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기 - 암운
“뭐야?”
미르보 백작가의 차남, 데미앙 드 미르보는 길을 따라 이쪽으로 달려오는 네 명의 일행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지난 라파예트 후작령과의 결전에서 대패하고 몸값과 조세권을 내준 그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분노한 그의 아버지에게는 조세권을 내준 걸 숨기고 군비를 보내는 걸로 일단 무마는 해놓았지만, 데미앙은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부지런히 약탈을 다니던 참이었다.
와중에 말을 탄 여행자로 보이는 자들이 있다길래 기사들과 기병들만 데리고 나서서 좀 털어볼까 했는데, 오히려 저쪽이 이리로 뛰어오고 있지 않나.
“미친 건가? 병력 집결시켜!”
“옛!”
검을 빼들고 달려오는 자가 셋, 무기 없이 그들을 따르는 자가 하나.
셋이 기사일 수도 있지만, 이쪽도 그를 포함해 기사가 셋에 병력도 있다.
데미앙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기사와 기병들에게 저들에게 대응하라고 명했다.
그러니까, 저들이 눈앞까지 다가오기 전까진.
“내가 미르보 백작가의 기사 페터 드 카젤이다! ...어?”
“내가 미르보 백작가의 기사 제롬 드 휴이다! ...컥?”
기병들의 선두에서 자신 있게 뛰어나간 그의 기사 둘이 양옆의 상대에게 달려들었으나, 거의 동시에 일격만으로 낙마해버렸다.
기병들이 대번에 동요하는 가운데, 중앙에서 검을 뽑아들고 돌진해오는 남자의 얼굴을 본 데미앙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네, 네놈이 여기서 왜 나와!”
“미안하군. 어쩌다 보니 지나가던 길이라.”
가끔 꿈에서도 나와, 그가 치를 떨게 한 소후작이 웃었다.
“그동안 몸값은 좀 벌어두셨나?”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
데미앙은 전신의 신경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끼며 몸서리쳤다.
-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선두에 섰던 기사 둘이 전투 시작과 동시에 가스통과 프랑크에게 당해 낙마하자 기병들이 동요했고, 그 기병들도 나와 두 기사가 뛰어들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광경을 본 미르보의 차남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자, 뒤에서 뒤늦게 집결한 군대는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며 와해되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을 향해 다가갔다.
에리스는 마을의 가운데에서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신에게 기도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녀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기원에 기대서 기적을 펼친다고 했었다.
잠시 뒤.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에리스에게서 빛이 뻗어 나와 마을을 덮으며 퍼져 나갔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잠깐이나마 밝힐 정도의 빛임에도,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주민들은 자신의 상처가 나은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오, 오오, 기적, 기적이야....”
“사제...?”
“성녀님이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주민들이 열렬히 감사를 표하며 칭송하는 가운데, 나는 에리스의 시선이 그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민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녀가 능력을 발휘하기 전에 이미 죽은 주민이겠지.
주민들이 열렬하게 그녀를 찬양하다 못해 아예 다가가서 얼싸안을 기세여서, 나는 말을 몰아 에리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수고했어.”
내 말이 신호라도 되었는지, 에리스는 답답하다는 듯 뒤집어쓰고 있던 베일을 벗었다.
달빛에 의해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드러난 얼굴은 입술이 파리하게 변해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죠?”
“...그래.”
그렇지 않아도 새하얀 피부에, 피로감으로 가득 차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로 애써 웃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소한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던 건 빈말이 아니더군.”
그녀의 말대로 내가 전투를 회피하려고 하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 손쉽게 이겨버렸다.
에리스의 능력은 평소의 컨디션을 월등히 넘는 힘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녀 본인도 일반 병사 정도는 제법 그럴듯하게 상대해서 나를 놀라게 했으니까.
그럼에도 에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휘청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주머니에 남아있던 육포를 꺼내서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앗, 감사합니다....”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능력을 한껏 쓰고 배가 고프긴 했는지, 열심히 뜯어 먹는 꼴을 보자니 참 기분이 미묘하다.
한번 보기만 해도 단숨에 각인될 만큼 독특한 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도 신경 쓰여서, 나는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 엣?”
내가 에리스를 들어 올리자 그녀는 조금 버둥거렸지만, 내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자 이내 얌전해져서 열심히 육포를 질겅거리며 기운을 차리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좋나?”
“소후작님은요?”
“...나쁘진 않아. 그런데, 판을 벌려놓은 만큼은 일해.”
“네?”
나는 의아해하는 에리스를 말에 태운 채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가스통과 프랑크가 지키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미르보의 차남과 그의 기사들, 그리고 몇몇 다친 미르보의 군사들이 다친 채로 누워 있다.
“으, 으윽, 아파....”
두 기사는 그래도 일격에 낙마해서 가볍게 다친 것을 묶어둔 수준인데, 미르보의 차남은 도망치다가 나한테 화살을 맞아서 부상이 꽤 심하다.
몸값은 안 돼! 같은 소리를 하며 도망가던 걸 굳이 쫓아가서 활까지 쏴서 잡으려니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기왕 위험을 무릅썼으니 본전은 챙겨야지.
나는 데미앙의 몸에 박힌 채 꺾어만 두었던 화살을 뽑아내고, 에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해라 치료사. 라는 의미로.
에리스는 기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씹던 육포를 마저 질겅거리다 꿀꺽 삼킨 다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그대로 빛이 모여들어 채찍의 형상이 되었다. 방금 전 전투에서 병사들을 상대할 때 쓰던 것 그대로다.
“어?”
부웅-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날아든 빛의 채찍이 바닥에 누워 있던 데미앙 드 미르보를 강타했다.
“끄아악!”
“아니, 치료하라니까 죽이려고 들면 어떻게 해.”
“치료에요.”
“뭐?”
내가 어이없어하며 다시 보자, 창백한 채로 바닥에 누워 끙끙대던 데미앙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아와 있다.
난데없이 채찍을 맞고 어안이 벙벙해서 눈물이 핑 돌고 있지만,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아서 철철 흐르던 피도 멈춘 것 같다.
일단 치료가 맞기는 한가 본데....
“...꼭, 그렇게 치료해야 해?”
“치료하기만 하면 되죠.”
에리스가 쓸데없이 밝게 웃으며 채찍을 쭉 당기자, 데미앙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배상금이고 몸값이고 다 주겠다! 때리지만 말아다오!”
“필요 없어요!”
아니, 나는 필요 있는데.
친절하게도 아낌없이 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 없잖아?
찰지게 채찍을 때리는 소리와 억억거리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저걸 말려야 할지, 치료니까 내버려 둬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일단의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리오넬 백작가의 문장. 늦으셨군.
“나는 리오넬 백작의 아들 질 드 리오넬이다! 앞에 있는 자들은 신원을 밝혀라!”
“라파예트 후작의 아들 피에르 드 라파예트입니다. 같은 1왕자파의 영지가 약탈당하고 있어, 동맹으로서 방어를 지원했습니다.”
“아, 그, 그렇군. 실례를 범했습니다, 소후작. 백작 각하를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지요. 그런데....”
“음?”
리오넬의 시선이 미르보의 부상자들에게 신나게 채찍을 휘두르느라 바빠서, 아직 이쪽을 눈치 채지 못한 에리스에게로 향했다.
“...저건 뭐 하는 겁니까?”
“....”
쓸데없이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 차 금빛으로 빛나는 채찍의 모양새 덕분에, 단순 구타로 보이지는 않는다.
잠시의 침묵 끝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무고한 영민들을 약탈하던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의식...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제길,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데.
웃기게도, 우리 대화에 대한 반응은 데미앙에게서 나왔다.
“억! 회, 회개하겠소! 다시는 약탈 따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리시오!”
...진짜로 회개시키는 의식이었어?
-
대충 상황이 정리된 뒤, 질 드 리오넬은 우리를 백작저로 초대했다.
라파예트 후작령으로 빨리 귀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영지를 구해준 동맹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 리오넬 백작가의 위신 문제가 될 터라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만찬 자리에서 그동안 듣지 못한 북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왕자 전하께서 역병으로 서거,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2왕자 전하께 휴전을 청했는데, 잘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회귀 후 바뀐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1왕자는 죽고, 2왕자는 살아남았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던 미래와 같다.
그러나-
“리오넬 백작 각하께서는 일단 영지로 귀환 중이십니다. 아마 라파예트 후작각하께서도 그렇겠지요.”
‘청기사’ 라파예트 후작. 내 아버지는 역병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아직 자세한 건 결정되지 않았지만 2왕자 전하께서 결국 타협을 거부한다면, 1왕자 전하의 측근이었던 로렌 공작 각하를 중심으로 작위를 보전받기 위한 항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 또한 1왕자파의 일원으로서, 라파예트 후작 각하를 보좌하여 리오넬 가문과 함께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영지의 마을을 지켜주신 소후작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든든하군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모양입니다.”
아마 귀족의 수치 운운하는 소문을 말한 것 같지만, 나는 행복한 얼굴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에리스를 보느라 그를 신경 써주지 못했다.
후작이 살아서 영지로 귀환한다는 건 곧, 회귀 전과 달리 내가 당장 후작으로서 라파예트를 총괄할 수 없다는 거다.
영주 대리로서 내가 보장한 사안이 있긴 하지만, 후작은 내 위신이나 가문의 신뢰 같은 걸 신경 쓰는 자가 아니다.
만약 후작이 에리스의 가치를 눈치채고 이용하려고 든다면....
“아, 소후작님께서 저렇게 대단한 치유사를 데리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보고를 듣자 하니 실로 대단하더군요. 영민들이 성녀라고 칭송할 정도라니, 저런 자를 어디서 찾아내셨는지 조금 부럽습니다.”
내 시선을 따라온 리오넬 소백작의 말이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운이 따라주었지요, 소백작님. 괜찮으시다면 그녀에 대한 사안은 함구령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째서입니까? 저런 자라면 라파예트 가문의 위신에도....”
“사정이 있습니다. 대신, 이번에 미르보 가문에서 받아낼 몸값의 일 할을 드리도록 하죠.”
“크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철저히 함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내전에서 중립이어서 평소에 특별히 교류할 일이 없는 남부의 앙쥬 가문과 달리, 1왕자파인 리오넬 가문에서 나오는 말은 바로 후작에게 들어갈 우려가 크다.
영민들의 입단속이 완벽할 리 없으니 임시방편이긴 해도, 최소한 당장 후작에게 이야기가 전해지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만약 후작이 에리스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 같으면, 에리스를 아예 크리스틴에게 맡기는 것도 고려해야 할지도. 그녀는 믿을 수 있으니까.
역병으로 허무하게 죽었던 후작의 생존.
아버지의 생환임에도 기쁨보다는 우려가 더 크다.
나는 창밖의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쏟아지겠군요.”
-
프랑지아 왕국의 수도, 뤼미에르.
암운이 가득한 하늘에서 을씨년스러운 비가 쏟아지는 도시.
착취와 빈곤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리에 과거의 찬란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두운 도시의 한 건물에서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1왕자가 죽어서 그 긴 내전이 이제야 끝나나 싶었는데 잔당을 끝장내기 위해내전을 이어가겠다니, 정녕 신께서 프랑지아 왕족의 마지막 남은 이성까지 거 두어가셨나 보오.”
프랑지아 왕국 내에서는 드물게 존경받는 주교, 아르노 리슐리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주받을 왕족들은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 저자들이야 말로 프랑지아를 좀먹는 쥐새끼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한 놈은 신께서 거두셨으니, 남은 한 놈은 우리 손으로 치워야 합니다!”
“구체제에 빌붙어 조국을 좀먹는 왕족과 귀족. 인민의 적들이 명확해졌으니, 이제는 피를 볼 일만 남았습니다.”
언론인 쟝 말로와 변호사 브누아 레베리가 제각각 떠들었다.
“글쎄, 모든 귀족들이 다 죽여 마땅한 건 아니오. 최근 남부의 젊은 귀족들은 제법 평이 좋더군. 새로 영주가 된 아키텐의 여백작은 교역을 지원하고 자선 사업을 벌이며 도시들과 유대를 쌓고 있고, 라파예트의 소후작도 요새 들리는 평판은 썩 괜찮더이다.”
자유주의자이자 작가로서 유명한 니콜라 브리소의 말에 소위 급진파라 불리는 말로와 레베리가 얼굴을 구기는 사이, 급진파의 거두가 입을 열었다.
“흥, 아키텐은 돈으로 작위를 사들여 부패한 왕국에서 한 자리 해먹은 자들일 뿐이고, 라파예트의 후작이 어떤 자인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 아들 따위로 면죄부를 주기엔 라파예트의 이름으로 쌓인 추악함과 악행이 이미 차고 넘칩니다.”
그 거두, 저명한 법률가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반박을 들은 브리소는 미간을 구겼다.
“글쎄, 다 썩어 문드러졌을지언정 왕국은 아직 강하오. 모두를 적대하느니 말이 통하는 자들과는 타협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래봐야 푸른 피의 귀족일 뿐이지요. 우리가 무너져 마땅할 구체제를 무너트렸을 때에야 비로소, 저들이 쓴 것이 민중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아니라 위선의 가면임이 드러날 겁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이제 우리에게는 행동외에 어떤 선택도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지도르는 이 회합의 리더격인 리슐리외에게 열망에 찬 시선을 보냈다.
“그 긴 내전과 역병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저 미친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이제는 프랑지아 인민의 피가 아무리 많이 흘러도 저들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 테니까!”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슐리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지금까지 인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지. 그렇기에, 무언가가 되고자 하고.”
존경받는 주교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준비를 해보세나. 저들이 끝내 마지막 남은 프랑지아의 피 한 방울까지 맛보기 위해 다시 격돌한다면, 그때야말로 우리가 일어설 기회가 될 거요.”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