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8화 (18/258)

내전기 - 청기사 (2)

후작저의 손님방.

“우선은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길.”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처럼 대해주면 좋겠는데요.”

“그렇다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에리스.”

바로 바꿔 말하자, 오히려 에리스 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라색의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인 다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원래 알고 계셨나요, 소후작님?”

“...그래.”

내 답을 들은 에리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프랑크, 아니 보몽 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말도 안 돼. 제가 그렇게 티 내고 다녔나요?”

“크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리스는 굉장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저 완전히 사기 계약 당한 거네요?”

“아니, 그건 아니야. 네가 왕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어도, 당장 그걸 공표하거나 이용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내가 약속해 준 건 전부 지킬 생각이었다고.”

에리스는 꽤 억울하다는 얼굴이지만, 이건 나도 억울하다.

회귀 전, 교국이 에리스의 과거를 파고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왕녀라는 걸 알아본 사람은 전혀 없었다.

내전 발발 전까지만 해도 어린애였던 데다 후궁을 총애하는 선왕이 꽁꽁 숨겨 뒀으니 당연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나 특징적인 외모에 선천적으로 햇볕에 약했으니 더 더욱 싸고돌며 보호하려 든 거겠지.

애초에 몇 년 전에 전장에서 검 쓰는 거 좀 봤다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중년의 남자가 전 근위기사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는 후작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인 거다.

일단은 후원받는 예술가로 소개만 해두고 후작이 에리스의 신성력을 알게 되어서 그녀를 이용하려고 들 기미가 보이면 그전에 크리스틴에게 보낼 작정이었지, 첫 대면부터 왕녀라고 눈치챌 거라는 걸 어떻게 예상했겠나.

에리스는 그 특유의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수긍했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걸 아예 피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소후작님의 제안을 받지 않았을 테고, 저도 정체를 숨겼으니 소후작님만 탓할 일은 아니네요. 그래서요? 후작 각하께선 뭘 원하시는 건데요?”

“왕녀 전하의 존재를 공표하고, 1왕자파의 잔당을 결집시키겠다고 하던데.”

당연히, 이 결정에 보호라는 명목으로 반쯤 구금 중인 에리스의 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2왕자는 이미 루이 왕으로 즉위했어요. 이제 와서 제 존재를 공표한들 거기 어떤 의미가 있나요? 어머니가 귀족이 아니었으니, 저는 정통성으로도 루이 왕에게 밀려요.”

그래.

솔직히 정통성에서도 밀리는 에리스를 3왕녀로 공표한들 1왕자파에게 당장 크게 득 될 건 없다.

그러나 그건 1왕자파 전체의 이야기고.

1왕자파의 현재 중심은 1왕자의 측근이었던 로렌 공작이다. 1왕자가 죽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력도 강하고, 권위도 가장 높으니까.

그리고 권위적이고 권력욕이 강한 후작은 사실상 1왕자파의 주력군을 담당한 그보다 로렌 공작이 주목받는 상황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자를 라파예트가 데리고 있다고 공표하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에리스, 너를 왕위 계승권자로 추대하면 라파예트 가문이 파벌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에리스는 굉장히 싫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가 굳이 덧붙이지 않은 말을 추가 했다.

“절 꼭두각시 여왕으로 올려놓고, 소후작님과 혼인시키면 라파예트는 왕을 배출한 가문이 되고요?”

...글쎄, 나일까?

“걱정하지 마. 후작 각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이고, 아직 결정된 일도 아니야. 고작 내부 주도권 싸움을 위해 왕녀 전하의 목숨을 걸게 만들지 않을 거야.”

3왕녀는 내전 직전에 실종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되는 수준이다. 완전히 잊힌 왕족이지.

그러니 암암리에 3왕녀에 대한 말이 도는 정도는 그냥 뜬소문 정도로 치부할 수 있지만, 에리스가 3왕녀로서 왕위 계승 내전에 뛰어들었다고 공표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루이 왕과 그 파벌도 에리스를 반드시 죽이려 들겠지만, 무엇보다 곧 혁명이 터진다.

지금 에리스가 왕위 계승 내전의 당사자로 선포되는 순간, 그녀를 옹립한 라파예트와 에리스는 빼도 박도 못하고 혁명군의 주요 숙청 대상이 된다.

에리스가 왕녀임을 알릴 순간은 최소한 내가 혁명군과의 연줄이 생긴 이후, 그리고 혁명군도 일부 왕족과 귀족과의 공존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다.

지금은 결코 아니야.

에리스는 내 말을 듣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신기한 기분이네요. 지금 소후작님이 굉장히 의심스러워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조금은 믿음이 가니까.”

“그래? 그것도 네 신성력, 아니 기원의 힘일까?”

“모르겠어요. 예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언자처럼 편한 능력이었다면 제가 지금 이런 처지도 아니겠죠.”

잠시 쓰게 웃은 에리스는, 이내 평소에 보여주던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는 약속대로 민심을 얻어드렸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노력할 거고요. 그러니 약속대로 저를 보호해 주시길 청할게요. 어째서인지 제 정체를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믿음이 가는 후원자님.”

나는 에리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생각인데, 왕녀 전하. 아니, 에리스. 네 예감이 나를 믿을 수 있다고 하니, 좀 위안이 되네. 사실 난 조금 불안했거든.”

“...그 말을 듣자마자, 저도 불안해지는데요?”

“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매사에 무조건 해결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어.”

그게 안 되니까 세상이지만.....

회귀 전에는 없던 일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번엔 회귀전에 때리지 못한 뒤통수를 쳐 줘야 인지상정 아니겠어?

-

늦은 저녁.

나는 촛대를 들고, 어두운 방에 서 있었다.

나를 제외하면 극소수만 가끔 드나드는 방이기에, 평소에는 조명을 켜두지 않는 방.

내가 든 촛대의 불빛이, 어둠 속에 잠겨있던 초상화를 비추었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강건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5대 툴루즈 백작 자비에 드 툴루즈.

초상화 속의 노인은 갑주를 입고 검을 든 채 자신감 넘치게 웃고 있다.

천상 무인이었기에 놀라운 무예를 뽐내던 부하를 총애한 나의 외조부.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의 후작을 보고 뭐라고 할까.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촛대의 불빛이 그립고도 그리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의 초상화를 비추었다.

6대 툴루즈 백작 유리아 드 툴루즈.

외조부가 총애한 기사와 혼인하여 나를 낳아준 어머니.

내 아버지 위베르가 아직 라파예트의 이름을 받기 전 그를 도와 ‘청기사’의 신화를 탄생시켰으나, 그 아들이 기사제에서 평민에게 패배하자 냉대 속에 상심하다 요절해버린 여성.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초상화에 닿을락 말락한 거리까지 가져다 대었다.

그림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을 댄다고 해도, 그렇겠지.

잃어버린 추억은 따스하지만, 현실에서 그 온기를 찾을 길은 없다.

내가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먹 쥐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후작님, 듀몬트입니다.”

“들어오세요.”

방에 들어선 듀몬트 남작이 고했다.

“후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소후작님. 내전과 왕녀 전하의 처우에 대해 회의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가죠.”

내가 몸을 돌리자, 남작은 아련한 얼굴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가가 탄생하기도 전, 오랫동안 툴루즈 가문을 모셔온 남작.

그가 전에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소후작님께서 이리 훌륭하게 장성하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가 드디어 유리아 아가씨를 뵈어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회귀 전에, 나는 그가 이런 사람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다.

평민에게 패배하고 아비에게 쓰레기 취급받으며, 자괴감과 무력감 속에 허우적대느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랬기에, 회귀 후에도 내가 잘 모른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내 외가를 모셔온이 남자를 의심했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남작.”

“...예?”

기사 왕국의 귀족 주제에 말도 제대로 못 탈 것 같이 배 나온 아저씨의 어벙한 얼굴은 꽤나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가시죠. 이번에는 남작님만 믿겠습니다.”

“아, 예, 예. 이 듀몬트만 믿으십시오!”

겉보기에는 조금 미덥지 못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아군이니까.

-

회의실.

상석에 후작이 앉고 라파예트 가문의 봉신과 가신들이 모인 자리.

모든 가신들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청기사’ 후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왕녀의 존재를 공표하면 안 된다니?”

“그렇습니다, 각하. 얻을 것은 적고, 잃을 것은 많습니다.”

후작은 나를 한껏 쏘아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네가 많이 컸구나, 피에르. 이 내가 하는 말에 토를 다는 걸 다 보다니.”

“각하께 충언을 올리는 것 또한 라파예트의 일원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큭, 하하, 하하하....”

후작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마치 폭풍의 전조처럼 느껴졌는지, 앉아있는 가신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좋다, 이유를 들어보겠다. 허나 그 책임 또한 져야 할 것이야.”

후작은 그 불같은 성미를 참기 어려운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최근의 공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았겠지.

“이미 1왕자 파벌과 루이 왕의 파벌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저들이 우리의 파멸을 목표로 잡은 이상, 우리에겐 이미 함께 뭉쳐 루이 왕의 폭거에 항전하는 길 외엔 방법이 없죠. 왕녀 전하를 왕위 계승자로 옹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1왕자파가 결집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후작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면서도,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우리 파벌이 당장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총체적인 승리가 아니라 항전입니다. 루이 왕과 그 파벌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내,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내세우면, 오히려 저들의 전쟁의지와 결집력을 높여줄 뿐입니다.”

후작은 굉장히 언짢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더니,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으나 우리가 3왕녀 전하를 옹립하고 루이 왕을 몰아낸다면, 그것은 강력한 정통성이 된다.”

“송구하나, 각하. 그건 루이 왕을 몰아내는 것이 가능할 때나 통용되는 말입니다.”

“네놈이 감히 내 앞에서 패배를 논해!”

이미 50대에 접어든 후작의 노성은 벼락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가신들은 물론이고, 마력까지 실린 가공할 외침에 나까지 전신이 저릿저릿해 지는 것을 느꼈다.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나, 모든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시작한 이상 여기서 물러나면 그대로 끝이다.

퇴로가 없다면, 오직 전진뿐이지.

“우리는 1왕자 전하께서 건재할 때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수도 뤼미에르를 포함한 북부를 내어주고 저들에게 총체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각하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후작 각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1왕자파를 결집시킬 명분이 아니라, 3왕녀 전하를 옹립하여 로렌 공작에게서 파벌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위험합니다, 각하. 말씀드렸다시피 루이 왕과 파벌에게 위기감을 주기만 할 뿐입니다. 겨우 주도권-”

“전선에 직접 서본 적도 없는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나는 저 전선에서 1왕자파의 주력이었다! 언제나 선두에 선 것은 나이며,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도 나이고, 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나였다! 그런데, 공작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무능한 돼지 따위가 왕자와 귀족들을 좌지우지하며 전쟁을 그르쳤어!”

후작의 눈동자에는 광기와 분노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내가 저들을 이끌었다면 내전은 진작에 승리로 끝났을 터다! 단 하나! 고작 저들을 이끌 혈통만이 부족했을 따름이야!”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긴 세월을 쌓아온 울분과 권력욕이 번들거렸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박탈감에 시달리게 만들었지?

지금 그가 서 있는 그 자리야말로 내 어머니의 것을 빼앗아 오른 자리일터인데.

“허면, 각하. 각하께서 왕녀 전하를 옹립한다고 해서, 그 콧대 높은 로렌 공작과 고위 귀족들이 각하께 고개를 조아릴 것이라 믿으십니까? 오히려 불화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설마하니 서출 왕녀와의 혼인이 모든 권위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 믿으시는 것은-”

“네놈이!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훈수질이냐! 이 라파예트의 이름은 모두 내가 일군 것이야! 거기 빌붙은 기생충 따위가 어디 감히! 내가 왕녀를 아내로 맞아 왕으로 즉위하면, 네놈을 내치고 다른 자식을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음을 알라!”

“그러시지요, 각하.”

“뭣?”

“그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후작에게 압도되어 노심초사하던 가신들이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방금까지 격노하여 되는대로 말을 내뱉던 후작조차 경악하는 모습에, 나는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데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후작 각하?”

어머니가 죽고도, 후작은 지금껏 후처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그는 수없이 많은 애첩을 끼고 살았고, 그를 숨기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기사제에서 평민에게 패배한 아들, 나를 지극히 수치스러워했다. 심지어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기사제에서 나를 꺾고 우승한 기사까지 함께 영지에 처박아둘 정도로.

그럼에도 나를 영주 대리로 세웠다. 그가 그래도 장남이라고 나를 아껴서? 유일한 후계자라서?

그는 그럴 수만 있다면 새 아내를 들이고, 자신의 마음에 차는 후계자를 새로 세우고 싶었을 거다.

“이 땅은 후작령에 속하기 이전부터 툴루즈 백작령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 이 땅은 처음부터 나의 외조부께서 어머니에게 남기신 것.

듀몬트 남작을 비롯한 봉신들의 충성도 아버지가 아니라, 선대부터 이어져 온 툴루즈 백작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선대 백작,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금 툴루즈 백작은 저입니다, 각하.”

내가 없으면, 그는 허울뿐인 후작위를 가진 기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나를 쓰레기처럼 여기면서도 완전히 내치지 못했다.

회귀 전에 그가 영지에 있을 때는 내가 그런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고 위축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이해했을 즈음에 후작은 멋대로 역병으로 죽어버렸지.

위대한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위대한 청기사를 포함하라고 명할 정도로, 위대함과 자부심에 집착하는 남자.

자신이 받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출신으로 인한 차별과 울분만을 기억하는 작자.

“각하의 기반은 제 외조부이신 자비에 드 툴루즈 각하께서 쌓고, 어머니께서 각하께 빌려주신 것입니다. 각하의 드높은 위명은 툴루즈 군사들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검 한 자루로 일궈낸 위업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얻어낸 것은 ‘청기사’의 이름과 후작의 작위뿐.

백작보다는 높지만 그렇다고 공작도 아닌 애매한 작위에, 딸린 영지 하나 없는 허울뿐인 명예.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명예조차 ‘청기사’ 공도 무엇도 아닌, 그저 기사에게 주어지는 이름.

그러니 그에게, 꼭두각시 왕녀를 여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그가 평생토록 쌓아올린 질투와 자격지심을 단번에 날려버릴 기회처럼 보이겠지.

“네놈이, 네놈이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느냐?”

후작의 눈에 핏대가 섰지만,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것 같던 기세는 사그라들었다.

“그저 사실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각하. 게다가... 과연 제가 없이도 후작 각하께서 지금처럼 전쟁을 수행하실 수 있을지, 저는 상당히 의심스럽군요. 듀몬트 남작?”

“헛, 예? 아, 예.”

멍하니 앉아 있던 듀몬트 남작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후작이 콧수염을 꿈틀거리며 서류를 들여다보자,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령, 아니 ‘툴루즈’지방의 작년 조세 보고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후작 각하께서 매년 요구해온 군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까지는 영주 대리인 나에게 윽박만 질러도 되었다. 영지의 소출로 부족하면 약탈을 하든, 징세를 하든 해서 걷으면 좋고 아니어도 내 책임이었으니까.

“역병이 돌았고, 이젠 주전장이 남부가 되었으니 인근 영지의 약탈은커녕 있던 소출도 더 줄어들 걸 걱정하셔야 하겠군요. 왕녀 전하를 옹립하고 세력의 주축이 되려고 한들, 군자금 확보는 가능하십니까?”

후작은 분노에 차서 나를 씹어 먹고 싶은 얼굴이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어봐야, 수년간 전선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영지를 빨아먹은 장본인이잖아.

동맹이랍시고 돈만 받아먹은 끝에 그나마 도움 되던 혈맹 아키텐 가문조차 약혼을 파기하게 만드셨고.

“그렇다면 네놈은 어떻게?”

나는 품에서 챙겨둔 서류를 꺼내서,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시종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후작은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네놈이 감히, 내 영지에서 돈을 빼돌려?”

“오해십니다, 각하. 행정을 총괄해온 듀몬트 남작이 증명해 줄 겁니다. 각하께 보낼 군비도 허덕이는 영지의 수입으로 뭘 어떻게 해야 그런 돈이 생기겠습니까?”

후작은 고개를 홱 돌려 듀몬트 남작을 쏘아보았고, 남작은 움찔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각하. 영지의 자금 출납부로 확인 가능하실 겁니다.”

후작이 들고 있는 건 아키텐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의 내 예금 증서다.

내가 크리스틴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 원자재를 잔뜩 매입한 뒤, 산업혁명이후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판매해서 남긴 자금.

그걸 그대로 아키텐 은행에 맡겨 일부는 크리스틴이 운용하고 일부는 군대를 운용하게 했지만, 그러고도 엄청난 예금이 남아 있다.

돈이 복사가 된 거라고?

지금만큼은 빌어 처먹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 놈들 만만세다.

“각하께서 이대로 툴루즈 백작으로서의 정당한 제 권리를 무시하고 영지의 모든 일을 독단으로 결정하시겠다면, 저는 라파예트의 이름을 버리고 영지를 떠나겠습니다.”

“뭣이 어쩌고 저째?”

“그러고 나면 루이 왕에게 가, 제 권리를 되찾아 달라 청하며 제 예금을 군자 금으로 제공하겠죠. 모르긴 몰라도 너무 가난해진 나머지 내전을 이어가려는 자들이라면, 제 이야기를 꽤 솔깃하게 들을 것 같군요.”

그 이전에 나를 내치고도 후작이 가신과 봉신들을 제대로 다룰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네놈, 네놈, 네놈이....”

저러다 후작의 눈에서 핏줄이 튀어나오시겠는데.

그건 곤란하다. 한심하게 자격지심과 권력욕에 찌든 인간이긴 해도, 후작은 왕국 최강의 기사라고 불릴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다.

전장에서 선봉장으로 뛰어나가, 적들을 쓸어주셔야 할 인사가 기껏 살아남았는데 다시 급사해버리거나 하는 사태는 원하지 않는다.

“물론, 저도 라파예트의 핏줄인 이상 그런 패륜적인 행위는 다소 내키지 않는군요.”

나는 분노로 몸을 떨며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내게 뛰어들지는 못하는 후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위대한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각하. 쓸데없는 위신 경쟁은 포기하시고, 적들의 증오는 로렌 공작이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면 혁명군의 증오심도 덩달아 그가 가져갈 테니, 우린 적당할 때 혁명군으로 줄을 바꿔 잡으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주신다면 저, 툴루즈 백작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각하의 동맹으로서 신의를 다 하여 금전적, 군사적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각하께서 제게 동맹에 걸맞은 존중을 보여주셔야 하겠습니다만.”

싫으면 허울뿐인 후작위만 들고, 충성할 이유를 잃은 봉신들을 열심히 어르고 달래며 혼자 전쟁해보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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