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4화 (14/258)

내전기 - 성녀 에리스 (1)

성녀 에리스.

본명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미모와 지성으로 선대 국왕의 총애를 받았고, 결국 후궁이 된 코르티잔의 딸.

그녀가 수도에 머무르던 시절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몸이 약해서 후궁과 국왕이 애지중지하며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국왕이 급사하고 수도에 내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때쯤 후궁과 함께 실종되었다.

그 후론 행적이 묘연하다가,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왕국 남부에 등장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다녔다.

그 헌신과 터무니없는 신성력으로 성녀라고 불리며 민중들에게 존경받은 유일한 왕족이나, 본인의 입으로 성녀를 자칭하거나 왕족이라고 떠들고 다닌 적은 없다.

그녀가 왕족이라고 밝혀진 것은 한참 이후로, 왕녀를 신성 교국의 공식적인 성녀로 삼아 교단의 영향권 안에 넣으려던 제안이 거부되자 교국이 왕녀의 행적을 추적해서 밝혀낸 사실이다.

빛의 교단의 이름으로 찍힌 마녀의 낙인과 왕실의 혈통이라는 명분이 붙자, 공화정부는 온갖 선동과 날조 끝에 그녀를 단두대에 세웠다.

내가 처형당하기 하루 전에 죽었다고 듣기만 했고, 나는 그녀를 직접 만나 본적은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자애로운 성녀나 기품 있는 왕녀 정도를 예상했었다만....

“그리하여, 기사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았답니다.”

디링- 하고 하프를 퉁기며 이야기를 끝마친 에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치 연극배우 같은 모양새로 인사했다.

짝-짝-짝- 하고 박수소리가 났다.

...그 무뚝뚝하던 가스통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다.

처음에 음식을 나눠 달라고 청하며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후아, 떠들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에리스가 그렇게 기운차게 외치기가 무섭게, 가스통과 프랑크가 냉큼 큼지막한 멧돼지 살을 썰어서 건넸다.

프랑크는 에리스가 데리고 다니던 호위다. 그냥 간단하게 프랑크라고 소개했고 복장은 여행자와 다를 것 없는 중년 남성이지만, 나나 가스통이나 그가 기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스통이 그 사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에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사람이 내민 멧돼지 고기를 바라보더니, 이 내 하프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둘 다 받아들며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부터 내 호위 기사가 왕녀의 시종이 된 거지?

내가 미간을 좁히든 말든, 에리스는 양손에 쥔 고기를 호호 불더니 번갈아가며 한입씩 먹기 시작했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수상할 정도로 전신을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지금은 베일과 장갑을 벗고 얼굴과 손을 드러내고 있다.

드러난 그녀의 피부는 완전히 새하얗다.

보통 집 안에서 생활하는 귀족 영애들이 다 그렇지만, 그녀는 단순히 그런 수준을 넘어서 달빛 아래에서 창백해 보일 정도다.

...그건 그렇고, 잘 먹네.

아니, 좀 심각하게 잘 먹는다.

겉보기로는 10대 중반 정도인데 벌써 멧돼지의 반 정도는 혼자 먹어치운 것 같다.

먹는 중간 중간 음식에 대한 보답이랍시고 노래도 부르고, 하프 연주도 하고, 춤까지 선보였는데 뭘 해도 실력이 상당해서 꽤나 즐겁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막연히 그렸던 고상한 성녀 내지 비운의 왕녀의 이미지는 이미 산산조각 난 지 오래다.

이건 아무리 봐도 성녀라기보다, 먹보 음유시인이잖아.

괜시리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고 있으니, 에리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마음껏 먹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프랑크 아저씨는 사냥은 영 어설프셔서....”

“크흠. 크흠.”

나는 민망해하는 프랑크를 흘긋 본 후 툭 던지듯 답해봤다.

“사냥은 보통 사냥꾼의 일이지, 기사의 일은 아니니까.”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왜 우리를 피해 다닌 거지?”

“귀족의 전속 치유사로 데려가려고 온 심부름꾼인 줄 알았어요. 며칠 피해 다니면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웬걸? 제가 먼저 배고파서 쓰러지겠더라고요!”

기사의 일은 아니라고 떠본 것도 자연스럽게 웃고 지나가 버렸다.

피해 다닌 것을 숨기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말해서, 더 추궁하기도 묘하다.

에리스와의 대화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말하고 있는지, 의도적으로 돌려가며 말하는지 구분할 수가 없다.

제일 놀라운 건, 굳이 그녀에게 이것저것 따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본의 아니게 고생하시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에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고,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길고 새하얀 머리칼은 모닥불의 불빛 앞에서는 붉은색으로 물들고, 달빛 아래에서는 은색으로 빛난다.

눈썹도 똑같이 흰데 눈동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붉은색과 푸른색을 오가는 보라색이어서, 마주보고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신비한 생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안겨준다.

함께 어울리고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그걸 본인이 자각하고 하는 건지 아닌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에리스 본인이 아직은 아름답다기보다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기도 하지만, 이건 단순히 아름다운 이성에게 끌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신비하기 그지없는 외모에 넘치는 생기, 그리고 기묘한 언행까지 포함해서.

그녀가 성녀라고 해도, 마녀라고 해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 것 같은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면 힘들지 않으십니까?”

“제가 태어날 때부터 햇빛에 약해서요. 너무 주목받기도 하고요.”

그 수상하기 짝이 없던 행색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자연스러운 답이 나왔다.

우리는 귀족임을 밝혔고, 에리스는 자신을 여행자라고만 소개했다.

그럼에도, 가스통이 에리스를 공손히 대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애초에 행동거지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교양과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그녀가 평민이라 믿고 업신여길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잠시 고민 중이었다.

왕녀를 찾아내면, 그녀를 후작령으로 데려가기 위해 설득하려고 준비해둔 말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에리스를 보고 있자니, 어느 쪽도 정답일 것 같지 않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에리스 양.”

“네, 말씀하세요.”

“이렇게 먼저 다가왔다는 건, 내 이야기를 들어볼 결심이 섰다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지.”

에리스는 굉장히 미묘한 표정이 되어서 침묵했다.

처음 합류한 이후로 그녀가 말하기 곤란해 보이는 기색이 된 것은 처음이어서, 농담 삼아 한마디 더 던졌다.

“설마하니 멧돼지 통구이의 냄새 때문에 다가온 건 아닐 테고.”

“...그거 맞는데요.”

“....”

“노, 농담이에요. 어차피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엔 돌아가실 것 같지가 않아서, 차라리 먼저 만나보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냄새까지 풍겨서....”

결국 고기 냄새에 진 거였냐고!

나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다음, 애매하게 웃고 있는 에리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라파예트의 소후작이고, 그대를 후작령의 손님으로 초대하고자 왔다.”

“제가 역병을 고칠 수 있어서인가요?”

“부정하지는 않지. 그대가 가진 힘을 알아낸 영주는 누구라도 그대를 탐낼 테니.”

“음- 만약 거절하면요?”

에리스가 웃으면서 되묻자, 방금까지 흐뭇한 얼굴로 에리스를 보고 있던 프랑 크와 가스통이 조금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사유는?”

“지금 이곳에 병자가 많은 걸요.”

“흠,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의 병자들을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이 지역의 병자들은 그대가 상당히 치료해준 것 같은데. 후작령에도 병자들은 있을 테고.”

“...제가 듣기로, 후작령은 소후작님 덕분에 비교적 상황이 양호하다고 하던데요. 반면 이 인근은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거의 방치된 상태였고요.”

타인의 입으로 내 대처에 대한 평이 나와서 조금 머쓱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순수하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건가? 병자가 많고 도움이 절박한 곳이라면 북부가 더 시급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북부로 가면, 그때야말로 말도 통하지 않는 분들에게 붙잡혀서 종군 치료사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1왕자 전하나 2왕자 전하의 군대 중 한쪽만을 치료하며 그들이 적을 죽이는 걸 돕도록 강요받게 되겠죠.”

에리스는 지극히 담담하게 사실을 나열한다는 투로 말했다.

과연, 그래서 남부인가. 그녀의 언행 때문에 헷갈렸는데, 아주 천진난만하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아마 왕족들은 어린 시절의 그녀를 본 적도 있을 테니, 더 꺼리고 있겠지.

“그리고 같은 이유로, 저는 1왕자 전하를 지지하고 있는 라파예트 가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네요. ...제게 거부권이 있다면요.”

“소후작님....”

가스통이 내 눈치를 슬슬 살피는 양이, 내가 에리스를 강제로 끌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가.

그런 방법도 있기는 하겠지만, 상대는 왕녀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도, 에리스가 그런 식으로 통제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마 라파예트가 아니라도 그대를 탐낼 가문은 많을 거라고 생각해. 성녀라고 부르는 자들까지 나왔는데, 그 정도는 알겠지?”

에리스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이야 역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가라앉아. 그때가 되면 귀족들이 그대를 쫓아다닐 텐데, 도망자로 살 텐가? 보아하니 배를 채우는 재주도 없어 보이는데.”

“윽, 평소라면 노래나 연주로도 먹고 살 정도는 벌거든요? 지금은 도저히 얻어먹기 미안할 만큼 곤궁한 사람들뿐인 데다, 소후작님까지 따라 다녀서....”

“그래, 귀족들이 따라다니면 지금처럼 쫄쫄 굶으면서 도망 다니게 되겠네.”

드디어 에리스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만들어놓고서야 제 나이대의 소녀로 보여서, 조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그대의 후원자가 되어준다면 어떤가?”

“후원자?”

“그래. 보아하니 재주도 많은 것 같고, 귀족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니야. 예술가로서 후작저에 머물게 해주고, 그대가 외부에 나갈 때는 후작가의 손님으로서 보호해주지. 어떤가? 최소한 귀족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보단, 이쪽이 그대가 원하는 활동을 하기에도 수월할 거라 생각하는데.”

“군에 대한 종군은요?”

“그대가 원하면 모를까, 종군 의무는 지우지 않을 것을 보장하지. 그대는 공식적으로는 내가 후원하는 예술가일 거야. 물론 후작가의 보호를 받으며 외부에서 치료나 자선활동을 하다 보면 결국은 알려지겠지만, 귀족들이 귀찮게 굴일도 확실히 줄고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날 걸.”

에리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프랑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프랑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소후작님?”

“물론.”

“소후작님의 말대로 제가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소후작님이 제안하신 대로 보호받으며 활동할 자유가 있고, 자선활동에 자금까지 지원해주신다면 저로선 더할 나위가 없죠.”

에리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소후작님은 뭘 원하시는 거죠? 그저 전속 치유사로 부리기 위해서 이러시는 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후원해주시는 것이, 소후작님께 어떤 이득이 되나요?”

그렇게 묻는 에리스의 보랏빛 눈동자는 안쪽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해서, 뭐라고 포장한들 다 뚫어볼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차라리 왕녀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까? 하지만 수년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대뜸 밝혀봐야 경계만 사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도 나는 아직 후작이 아니다. 그녀가 왕녀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는 아직 그녀의 신변을 확실하게 보호해줄 수 없다.

결국 고민 끝에, 지금 말할 수 있는 선에서의 사실만을 꺼냈다.

“왕국에 변화의 물결이 오고 있는데 왕족과 귀족들만 그걸 모르고 있어. 한계에 달한 평민들은 더 이상은 가만히 착취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어쨌든 귀족이자 영주지만, 그대는 평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지. 그러니, 그대를 보호하고 후원해주는 것이 나에게도 득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저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 나는 그대의 자유를 제약할 이유가 없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지. 원한다면, 그대가 바라던 대로 이 인근에서 치료 활동을 하는 것부터 도와주겠다.”

“노골적이시네요.”

“성녀의 고결함에 반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놈처럼 말할 걸 그랬나?”

“아니요, 그랬으면 오히려 수상했겠죠?”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피식 웃으며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는 흰 머리칼이 달빛에 의해 은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시야를 사로잡고, 그녀가 로브 자락을 마치 드레스처럼 들어 올리며 살짝 무릎을 굽혀 보였다.

“과분한 제안,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라파예트 소후작님.”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한 순백의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보라색의 신비한 눈을 빛내며 미소 짓는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후원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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