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기 - 라파예트의 전장 (1)
가을의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루이 왕은 대대적으로 역적 토벌을 선포하고 수도 뤼미에르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남하를 개시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구 1왕자파도 군사들을 데리고 출진.
남부의 라파예트 후작령과 동부의 로렌 공작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거점, 왕국 중부 샤를레종에 수뇌부가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그 회의의 분위기는 암담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저들의 병력이 2만이 넘는다고? 확실하오?”
사실상 파벌의 수장인 로렌 공작, 크리스토프 드 로렌의 물음에 전원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병이 돌기 전에 대치하던 병력도 그보다 한참 적었습니다. 아무리 저들이 북부를 확보했다고 해도,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그런 병력이 나온단 말입니까?”
로렌 공작의 심복 중 하나인 펠포드 백작이 입을 열었지만, 내 아버지 라파예트 후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미 교차 검증은 끝났소. 간자와 정찰병들이 전부 다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맞다는 소리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역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북부지역에 있던 영주들은 세력권을 잃은 뒤.
우리 병력은 가용한 모든 숫자를 다 끌어모으고도 1만이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나로서도 이 사태는 당황스럽다.
회귀 전에도 루이 왕이 1왕자파의 잔당을 끝장내기 위한 공세를 펴긴 했지만, 병력은 기껏해야 우리보다 조금 많은 수준에 그쳤다.
그러니 청기사가 없이도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고, 단순히 평민들의 반란 정도로 치부했던 혁명이 생각보다 큰 사태라는 걸 깨달은 루이 왕과 화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갑자기 2배가 넘는 병력으로 우리를 공격한다니.
설마하니 청기사, 후작이 살아있어서?
후작이 살아있어서 저들이 경각심을 가질 수는 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내 전 승리가 확실시되자 미적대던 귀족들이 갑자기 병력을 2배로 내놓았다고?
옆 영지와 싸우는 영지전도 아니고,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은 그냥 농민들을 징집해서 끌어다 놓으면 그만이 아니다.
그만한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는데 드는 돈이 얼마인데, 그 긴 내전을 치른 자들이 대체 어디서 그런 돈을 구할 수 있지?
이 망할 놈들이 어비스 코퍼레이션 상대로 대대적인 노예장사라도 한 건가?
“병력 차가 너무 크지 않소? 이렇게 되면 차라리 물러나서 수성전을....”
“저들의 영지는 북부에 멀쩡하게 있는데, 우리는 돌아가면서 영지를 약탈당하다 말라 죽으면 되겠군. 여기서 물러나면 우린 각개격파 당하며 끝이오.”
혼란한 와중에 또 다른 정보가 들어왔다.
“적들이 군세를 셋으로 나눠서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오를레앙 공작이 이끄는 6,000가량의 군대가 트르와 방면으로, 브르타뉴 공작이 이끄는 4,000 가량의 군대가 베리 방면으로, 그리고 루이 왕이 이끄는 10,000 가량의 군대가 이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저 자들이, 우리 근거지를 치겠다는 건가.”
침음이 흘렀다.
트르와, 동쪽으로 진군 중인 적 병력은 명백히 로렌 공작의 영지를 노리고 있다.
문제는.
“베리 방면으로 4,000이라니?”
후작이 미간을 구겼다.
베리 방면, 즉 남서쪽에 있는 1왕자파의 근거지는 거리도 먼 라파예트 후작령뿐이다.
사실상 핵심이자 주력인 로렌 공작을 6,000의 병력으로 압박하는 건 이해할만 하지만, 어차피 라파예트는 남하 중인 루이 왕의 본대를 막아야 하는 입장인데, 거기서 굳이 라파예트 외에는 관련되는 자가 아무도 없는 쪽으로 4,000이나 되는 병력을 보낸다고?
로렌 공작의 영지는 동쪽에 있으니, 전력비만 보자면 사실상 라파예트와 남부의 다른 가문들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자하고 로렌 공작을 상대하는 병력은 견제를 위해 구색만 맞춘 수준이다.
“아무래도, 루이 왕이 라파예트와 남부 가문들을 우선적으로 꺾고자 하는 것 같구려.”
이웃 영지의 리오넬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명백하다. 그런데 대체 왜?
혁명군에게 찍히는 것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긴 했지만, 에리스를 옹립하려던 후작을 막은 건 이렇게 쓸데없이 루이 왕의 주목을 끄는 사태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청기사의 위명이 대단하기야 하다지만, 빤히 파벌의 수장이 로렌 공작인데 굳이 전력을 분산시켜가면서까지 라파예트에게 엿을 먹일 이유가 저들에게 있나?
“...우리도 병력을 나눠야 하겠군.”
후작이 입을 열자,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로렌 공작이 잽싸게 말했다.
“내 영지로 오는 적들도 그리 만만한 숫자는 아니오. 무려 6,000이나 되니 내 군대는 오를레앙 공작을 상대해야겠소.”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네.
로렌 공작과 그의 파벌인 동부 영주들의 군세가 5,000이다.
물론 오를레앙 공작의 병력에 비하면 조금 적다지만, 적들이 대부분의 전력을 남부로 보내는데 여기서 절반을 다 가져가겠다고?
회귀 전에 내가 후작일 때는 우리가 이 정도로 불리하지 않아서 그저 거들먹거리는 고위 귀족이라는 인상 정도였는데, 궁지에 몰리자마자 밑바닥을 다 드러내는 추태라니.
후작이 말하던, 무능한 돼지라는 평이 갑자기 확 와닿는데.
“그랬다간 남부는 전부 무너질 겁니다!”
라파예트의 이웃 영지인 리오넬 백작이 제일 먼저 반박했고-
“우리가 몰살당하면 그대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공작.”
후작까지 차갑게 말하자, 공작은 손수건을 꺼내서 퉁퉁한 얼굴에서 땀을 닦아냈다.
“영지를 잃어도 끝장나는 건 매한가지 아니오. 애초부터 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열세라는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잖소. 정 그렇다면 1,000명은 남부로 보내 주겠소. ‘청기사’ 후작이라면 그 정도로도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소.”
이렇게 되면 남부로 오는 적이 14,000, 그걸 방어하기 위한 우리 군세는 6,000.
청기사가 있다지만 이 정도 열세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좋소, 그렇다면 2,000으로 브르타뉴 공작을 저지하고, 나머지로 루이 왕을-”
“잠깐!”
로렌 공작에게 말을 끊긴 후작이 눈썹을 틀어 올렸지만, 로렌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내 영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1/5이나 되는 귀한 병력을 빌려주는데, 후작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군세의 1/3을 보내겠다고?”
“그러면 뭐 어쩌자는 소리요?”
“아무리 후작이 ‘청기사’라도 고작해야 4,000의 병력으로 왕의 정예군을 포함한 일만을 무찌를 수 있을 리가 없잖소.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장이라면, 차라리 내 병력을 전부 이끌고 동부에서라도 승전을 거두는 것이 낫지 않소?”
로렌 공작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나도 지금 후작의 그 울분의 근원을 이해한 것 같다.
아니, 로렌 공작 이 돼지 새끼가 진짜....
그래서 5,000을 다 데려가면 저놈이 오를레앙 공작의 6,000을 상대로 이길 수는 있고?
“하, 하지만 공작님. 라파예트 후작령이 무너지면 사실상 남부의 다른 이웃 영지들도 연쇄적으로 무너질 겁니다. 저들의 남하를 아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이웃이라서 우리가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해지는 리오넬 백작이 거들어 주었지만, 로렌 공작은 생각보다도 더 굉장한 인간이었다.
“무, 물론 그렇지. 아주 방치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어차피 우리 모두가 위험한 전장이니, 합당하게 위험부담을 나누자는 것 아니겠소?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대들을 돕기 위해 보낸 병력이 1,000 아니오. 그러니 후작도 남하하는 병력은 1,000으로 최대한 늦춰보면 어떻소?”
그러니까 지금, 4,000으로 일만을 못 막을 것이 걱정 되어서 자기 병력 1,000을 다시 데려가겠다는 인간이 4,000을 1,000으로 막아보라?
“어차피 베리 지방의 평야를 지나면 후작령으로 가는 길은 숲지대요. 진군 속도가 빠를 리도 없으니, 소수의 병력이 최대한 발목을 붙잡는 동안 중부와 동부에서 승리를 거두면 도울 수 있겠지.”
포장은 그렇게 하지만 로렌 공작의 속내야 뻔하다.
어차피 뚫려봐야 라파예트 후작령이 피해를 입는 거고, 로렌 공작의 영지와는 정반대방향이니 완전히 남의 일이다.
반면 중부의 본대가 무너져버리면 여차할 때 루이 왕의 본대가 로렌 공작을 위협할 수 있다 이거지.
후작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병력을 줄 로렌 공작이 싫다고 해버리면 방법이 없다.
회귀 전에는 이런 놈들과 함께 혁명군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하니 아주 끔찍하군. 두 번은 절대로 사양이다.
“그러면 누가 서부에서 1,000을 지휘하여 브르타뉴 공작의 4,000을 막을 거요?”
최대로 잘해도 되도록 적은 피해를 입으며 시간을 끌어야 하고, 높은 확률로 압도적인 병력에 압살당할 자리.
위협받는 건 라파예트 후작령이지만, ‘청기사’ 외에는 2배에 달하는 왕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후작은 처음부터 논외다.
당연히 이런 자리에 나설 인간은 아무도 없고, 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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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청기사의 아들이라느니, 미르보 백작가를 꺾은 신예의 활약을 기대하겠다느니,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체 왜 라파예트가 주요 목표로 찍힌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혁명을 대비해서 쌓아둔 것들을 끌어다 쓰는 수밖에.
나는 등에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다른 화살과는 색이 다른 하나를 뽑아서 손에 쥐었다.
검에는 걸어봐야 에리스가 없을 때 몇 번 휘두르면 신성력도 소모될 테니, 아예 의외의 한방을 준비하자는 의미로 화살을 부탁했다.
출정 전에 며칠에 걸쳐 에리스가 기원을 걸어주어, 넘쳐흐르는 신성력이 내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것 같다.
“무슨 생각이냐?”
뒤를 돌아보자, 후작이 나를 따라 나와 있었다.
“어차피 우리 영지를 지키는 일이 아닙니까. 질게 뻔한 자리에 억지로 떠밀려간 자가 제대로 싸울 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제가 지휘권을 잡고 싸우는 쪽이 낫습니다.”
후작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잘 자랐구나. 라파예트의 이름에 걸맞은 자가 되었어.”
아, 그렇구나.
지난 회의 후로 후작이 사고를 칠까 경계했는데, 그는 거의 두문분출하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후작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어차피 나를 통제할 수 없어 보이니, 그냥 자랑스러운 아들로 생각하기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각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뭐지?”
“저와 가스통의 실력이, 일반 기사들 정도는 능히 압도할 정도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확실한 답이 되었다.
“수년 전에 본 근위기사의 검도 한 번에 알아보시는 분이 그 정도도 구분 못하시진 않으셨겠죠. 어째서입니까? 각하께서 보기엔 저와 가스통의 검 모두 가치가 없을 정도로 하찮아서였습니까?”
그러진 않았겠지. 그는 후작이 된 후 내가 출전한 해 전까지는 매년 기사제를 열었고, 그때마다 상위 입상자들을 기사로 발탁해서 전장에 데려갔다.
가스통은 말할 것도 없고, 회귀 전의 나도 그들에게 못 미치진 않았을 거다.
“각하께 저는, 아껴줄 아들이 아니라 각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였던 것 아닙니까?”
“...그래. 네 생각이 옳다, 피에르. 허나 이제 깨달았다. 사자의 자식이 고양이일 수는 없는 법, 억누른다고 해서-”
“그러면 그냥 지금까지처럼 대하십시오, 각하.”
“....”
“저는 각하의 지원 속에 자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각하께서 힘껏 짓밟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라난 잡초 같은 겁니다.”
후작의 냉대와 멸시 속에 허송세월하다, 혁명이 터진 뒤 산전수전 다 겪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보고서야 여기까지 왔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되돌아온다는 기적으로 간신히 도달한 자리.
원래의 나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는데 너무 오래 걸렸고, 역병 따위로 허무하게 죽어버린 후작의 그림자는 내 평생을 좌우했다.
그 고생과 기적에 힘입어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도움은커녕 방해만 한 작자가, 아비랍시고 그걸 자기만족으로 삼으시겠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저를 각하의 공명심에 포함시키려 들지 마십시오. 저는 라파예트이되 라파예트가 아니며, 각하의 바람과 달리 꺾이지 않고 자라난 각하의 경쟁자입니다.”
“후, 교만하기 짝이 없구나. 라파예트의 이름이 없이도, 네가 스스로 오롯하다고?”
“예, 각하. 그것을 입증해 보일 생각입니다.”
어차피 버린 패라고? 시간 벌이나 하면 다행이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혁명군에 맞선 전쟁의 말기에, 나는 이보다도 더 절망적인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다.
지금의 나에겐 끌어 쓸 수 있는 패도 있는데, 고작해야 혁명 전의 전초전 같은 전투에서 벌써부터 체면을 구길 수야 없지.
“그러니 어울리지도 않게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대신, ‘청기사’다운 모습을 보이십시오, 각하. 저는 이길 작정이니까.”
“하, 그 교만함에 걸맞은 활약을 보이길 바라지.”
“이 교만함만큼은 각하께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하야말로,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이름값은 해주시기 바랍니다.”
회귀 전에는 얻지 못한, 후작과 같은 전장에서 내 가치를 입증할 기회다.
나는 눈에 불이 붙은 후작을 보며 고했다.
“만약 각하께서 그러지 못하신다면, 저는 라파예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청기사’가 아니라 저를 떠올리게 해줄 작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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