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기 - 성녀 에리스 (2)
에리스가 내 후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대로 이 영지의 주인인 앙쥬 백작가로 찾아가 내 신분을 밝히고 후원자로서 에리스를 소개했고, 민가를 하나 빌리자 그때부턴 에리스가 일일이 이 집 저집 찾아다니지 않아도 영지 내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렇게 병자들의 치료가 진행되면 다른 마을로 옮겨 다니는 식으로 병자들을 치료하며 보름이 지나갔다.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나는 축 늘어져서 칭얼대는 에리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에리스의 신성력은 굉장한 수준이긴 한데, 아무래도 사용하는데 그녀의 에너지를 상당히 소모하는 듯하다.
외모만 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대식가인 것도 아마 그런 이유겠지.
“아아, 왜 제 힘으로는 배를 못 채우죠? 이게 정말 ‘신성력’이라면 신께선 생각보다 무능하신 것이 아닐까요.”
“신성력을 쓰면서 그런 소리를 해도 되나?”
“줄어들지 않는 걸 보니 되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신성력이라는 명칭도 빛의 교단이 붙인 거잖아요? 사실 저는 그냥 기원 정도로 생각해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강하게 품는 거죠.”
“난 신성력을 가지지 않았으니 잘은 모르겠다만....”
내가 말을 흐리자, 에리스는 아예 한 술 더 떴다.
“애초에, 자녀가 아쉬운 소리 좀 한다고 앙심을 품을 정도로 쪼잔한 존재가 신이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다 좋은데, 나중에 성직자들을 만났을 때는 좀 자중해주면 좋겠어.”
어이없게도, 성녀라 칭송받는 이 왕녀님에게는 신앙심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솔직히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병자들을 전부 치료해내는 기적을 마구 뿌리면서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자니, 나까지 얼마 없던 신앙심을 마저 잃어버릴 것 같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화로불에서 꿩고기를 끼워둔 꼬치를 꺼내서 살펴본 후, 적당히 잘 익은 것부터 에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해.”
“우와아, 감사합니다!”
에리스는 뜨거운 꿩고기를 열심히 후후 불어가며 돌리더니 한입 베어 물곤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꼬치가 익을 때마다 하나씩 건네주고 있자니, 그걸 받아먹던 에리스가 고기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정말, 끝까지 후작령으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셨네요.”
솔직히, 아주 초조하지 않냐면 그건 아니었다.
역병이 진행 중이고, 내가 대처를 하기는 했지만 이곳의 주민들보단 후작령의 내 영민들을 더 돕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불안 초조해하며 난리 치고 있을 듀몬트 남작도 신경 쓰이고.
그러나 상대는 왕녀다.
지금이야 숨기고 있고 회귀 전에도 본인 입으로 밝힌 적은 없다지만, 나와 엮인 이상 언젠가 그녀와 다른 귀족들이 접촉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에리스에게 수락을 받아내긴 했지만, 아직은 그저 조건 좋은 후원자 정도다.
혁명이 터지면 정말 혼란의 시대가 될 텐데, 그럴 때 그녀가 나만큼은 온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줘야만 확실한 동지가 될 수 있다.
“시작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뒤는 볼 것도 없겠지.”
그렇게 답하고, 나도 꿩고기를 한입 먹었다.
맛있네.
나는 입안에서 퍼지는 육즙의 맛과 향을 느끼며 그것을 삼킨 다음, 에리스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대도 일을 확실히 해주지 않았나. 앙쥬 백작의 호의는 나중에 반드시 도움이 될 테지.”
에리스는 자신이 라파예트 후작가의 후원을 받는 몸임을 분명히 밝혔고, 역병에 걸려 있던 앙쥬 백작의 막내아들을 치료해주었다.
앙쥬 백작은 아들과 영민들을 치료해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에리스는 그걸로 식량을 사서 라파예트 후작가와 앙쥬 백작가의 이름으로 백작령의 영민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에리스와 라파예트의 이름은 깊게 각인되었겠지.
게다가 앙쥬 백작도 영민들이 기뻐하며 백작을 함께 칭송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필요로 할 때 한 번의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솔직히 역병이 도는 동안 영지를 반쯤 방치해둔 앙쥬 백작에 대해 그리 좋은 평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프랑지아 왕국 기준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귀족이지만, 에리스에게 저도 모르게 감화되어서 저러는 거던가.
“소후작님이 제 후원자를 자처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게 활동했을 테니까요. 저 혼자서는 대뜸 백작가에 찾아가서 신뢰를 얻을 순 없어요.”
에리스는 한 지방을 역병에서 구해내고 백작도 감화시켜 성녀라 칭송받는 몸임에도, 가볍게 답하며 꿩고기를 먹는 데 열중했다.
어쩌면 성녀라는 칭송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가스통과 프랑크가 돌아왔다.
기사 특유의 호승심이 발동한 건지, 대련을 하겠다며 나갔었는데.
나도 구경하러 따라가려다가 아직 햇볕도 강한 시간이고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에리스에게 붙잡혔지만.
“제가 졌습니다. 나름대로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가스통 경의 실력이 대단하군요.”
“오....”
평소 과묵하던 프랑크의 말에 에리스가 가볍게 감탄해서, 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가스통은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기사일 테고, 프랑크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중년이니까 결과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제가 졌을지도 모릅니다.”
가스통의 말에는 나도 꽤 놀랐다.
저 고지식하고 충직한 기사는 예의상의 빈말을 할 정도의 요령이 없다. 그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거지.
아마도 수도에서 실종된 이래 계속 왕녀를 지켜왔을 기사. 실력이 출중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도 더 거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과묵해서 별 존재감도 없고, 왕녀의 덤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지....
내가 프랑크를 보며 고민에 빠져 있자 에리스가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며 소리를 냈다.
“그럼, 이제 이 근방의 역병은 거의 해결되었으니.”
긴 시간 우리를 남부에 머물게 한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후작령으로 가요, 소후작님.”
-
일행이 고작 넷이니, 채비를 하고 떠나는 건 금방이었다.
중간에 앙쥬 백작이 환송연을 열겠다는 걸 말리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우리는 백작에게 에리스와 프랑크가 탈 말을 얻어 후작령으로 출발했다.
몸을 꽁꽁 싸매고도 땡볕 아래에서는 제법 힘들어 하는 에리스를 배려해서 석양이 질 때쯤부터 밤 동안 이동하고, 낮에는 쉬는 것을 반복했다.
가스통과 둘만 올 때와는 달리, 재주도 많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에리스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심심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후작령에 도착하기 직전.
우리는 지나는 길에 있는 마을이 약탈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벌써 약탈을?”
우리가 남부에서 머무르는 동안 역병도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역병의 상처가 채 지워지기도 전에 약탈이라니.
어지간히도 급했나.
병사는 대략 50여명 정도, 기사로 보이는 건 셋.
이전 후작령에서 미르보 백작가의 군대를 기습했을 때와 달리 마을이 평야지대에 있다.
활을 통한 기습 저격도 힘들 테고, 지금은 약탈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저들도 곧 우리를 발견할 거다.
나는 조용히 우리의 전력을 가늠해보았고, 결정했다.
“우회해서 지나쳐 가지.”
하지만 에리스가 반발했다.
“저항할 수도 없는 무고한 이들을, 저대로 그냥 놔두고 가나요?”
“이곳은 후작령도 아니니 내가 지킬 의무도 없고, 우리 인원이 너무 적어서 위험해.”
에리스는 잠시 비명소리가 가득한 마을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소후작님이 나서는 것이 정치적인 문제가 되나요?”
이곳은 1왕자파인 리오넬 백작의 영지니, 약탈 중인 군세는 아마도 2왕자파일거다.
여기서 나선다면 동맹의 영지 방어를 돕는 거니 명분은 충분하고, 아마도 백작의 감사도 기대할 수 있겠지.
“...아니.”
“그러면 소후작님과 두 기사분이 이런 후방에서 약탈이나 하고 있는 오합지졸이나, 어중이떠중이 기사보다 더 약한가요?”
“...아마, 아니겠지. 하지만 병사도 많고 기사도 셋이야.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가 그대까지 지켜줄 여력이 없을지도 몰라.”
에리스는 수긍하지 않았다.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최소한 방해가 되지는 않도록 할게요. 저들을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세요.”
“에리스, 만에 하나라도 그대가 다치는 일을 피하고 싶은 거야.”
약탈당하는 주민들이 안타까운 건 맞지만, 왕녀가 위험을 무릅쓰게 둘 수는 없다.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그녀를 말려야 할 입장일 프랑크가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
“소후작님,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저나, 소후작님도요.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무수히 죽거나 다칠 사람들의 가치보다, 지금 나섰을 때 다칠지도 모를 저 한 사람의 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하나요?”
죽거나 다칠 많은 사람들과 다칠지도 모를 왕녀 개인의 가치, 라.
우리가 언쟁하는 사이, 저 멀리 마을에서 우리를 발견한 병사가 기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보였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 힘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는 저들은 그저운 없이 평민으로 태어나서, 혹은 기회를 얻지 못해서 저런 처지에 놓인 것에 불과해요. 왕국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아니셨나요?”
가스통은 나와 에리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당장 저곳에 뛰어들고 싶다는 듯 검집을 단단히 잡고 있다.
운 없이 평민으로 태어나서, 더없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얻지 못한 기사가 내 명령만을 기다린다.
나는 가만히, 저물어가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소후작님께도 당장 저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은 그저 여유가 될 때 적당히 위에서 보살펴줄 이용대 상일 뿐이고, 소후작님께 가치 있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선 얼마든지 죽어 나 가도 상관없는 그런 존재인가요?”
베일 너머로 보이는 소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그러나 절박함을 담아 나를 설득하고 있다.
그런 에리스의 음성 위에.
-후작, 그러니 그대들 귀족이 푸른 피라는 거요.
단두대에서 들었던 조소 어린 음성이 덧칠되었다.
아아.
그런가.
가스통을 내 사람으로 두고서도, 나는 아직까지도 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나.
영민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잘해주는 것조차 결국 내가 혁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에리스도 성녀이자 왕녀로서 내게 중요한 패이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지키려고 하는 거다.
모든 사람을, 심지어 가족조차 오직 자신의 위대함과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가치 있는 재료인지, 아닌지로 판단하던 후작.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도구로 보던 그를 얼마나 경멸했던가.
그와 같은 자가 되지 않겠다면서, 나도 이들의 가치만을 재고 있었나.
“부탁이에요, 소후작님. 저는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외면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지금 이곳에 있어요.”
도망자로서 숨어 지낼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나서서 사람들을 구하며 성녀로 칭송받다가, 끝내 왕녀로서 단두대로 끌려간 소녀의 간청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단 하루 차이로 같은 단두대에서 죽었을 그녀와 나의 차이를 절감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처음으로 혁명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짠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에 응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가스통과 프랑크가 검을 뽑아 들어,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 빚은 확실히 받아낼 거야, 에리스.”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더없이 기쁜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등을 밀어주는 듯하여, 말의 엉덩이를 박찼다.
돌아온 그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어떤 선택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를 계산하던 머리가 텅 비었다.
그녀가 성녀든, 왕녀든 상관없다.
지금 구할 이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막을 수 있는 부조리에서 눈을 돌리고, 뭘 바꿀 수 있다는 거냐.
가스통과 프랑크가 양옆에 따라붙고, 에리스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따스하게 몸에 스며든다.
약탈하느라 바쁘던 적 병사들이 바쁘게 집결하는 와중에, 기사와 기병들이 먼저 이쪽으로 접근한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적의 문장이 익숙하다.
...미르보 백작가의 문장.
아, 운도 없으시지. 이건 조금 미안한걸.
어쩌지?
에리스의 축복에 의해 넘칠 듯이 흐르는 힘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