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7화 (17/258)

내전기 - 청기사 (1)

“Memores sumus vestri me-”

언제나 적막감이 서려 있던 라파예트 후작저에 청아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Ostende mihi faciem sol luceat-”

에리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을 감은 채 뭐라고 하는지 모를 노래를 부르고, 제시는 그녀의 순백색의 머리를 빗겨주며 의미 모를 노래를 콧노래로 따라 부른다.

나는 전장에서 구르면서 내 일은 직접 하는 버릇이 들어서, 시종의 손이 가지 않는 편이다. 밖으로 자주 돌기도 하고.

그래서 제시는 말이 전속 시종이지 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는데, 에리스를 데려온 김에 그녀에게 붙여줬더니 금세 친해진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나보다 먼저 방을 나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밝고 활발해서 재미있던데요.”

“그렇죠?”

나는 크리스틴과 함께 후작저의 복도를 걸었다.

우리 둘이 내는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복도를 울릴 때쯤, 크리스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애가 소후작님이 말했던 그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백작님.”

애, 인가. 확실히, 에리스는 이제 겨우 16세지.

그러는 나나 크리스틴도 아직은 19세에 불과하지만,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가졌고 크리스틴도 특유의 분위기가 강해서 그녀가 아직 10대라는 사실을 자주 잊게 된다.

나는 방금 전 그 넘치는 친화력으로 활기차게 자신을 소개하던 에리스와, 약간은 어색하게 그걸 받아주던 크리스틴을 떠올렸다.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데다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크리스틴과, 눈동자를 제외하면 죄다 새하얀 에리스의 대조는 유독 튀었지.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하네요. 소후작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데려왔으니, 그럴만한 사람이었기를 바라죠.”

“음....”

내가 난처한 기분을 느끼고 있자 크리스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우리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크리스틴이 뒤를 따르던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리나.”

“네, 아가씨.”

시녀가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크리스틴에게 건네주고 문을 닫고 나가기가 무섭게, 크리스틴이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겠다는 줄 알았어요. 봉쇄가 끝나고 바로 연락을 취하려고 했는데,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남부로 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저를 파트너로 생각한다면 조금쯤은 몸을 사려주면 좋겠네요, 피에르. 적지 않은 투자를 했는데 갑자기 당신이 잘못되거나 하면, 저로서는 굉장히 난처해요.”

“그건 주의하죠. 하지만 당신도 암살 기도를 빤히 알면서 직접 적진에 들어가는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틴.”

그래도 크리스틴이 불만 섞인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어서, 나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만큼 필요한 일이었고, 가스통만 데리고 나갔으니 오히려 역병에선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무모하게 위험을 무릅쓰기만 한 건 아닙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계약은 지킨다고.”

그렇게 말하며 문 앞에 서서 나를 뚱하니 바라보던 크리스틴에게 손을 내밀자, 크리스틴은 나를 빤히 보다가 손을 맡기며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나 못 하면.”

나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의자로 이끌어 앉히고, 직접 물을 데우고 커피를 타며 농담을 던졌다.

“원래 악마는 말발로 먹고사는 거 아닙니까?”

“성녀를 데려오는 악마라니.”

크리스틴은 그제야 가볍게 웃으면서 내가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내가 커피를 건네주자 시녀에게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풀어서 내밀었다.

“이번에 가져온 물품의 내역, 그리고 당신이 요청한 군대의 보고예요.”

나는 크리스틴이 건넨 두루마리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역시나 아키텐 상단, 요청한 물품들은 거의 대부분 구해주었다.

그리고 군대.

나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원자재를 판매해서 얻은 시세차익으로 생긴 내 비자금을 투자를 겸하여 크리스틴에게 맡기고, 그중 일부로 군대의 양성을 주문했었다.

“음, 1,000명가량인가요.”

“네. 여유가 되면 더 확충하겠지만, 아직은 어렵네요. 아키텐 가문이 무가는 아니니까요.”

“어차피 화병기를 다루는 건 기사 가문보다도 도시 쪽이 전문이니까 상관없습니다. 계속 진행 부탁드리죠.”

“저야 그럴만한 대가를 받고 진행하는 거니, 언제라도 환영이죠.”

후작이 이미 많은 병사를 징집한 라파예트 후작령에서 저만한 병력을 뽑아내려면 당장 소출부터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상공업이 발전한 아키텐에서는 돈만 있으면 인력을 수급하는 것도 라파예트에 비해 훨씬 쉽다.

무엇보다, 크리스틴에게 맡겨 양성한 저 군대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 개인에게 고용된 상비군인 셈이다.

병력은 적어도 라파예트의 전력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후작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 군대. 지금의 나에겐 아주 중요한 패다.

크리스틴은 내가 서류를 살피는 동안 커피를 음미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요구한 도시 세력과의 연줄도 계속 신경 쓰고 있는데, 호응은 그리 없네요.”

“역시 그렇습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은 나쁘지 않은 인상만 심어줘도 성공이겠죠.”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덧붙였다.

“아, 그나마 수도 쪽의 유력자 중에 유명한 자유주의 작가가 관심을 보이긴 했다던데요. 니콜라 브리소라고. 법조인으로도 활동했다던데, 알아요?”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히며 고민한 끝에,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아마도 혁명군의 온건파에서 주축을 차지했던 인물이었을 거다.

“잘 되었군요, 가능하면 그와 줄을 이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피에르. 당신이 그리 말한다면 가치 있는 인사겠죠.”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커피를 음미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내가 입을 열었다.

“동생은 좀 어떻습니까?”

“...음....”

크리스틴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쥐 죽은 듯이 지내죠.”

긴 침묵 끝에, 그렇게 답한 크리스틴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요. 제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아이를 싸고돌면서.”

그렇게 말하는 음성에는 그녀의 씁쓸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가신들도 루이스를 제거하거나, 못해도 추방하거나 수도원으로 보내라고 권유하고 있겠지.

크리스틴을 아키텐의 주인으로 섬기며, 그들만을 위한 충언을 그녀에 대한 충성으로 포장하여 얼마나 숱하게 떠들었을까.

굳이 나까지 그런 말을 보태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글쎄요. 제가 남부로 향할 때도 가신들이 뜯어말렸지만, 저는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올지도 모를 위험이 무서워서 간단하게 단념해버리면 후회는 평생 남겠죠.”

크리스틴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 선택을 옹호하는 소위 충신들은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변호해 주더군요. 어차피 지지 세력도 없어진 루이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고, 여차하면 내부 불만 세력을 솎아내는 데 쓸 수 있을 거라고.”

내 대답을 기대하기보다, 속에 쌓이고 쌓인 것을 그저 담담히 풀어놓는 듯 차분하게 시작한 말은 끝에 가서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제가 바라던 기회를 그 아이에게 준 것뿐이에요.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저를 죽이려고 든 자들처럼, 지레 겁먹고 그럴 생각도 없던 아이에게 칼부터 들이대고 싶지 않아서.”

아마도 처음부터 그녀를 부추겨 가문을 뒤집어엎게 만든 장본인이자, 그녀의 아랫사람이 아니라 대등한 파트너인 나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말.

“그저 제가 그들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저를 위안하기 위해. 만약, 만약 그렇게 해서 루이스가 딴마음을 품는다면 그땐 제가 그 아이에게 손을 대도....

제가 정당한 거니까.”

그렇게 다 털어놓은 크리스틴은 씁쓸하지만 조금 후련해졌다는 듯이 말했다.

“후우. 저, 꽤 이기적이죠. ...실망하셨나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은 채, 살짝 흔들리면서도 미약하게 기대가 묻어나는 칠흑의 눈동자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크리스틴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전 좋은데요.”

내 답을 들은 크리스틴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네?”

“인간적이어서, 마음에 든다고요.”

“어, 어디가?”

“지금 크리스틴, 당신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끝까지 죽인다는 말은 못 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모를 잃은 어린 동생을 보호하며 제대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는 거겠죠.”

크리스틴은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은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당신이 그걸로 받는 상처는 누구도 보상해 주지 못하잖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인 채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렇게 아닌 척하면서 정에 약한 당신이라서 제가 믿는 거고요. 당분간 당신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니까.”

그렇게 말하고 잔을 들어 올려 커피를 음미하는데, 한참 동안 그녀가 말이 없어서 시선을 보내자 어째 살짝 붉어진 얼굴의 크리스틴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러, 게요. 후작님이 곧 돌아오실 테니 저보단 당신이 걱정이군요. 저도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예. 말했다시피 저는 당신을 믿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이 자리에 일어나서, 나도 따라 일어나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받은 투자가 있는데 신용을 지키지 않아서야, 어디 가서 상단의 이름을 걸기도 부끄럽죠. 믿어도 좋아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답하며 내 악수를 받고, 돌아서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도 당신을 믿으니까, 피에르”

-

지지할 왕위 계승권자를 잃은 1왕자파의 영주들은 우선 북부 전선에서 물러나고 2왕자가 수도 뤼미에르에 입성하여 즉위를 선포, 루이 왕이 되었으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로렌 공작으로 대표되는 1왕자파의 잔당은 2왕자파와의 종전 협상에 나섰고, 그 협상은 혁명이 터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전을 멈출 수 있던 기회였다.

그러나 왕국이 불타든 말든 손실을 만회하고 이득을 보려는 갈망에 불타는 승자들과, 역병이라는 자연재해에 의한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패자들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결국 파국을 맞이했고, 루이 왕은 1왕자파의 잔당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을 선포했다.

크리스틴과 아키텐의 상단이 떠나고 며칠 뒤.

북부 전선에서 철수하여 귀환한 라파예트 후작령 군대의 행렬은 질서정연한 대오를 지키며 각 잡힌 행군으로 툴루즈에 입성했다.

그 수천의 군세는 얼핏 보기에는 위풍당당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비참해 보였다.

그 긴 시간을 싸우고 숱한 피를 흩뿌린 끝에.

왕위로 올리려던 주군을 허무하게 역병에 잃어버리고도 자신들은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고, 더 싸울 수 있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자들이 오기로 벌이는 시위가 아닌가.

그 패배를 부정하는 군대의 선두에, 상징적인 검푸른 갑옷으로 무장한 청기사가 있다.

나는 가신들과 함께 후작저의 앞에 나와 있다가,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라파예트의 아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위대한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후작은 말에서 뛰어내리고 투구의 덮개를 들어 올렸다.

수염 난 후작의 얼굴은 무표정한 채로 천천히 나와 함께 예를 갖춘 가신들을 훑어본 뒤, 나를 보며 미약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간 수고했다. 우려는 있었으나, 내 생각보다는 그럴싸하게 영주 대리의 임무를 수행했더군.”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를 치하하는 언사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치켜 올라갈 뻔했다.

그렇군.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니다.

나는 미르보 백작가의 차남을 격파하여 라파예트의 명성을 드높이고, 후작이 요구한 무리한 군비 또한 제때 조달해냈다.

후작에게 있어 지금의 나는 라파예트의 위신, 그의 공명심에 도움이 되는 자로 격상된 셈이다.

그간 홀로 나를 보좌하느라 고생한 듀몬트 남작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듯한 시선 한 번만 주고,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치하한 것도 꽤 의도가 분명하다.

절로 조소가 어릴 것 같은 입가를 자연스러운 미소로 바꿔 그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광입니다, 각하. 드시지요.”

“그러지.”

내게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후작저로 들어서다가, 일행의 뒤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로브를 입고 베일을 쓴 에리스에게.

나는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지만, 후작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이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안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쉬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병사와 후작저의 하급 시종들을 물리고 일행이 후작저로 들어서, 저택의 문이 닫히자마자 후작이 발걸음을 멈췄다.

“...각하?”

후작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정확히 에리스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내 앞에서 베일을 쓰고 있지?”

에리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그녀와 후작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가 후원하는 예술가입니다, 각하. 선천적으로 햇볕에 약한 몸을 타고나 부득이 허락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벗어도 좋겠지?”

“네, 무례를 범해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소후작께 초빙되어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에리스라고 합니다.”

후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일을 벗은 에리스가 후작에게 예를 갖추어 보였다.

흘러내리는 은발과 자안, 거기에 새하얀 얼굴.

에리스의 모습을 품평이라도 하듯 뜯어보던 후작이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흠, 나쁘지 않군. 아직 어리지만 장래를 기대해볼 만하겠어. 사내라면 미색을 탐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말한 후작은 에리스의 옆에 바짝 붙어선 프랑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프랑크를 들여다보던 후작은 다시 등을 돌렸다.

에리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쁘지 않은 오해다.

나는 에리스에게 눈짓으로 사과하고, 후작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후작은 어느새 다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번엔 에리스가 아니라, 프랑크에게 향하고 있다.

“그대는 누구인가?”

“미천한 자가 위대한 ‘청기사’ 위베르 드 라파예트 각하를 뵙습니다. 프랑크라고 합니다. 에리스의 보호자로 소후작께 초빙되어 저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후작은 턱짓으로 에리스를 가리켰다.

“딸인가?”

“아닙니다, 각하. 은인의 아이여서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 보호, 보호란 말이지.”

뭐지? 대체 왜 프랑크에게 흥미를 보이는 거지?

내가 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 후작이 검을 뽑았다.

모두가 기겁해서 얼어붙은 가운데, 후작이 프랑크를 보며 고했다.

“뽑아라.”

“가, 각하?”

후작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손에 쥔 검을 들어올려, 그대로 프랑크에게 내리그었다.

프랑크는 놀라운 속도로 검을 뽑아 그것을 막아냈으나, 검과 검이 맞부딪히면서 내지른 강철의 비명은 1층 홀을 크게 울렸다.

이 미친 인간이 진짜 죽일 기세로 베려 했다!

“프랑크 아저씨!”

에리스가 경악하는 가운데.

후작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제대로 막아낸 프랑크를 내려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거두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경악과 의문이 가득한 가운데, 혼자 영문 모를 웃음을 터트리던 후작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오랜만에 뵙겠소. 프레데릭 드 보몽 경. 선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지키던 근위기사가 스스로를 일컬어 미천한 자라 말하다니, 겸손이 지나치지 않소?”

프랑크. 아니 프레데릭 드 보몽 경이 눈을 흡뜨는 가운데, 후작은 즐겁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경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허나 나는 평기사 시절 경의 활약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오. ...실로 아름다운 검술이었지. 얼굴은 많이 변해서 확신할 수 없었는데, 역시 검은 속일 수 없어.”

오직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후작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피에르, 내 네 녀석을 구제불능이라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만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없는 사이, 이런 보석을 주워두었을 줄이야.”

설마-

“죽은 선왕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작위도 다 내던지고, 내전 직전의 왕궁에서 총애 받던 후궁과 그 딸을 탈출시킨 근위기사. 그가 지키는 어린 소녀라, 그렇다면.”

말을 마친 후작은 그대로 에리스의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고개를 든 후작의 눈동자에 어느 하나로 형언하기 힘든, 뜨겁고 끈적거리는 듯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창백하게 질린 에리스가 무어라고 미처 답하기도 전에, 후작이 비틀린 미소를 지은 채 고했다.

“실종되었던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3왕녀 전하가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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