수 있나?

“어쩌면 패배하더라도 기사와 기병들의 추격을 당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숲을 등졌는지도 모르지요.”

미르보 백작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숲으로 무질서하게 패퇴한 군세가 얼마나 남겠나? 그럴 거라면 싸움을 걸지 말았어야지.”

두 지휘관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라파예트의 진영에서 푸른 깃발이 높이 올라왔다.

“저건 무슨 신호지?”

의문은 길지 않았다. 숲 뒤쪽의 고지대에서 연달아 폭음이 울렸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듣기 싫은 굉음과 함께 날아든 원형의 강철탄이 전진하고 있던 국왕군을 스쳐 지나갔다.

“...포격?”

그러나 두 번째 탄은 그렇지 않았다.

재수 없게 종대로 행군 중이던 군대에 떨어진 강철탄은 무언가가 부러지고 끊어지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군대를 짓이기고 지나갔다.

그러고도 연달아 3탄, 4탄이 행군 중인 군대의 머리 위와 옆으로 날아들자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작 각하! 저들이 숲 뒤의 고지에서 대포를 쏘고 있습니다!”

“나도 눈이 있어서 안다.”

브르타뉴 공작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공성용으로나 쓰는 무기로 병력을 타격한다라.”

들리는 소리와 간격으로 볼 때 포문 수가 많지는 않다.

그것만으로 4,000의 병력에 무슨 대단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작 각하! 저런 얇은 횡대 따위, 단숨에 돌격하여 짓밟아 보이겠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고, 미르보 백작과 기사들은 몸이 달아 보채기 시작했다.

“쯧.”

돌격하면 가볍게 짓밟을 수 있어 보이긴 하나, 적이 노리는 대로 휘말려 주는 것 또한 내키지 않는다.

프랑지아 왕국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전술에 일가견이 있는 브르타뉴 공작은 되도록 우아하게 싸우고 싶지, 적에게 휘말리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길게 횡대로 늘어선 화승총병들의 일제사격이 병력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 자명한 상황에, 국왕이 맡긴 군대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적은 비만 뿌려줘도 습기에 취약한 화약은 바로 무력화된다. 그러고 나면 손실은 최소화 되니, 돌격은 그 이후여도 무방하다.

“물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들을 앞으로 보내라. 저 총병들에게 물세례를-”

공작의 말은 재장전을 마치고 터져 나온 포성에 끊겨버렸고, 다시금 굉음을 내며 날아든 포탄 중 2발이 그의 군대를 덮쳤다.

공작은 슬슬 짜증이 치미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닌 척하며 상급자인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미르보 백작도 거 슬리는데, 별것도 아닌 적에게 휘말리고 있는 꼴이라니.

“...맛 보여주라고 해.”

“옛!”

공작의 명령이 전달되고, 로브 차림의 마법사 셋이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마치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적진에서 말을 탄 기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저건, 뭐 하는-”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활을 든 기사가 말을 달리는 채로 화살을 쐈다.

“끄, 끄륵-”

마법을 준비하며 주문을 외우고 있던 마법사는 영문도 모른 채 목에 화살을 맞았고, 그대로 신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뒤로 축 늘어졌다.

“라파예트....”

공작은 적 기사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보았다. 청기사가 아닌 라파예트니, 소후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후작은 빠르게 다른 화살을 뽑아 날렸다.

“크학!”

두 번째 마법사는 나름대로 마력을 모아 자신을 보호하려 했으나, 소후작이 쏜 화살은 푸른 기운을 품은 채 그대로 마법사의 마력을 관통하고 그에게 적중했다.

“으아아, 아아악!”

“고, 공작 각하!”

하나는 화살이 팔에 박혀 비명 지르며 몸부림치고, 그나마 남은 마법사 하나는 헐레벌떡 도망쳐서 공포에 질려있다.

“궁병들은 뭐 하나!”

“거, 거리가 멉니다. 백작 각하. 저 정도 거리까지는....”

“허!”

기사 주제에 비겁하게 활질을, 그것도 마력까지 실어서 일방적인 거리에서 마법사만 노린다?

마치 그가 마법사들로 화승총병을 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저 애송이에게 수가 읽혀 귀중한 전력인 마법사를 허비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드디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잔재주를....”

그리고 다시,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도 강철탄 중 하나가 부대를 헤집어놓았고, 이쯤 되자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는 곳이 공작의 눈에도 극명하게 보였다.

“공작 각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면 피해만 누적됩니다!”

“돌격 명령을 주십시오! 단숨에 저 빈약한 진형을 돌파해 보이겠습니다!”

기사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자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있던 미르보의 차남, 데미앙 드 미르보가 입을 열었다.

“가, 각하! 저 라파예트의 소후작은 극도로 교활하고 간교한 자입니다!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숲속에 병력을 더 숨겨놓았을지도 모릅니다!”

“닥쳐라! 네놈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기사들의 아우성과 울컥한 미르보 백작의 호통은 공작의 정신을 더 사납게 만들 뿐이다.

브르타뉴 공작은 마법사들이 몸을 사리며 진형 속으로 몸을 숨기자, 여유작작한 폼으로 자신의 진형으로 돌아가는 소후작을 노려보았다.

숲에 추가 병력을 숨겨놓아 매복을 준비했다?

저렇게 병력을 길게 횡대로 늘려서 더 많은 병력으로도 측면이 공격당하지 않게 하고, 교전이 시작되면 숲에서 튀어나와 옆을 친다.

확실히 있을법한 일이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보이는 적의 진형과 숲을 살폈지만, 기사의 시력으로도 애매하게 고지에 위치한 적 진형의 구조와 숲 내부까지 뚫어 볼수는 없었다.

공작이 생각에 잠긴 사이, 또다시 포성이 울리고 포탄이 날아들었다.

전체적인 병력으로 보자면 별것도 아닌 피해인데도 불구하고, 종대로 모여 있는 병사들의 진형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고작 1,500의 병력에게 그가 이끄는 4,000의 병력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귀족의 수치라 불리는 자 따위에게 그가, 전술가로 이름 높은 브르타뉴의 공작이!

공작은 마침내 투구의 덮개를 내렸다.

“기사들, 집결하라! 단숨에 적을 친다!”

“가, 각하. 각하께서 직접 돌격하십니까?”

바로 우려가 나왔지만, 그도 입장과 체면이 있다. 하찮은 미르보 백작 따위가 은연 중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수치스럽게 뒤에 숨어 있어서야 이겨도 위신이 살지 않는다.

“나를 뭘로 보는 것이냐! 나 또한 프랑지아 왕국의 기사다!”

“...옛!”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미르보 백작을 포함한 30명의 기사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고, 그 뒤를 중기병들이 따랐다.

“하! 애송이가 제법 사람을 도발하는 법을 아는구나. 좋다, 이 이상의 피해를 입어서야 폐하를 뵐 낯이 없지.”

저 애송이가 손실을 강요하며 돌격을 유도한 다음, 숲에 매복시켜둔 군대로 측면을 칠 작정이었나본데....

“나를 선두로 기사와 중기병이 중앙으로 돌격하여 단숨에 적 진형을 양단시킨다. 보병은 양익을 맡고, 예비대를 남겨 적의 매복에 대비하라.”

딴에는 기병의 측면공격을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정면을 허술하게 만들고 길게 횡대로 편 진형은 큰 실책이다.

매복이고 뭐고, 저렇게 얇게 편 횡대라면 중앙에 기병이 뛰어드는 순간 제때 지원조차 하지 못한 채 붕괴될 수밖에 없다.

“가, 각하, 외람되나 이것도 적의 계략일 수도....”

“기사가 되어서 무슨 겁쟁이 같은 소리인가!”

“네, 네놈이 정녕 나에게 죽고 싶구나!”

미르보의 차남이 또 나섰지만, 대번에 기사들과 백작에게 면박을 당했다.

감히 저 애송이가 그의 생각을 모조리 읽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브르타뉴 공작도 분개했다.

“그렇게 불안하다면, 그대는 예비대의 지휘를 맡아라.”

기사에게서 돌격의 명예를 박탈하는 명령.

더는 없을 수치에, 미르보 백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데미앙 드 미르보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어째 조금 안도하는 듯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그 겁쟁이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와, 다시금 울리는 굉음과 포격이 진형을 헤집어놓는 소리가 브르타뉴 공작의 불쾌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공작은 창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프랑지아 왕국에 명예를, 국왕 폐하께 승리를! 진격하라!”

-

적 진영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명령을 전하는 깃발이 쉴 새 없이 춤을 춘다.

적의 기사들과 중기병이 적진의 중앙에 포진해 있다가, 보병들이 갈라지며 우리 군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중앙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지평선을 가득 메울 기세로 달려드는 수천의 보병들도.

수백의 기병이 질주하는 소리와, 그에 맞춰 울리는 지면의 진동이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순간의 긴장감이 우리 진형에 퍼져 나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말에 타고 손에 깃발을 쥔 채, 앞에서 초조해하며 내 명령만을 기다리는 하사관들의 기색을 살폈다.

아직, 아직 아니다. 조금 더 끌어들여야 한다.

나는 고개를 들어,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의 깃발을 선두에서 휘날리며 용맹하게 돌격해오는 기사들의 위용을 바라보았다.

점점 더 빠르게 접근해오며, 이 돌격으로 단숨에 진형을 붕괴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

프랑지아 왕국의 자랑이자 최강의 전력인 기사.

마력으로 스스로를 강화한 채 창병이고 총병이고 할 것 없이 평등하게 쓸어버림으로써, 왕국의 전술이 오히려 구시대에 안주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

동시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확연하게 낙후되고 뒤처진 사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평민들이 감히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 자들.

“소, 소후작님!”

이제는 지척까지 다가온 압도적인 기사들의 위용에 2열 횡대로 세워둔 총병들이 혼란에 빠져가자, 하사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나를 불렀다.

그에 호응해, 손에 든 지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사격 개시!”

“발사해!”

횡대로 길게 늘어선 군사들의 총이 불을 뿜으며, 총성이 파도 타듯 번져나간다.

매캐한 초연이 피어오르지만, 운 없이 너무 앞장서 나와 있던 기병들이 몇 낙마하여 떨어졌을 뿐이다.

푸르스름한 마력으로 몸과 군마를 보호한 기사들은 그대로 건재하게 돌격해오고 있다.

내가 바로 깃발을 좌우로 흔들었지만, 사실 신호를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화승총의 일제사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돌격해오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린 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사들을 피해 좌우로 갈라지며 도망치기 시작했으니까.

기세 좋게 돌격해오던 적의 기사와 기병들은 그렇게 군사들이 도망 쳐버린 뒤로, 날카롭게 깎아놓은 목책이 길게 쳐져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운없게 도망치는 것이 늦은 군사들 몇은 그들에게 말발굽으로 채이거나 베여버렸지만, 맹렬히 돌진해오느라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틀지 못한 기병들은 날카로운 목책에 들이받아 말과 함께 꼬챙이에 꿰인 신세가 되었다.

“이런 하찮은 장애물 따위!”

그러나 브르타뉴 공작과 미르보 백작, 그리고 우수한 기사 몇은 마력을 가득 실은 검으로 목책을 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리는 위용을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화승총으로도, 목책으로도 괴물 같은 프랑지아의 기사들을 간신히 멈춰세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돌격의 기세는 확실히 죽었고, 기사와 기병들은 한 데 뭉친 채 돈좌되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손에 쥐고 있던 깃발을 내던져버리고 검을 뽑아 높이 들었다.

저 숲속의 고지대에서 포격하던 것과 달리 목책 뒤에 포진시켜둔 채,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대포들이 그들을 겨눈 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모두가 다 알게 되겠지.

왕국의 구시대와 압제의 상징도, 그저 평범하게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라파예트, 네, 네놈!”

공작이 뒤늦게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던 기사들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동요하는 것을 보며 검을 내리그었다.

“발사!”

심지에 불을 붙인 포병들이 일제히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리고, 포성이 터져 나와 지축을 뒤흔들었다.

대포가 뿜은 압도적인 화력에 응해, 탄 안에 가득 쑤셔 넣어진 고철조각과 자갈들의 산탄이 폭풍처럼 날아들어 돈좌된 적들을 덮친다.

그 압도적인 폭력은 기사들이 그토록 맹신하던 마력의 보호도, 화려한 갑옷도, 군마도, 인간의 피륙도.

모두를 공평하게 갈가리 찢어버렸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