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3화 (13/258)

내전기 - 란 가스통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내 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이건, 뭐지?

내 의식은 멍했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무수하게 연습한 검술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아, 이건.

땀으로 들러붙은 옷과 빠르게 움직이는 몸에서 나는 소리와, 그에 맞춰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맹렬한 검격의 파공음이 울린다.

기사제의 기억인가.

이내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저릿함이 손을 타고 내 팔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한 순간, 꿈속의 나와 내 의식이 겹쳐졌다.

몇 차례 검을 맞부딪힌 뒤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자, 숨죽이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오오....”

“저 자는 대체 누군가? 실력이 아주 대단하군.”

“용병의 아들 란? 소후작님과 나이도 같군. 근본도 없는 평민이 어떻게 저런....”

가문의 연무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이 별 생각 없이 내뱉는 탄성과 말들이 그대로 중압감으로 변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 중압감과 가쁜 숨에 시달리며, 나는 앞에 선 상대를 노려보았다.

란. 듣도 보도 못한 평민 출신으로, 용병의 아들이라는 소년.

부들부들 떨리는 내 검과, 호흡에 따라 차분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검의 대조가 머릿속의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제대로 된 검을 잡을 수도 없던 6살 때부터 엄격한 후작의 명으로 기사들에게 굴려지며 배운 검술이다.

그런데, 제대로 기사로서의 교육을 받았을 리도 없는 자를 꺾지 못하고 있다니!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맞은편에 서서, 검을 내밀고 있는 소년은 그 스스로도 놀람에 차있다.

그것이 오히려 내 속에 천불을 지르고, 분노와 당혹감에 휩싸인 머리가 어질 어질했다.

혼란에 휩싸여 생각이 소용돌이 치고 있던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준 것은 혀를 차는 소리였다.

“쯧-”

무수한 수군거림 속에서도 선명하게 귀를 파고드는, 가장 상석에서 들려온 소리.

아버지. 위베르 드 라파예트 후작.

압도적인 무위와 용맹으로 일개 기사에서 라파예트 후작가를 탄생시킨 전쟁영웅.

그리고 왕국 최강의 기사로 칭해지는 자.

그런 자가 일개 평민 소년에게 고전 중인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심하다는 그의 눈초리가 화살처럼 등을 찌르는 듯한 착각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과 함께 열기 서린 몸을 싸늘하게 훑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지금껏 노력 해온 것이 아닐 텐데!

가슴에 차오른 조급함에 등을 떠밀려, 다시 한 번 뛰어들었다.

“으아아아!”

입으로 지르는 기합성은 내가 듣기에도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땅을 박차고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검을 내지르자, 이내 금속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충격이 팔을 덮친다.

전력으로 질주하며 온 힘을 담아 내지른 검은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상대는 지극히 방어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검의 궤적을 읽고 그것을 받아내고 피하며 대응한다.

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대등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위 기사라는 이름을 내건 자들은 내가 열세라는 것을 몰라볼 리가 없다.

정공법도, 눈속임도, 지금껏 갈고 닦은 모든 검술을 총동원해도 내 눈에는 도저히 저 방어를 뚫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의 격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전혀 공세로 나오지 않는 이유도 뻔했다.

내가 후작의 아들이니까.

후작이 보는 앞에서 후작의 아들에게 대놓고 패배를 안겨줄 수도, 그렇다고 어설프게 져줄 수도 없어서 방어로만 일관하고 있는 거다.

그 비참한 배려, 아니 처신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연이은 검격의 피로가 쌓여 저려오는 팔, 이 광경을 지켜보는 후작과 가신들의 실망스럽다는 눈초리.

그 모든 것이 견디기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억세게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혈향이 번지며 입안을 감돌았다.

프랑지아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후작의 아들로서 받는 온갖 기대감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쫓아다녔다.

후작은 기사로서는 위대했을지언정 좋은 아비는 아니었다.

그는 나 또한 그의 뒤를 이어 왕국 최고의 기사가 되기를 원했고,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는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련을 견뎌야 했다.

고작 이런 결과를 보이기 위해, 이렇게 끝나기 위해 그 고통을 버텨왔을 리가 없다!

하지만 다시금 발을 박차고 뛰어드려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만.”

상대는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거두었고,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상석을 바라보았다.

후작의 싸늘한, 한심하다는 눈초리가 칼날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그만하면 충분하군.”

이 한심한 꼴을 보는 건.

후작이 입으로 뱉지 않은 말이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안타까움과 측은함을 담아 나를 보는 가신들과.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어머니.

그게 결국 나를 폭발시켰다.

“아직이야, 나는 아직!”

뭐라고 절규했는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검을 들어올리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소, 소후작님!”

검을 거두었던 란이 마력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내 검을 보곤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기사의 기초자격이라 할 수 있는 마나 운용은 단순히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마나가 실린 검을 그냥 철 덩이로 막을 수는 없다.

기사제는 어디까지나 기사로서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까지 포함하여 그 재능을 보이기 위한 대회.

자연히 마나의 사용도 금지되어 있다는 규칙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막지 못할 상대가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이 순간엔 머릿속에 없었다.

평생을 중압감과 가혹한 지도 속에 보낸 유년기를 수포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그저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는 처절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

그러나 그 직후, 금속이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는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내 검이 폭발하듯 산산조각 나버렸다.

산산조각 난 검의 파편에 몸 이곳저곳이 긁히고 베였지만, 나는 고통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가 검의 형체조차 남지 않은 파편들 사이에 멀쩡한 형태로 떨어져 있는 단검에 가 닿았고, 그 다음으로는 그걸 던진 주인에게로 향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14살의 아들이 보여준 한심한 발버둥에 대한 아비의, 후작의 감상이었다.

-

“아, 제기랄.”

나는 욕설과 함께 눈을 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인 순간의, 거지같은 꿈을 꿨다.

“소후작님? 무슨 일이라도....”

나는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내 호위기사, 란 가스통의 얼굴을 보곤 자괴감을 느끼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우리는 왕녀를 찾기 위해 몽펠리에로 이동 중이다.

듀몬트 남작은 역병이 돌고 있는데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뒷목 잡고 기절하는 시늉을 하면서 나를 뜯어 말리려 들었지만, 왕녀의 확보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일인 만큼 무리해서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호위를 줄줄이 데려가자니 역병이 도는 상황엔 더 위험해질 뿐이고, 무엇보다 도시를 봉쇄해놓고 소후작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꼴을 보였다간 후작령의 영민들이 뭐라고 오해할지 뻔하지.

그래서 나만 보낼 수 없다며 호위를 자청한 가스통과 함께, 둘이서 은밀히 도시를 나선 참이다.

어차피 우리 둘 모두 제 한 몸 지키기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이쪽이 이동도 훨씬 빠르다.

한밤중의 하늘은 완전히 어둡고 모닥불이 타면서 내는 소리 외에는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인생 최악의 흑역사를 곱씹으며 잠시 몸을 떨다, 되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따지고 보면 ‘가스통 경’의 이름을 하사받은 란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저 하필이면 왕국 최강의 기사인 후작이 자존심 빼면 시체인 인간이기까지 했는데, 하필 란이 나와 같은 해에 기사제에 출전했고, 또 하필이면 잔뼈 굵은 용병 아버지에게 어깨 너머로 검술을 배운 란이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검술의 천재였을 뿐.

그놈의 하필, 하필, 하필.

그 불운의 합 때문에, 너무 긴 시간을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불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스통이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집어넣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경.”

“예?”

당시에는 절박함으로 한 짓이었지만, 후작이 아니었다면 나는 가스통을 크게 다치게 만들거나 죽였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사제에서 크게 노한 후작은 나를 꺾은 가스통을 내 호위 기사 명목으로 나와 함께 영지에 처박아두었다. 평민 출신임에도 놀라운 재능을 가진 기사를 중용하진 못할망정 그대로 묻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가스통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듣도 보도 못한 평민에게 패배한 귀족의 수치로 남았다.

“송구하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냥, 여러 가지로 미안해서.”

나보다 덩치가 큰 가스통은 꺼끌꺼끌하게 턱수염이 자란 턱을 괜시리 손으로 긁적였다.

회귀 전에는 나도 가스통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꺼려하며 말도 제대로 걸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내 기사로서 남아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다.

오래 전에 사과하고, 감사를 표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테니, 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역병이 돌고 있는 데도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저는 소후작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당연히 따라야지요.”

나는 가스통의 고지식한 대답에 픽 웃었다. 그 위대하다는 ‘청기사’보다 근본 없다던 용병의 아들이 훨씬 더 기사답지 않은가.

“경, 이제 교대하지. 좀 쉬게.”

“괜찮습니다, 소후작님. 조금 더....”

“어차피 하루 이틀도 아니니 쉬어. 소후작이랍시고 혼자만 잘 것 같으면 수행 원을 더 데리고 나왔겠지.”

“...송구합니다, 그럼.”

가스통은 더 이상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모포를 덮고 누웠다.

나는 그가 하던 대로 모닥불을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누워 있는 가스통을 흘긋 보았다.

평민 출신임에도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끝까지 충성을 다했으나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 채 죽어버린 비운의 기사.

그에게 고하는, 약속이자 결의를 작게 읊었다.

“이번엔 경의 충성이 보답 받게 해주지.”

만약 내가 기사제에서 가스통을 만나 패배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승승장구하며 자란 나는 후작과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혁명군에 패배하여 단두대로 내몰리는 그 순간까지도 왕국과 귀족의 과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나를 죽인 혁명군을 증오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고작 내 죽음만을 피하라고 나를 돌려보냈을 리가 없다. 그 많은 프랑지아의 귀족 중 하필이면 나인 이유가 있겠지.

처음 돌아 왔을 때는 그저, 내가 경멸한 후작이나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으며 죽은 것이 원통했다.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 칠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이미 적지 않은 것을 바꾸고, 많은 이들과의 인연을 얻었다.

무너져 가는 왕국의 피와 고름을 마시며 조소를 흘리는 악마들의 존재도 모른 채, 왕위와 기득권에 대한 탐욕으로 이 땅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왕족과 귀족들을 알고 있다.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소극적으로 때를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결국 이 망할 왕국을 좀 먹는 두 왕자는 입으로만 명예를 찾는 잘나신 기사들의 왕국과 함께 무너져야 한다.

썩어 문드러져가면서도 현실을 부정하며 발악한 나머지 저들의 시체에서 흘러 나온 악취가 모두를 증오와 광기로 몰아넣어, 무고한 이들까지 불태우게 만들기 전에.

-

그 각오가 무색하게, 몽펠리에에 도착한 나는 며칠을 헤매야 했다.

“뭐라고 합니까, 소후작님?”

“진작에 떠났다는군.”

민가에서 나온 나는 절로 얼굴을 구기며 답했다.

필요한 의약품과 식량을 적게나마 조달해주고 폐쇄령을 내린 후작령과 달리 이 지역 영주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피골이 상접한 주민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매달려서 큰일이 날뻔한 적도 있었다.

후작령에서 나올 때 우리가 먹을 건량을 상당히 많이 챙겨왔는데, 아무리 돈을 건네도 식량을 구할 곳이 없어서 이젠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다.

“쯧, 쉽지 않군.”

나와 가스통 모두 얼굴을 가리고 돌아다니고 있고, 마을 밖을 돌아다니는 주민도 거의 없으니 접촉도 적다.

그래도 운 없게 우리 중 하나라도 역병에 걸리면 낭패다.

나는 역병의 희생자들을 불로 태우고 쌓아둔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확실히 이 인근에는 전염병의 희생자가 비교적 적다.

지나온 마을 중에는 아예 길가에 파리로 뒤덮인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건 예사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아 폐허처럼 변해 버린 곳도 있었으니까.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인근 주민들이 왕녀를 성녀라고 칭송하며, 기본적으로 비협조적이라는 거다.

우리는 그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달래도 보고, 귀족의 권위를 내세워 협박도 해보는 등 갖은 수를 썼다.

그러나 알아낸 것은 끽해야 아키텐 상단의 보고처럼 왕녀가 전신을 다 가리는 옷에 베일을 쓰고 호위와 함께 움직이며, 주로 밤에 병자가 있는 민가에 들러치료해주고 떠난다는 정도가 전부다.

심지어, 이 인근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날 때쯤 나는 확신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피해 다니는 것 같은데.”

충직한 기사 가스통도 드물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후작이라는 인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끌고 나와선 역병이 도는 와중에 성녀인지 뭔지를 쫓아다니고 있으니, 호위 기사로선 애가 타겠지.

솔직히 나로서도 막막하다.

우리가 주민들에게 왕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돌아다니고 있고, 그 주민들이 우리보다 왕녀에게 훨씬 협조적인 이상 추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일단 왕녀가 주로 밤에 활동하는 건 확실하다. 거의 대부분의 증언이 일치하니까. 그럼 낮엔 대체 뭐하나? 자나? 숨어있나?

망할 신성 교국이 성녀라고 칭송받던 여자를 잘도 마녀로 몰았다고 생각했는 데, 이제 보니 아주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병자들을 치료하며 다니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전신을 가리고 베일까지 뒤집어 쓴데다 밤에만 활동한다니 마녀로 오인받기 딱 좋네.

결국 나와 가스통은 마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고, 야영할 채비를 했다.

-

나는 오랜 야영으로 더럽게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풀며, 가스통이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넣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가스통이 드물게 기대에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자니 나까지 미소가 지어졌다.

결국 건량이 거의 다 떨어져 가자, 내가 결정한 건 사냥이었다.

활 뒀다 뭐할 텐가, 이럴 때 쓰지!

원래 남의 영지에서 허가 없이 사냥을 하는 건 중죄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민 기준이다. 거기다 영주는 어차피 저택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을 건데 아무렴 어때.

모닥불 위에 걸어놓은 멧돼지 통구이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향을 풍기고,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보자니 절로 마음이 풍요로워 지는 것 같다.

모처럼 고기를 포식하면 망할 야행성 왕녀와 마주칠 확률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밤에 움직이느라 쌓인 피로도 가시겠지.

그러나 즐거운 시간도 잠시.

나와 가스통 모두 내려놓았던 검에 손을 뻗었다.

우리가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자, 숲 사이로 발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마침내 숲에서 등장한 사람은 여행자라면 으레 걸칠법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고, 망토 자락 안에 입은 긴 로브가 보인다.

그런데 망토에 달린 후드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안에 베일을 걸치고 손에는 장갑까지 꼈다.

뭐야, 이거. 완전히 ‘저는 수상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차림이잖아.

...어? 잠깐.

“시, 실례합니다.”

완연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상대 쪽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침묵이 흐르고, 성녀라고 칭송받기에는 지나치게 수상해 보이는 소녀가 허둥댔다.

“초면에 정말, 정말,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호, 혹시 음식을 조금만 나눠주실 수 없을까요?”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는 목소리에, 나는 어이가 없어 전신에서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제길. 그 고생 할 시간에 먹을 걸로 꾀어내 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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