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화 (12/258)

내전기 - 역병

여느 때보다 춥던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이 온 후작저의 응접실.

크리스틴은 언제나처럼 우아한 손짓으로 잔을 들어 올려 커피를 음미하더니, 천천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가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간단하게 젓는 용도로 쓴 은제 티스푼을 흘긋 보곤 입을 열었다.

“얼굴이 조금은 나아졌군요, 크리스틴. 다행입니다.”

크리스틴의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본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크리스틴은 여상하게 답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덕분에요, 피에르.”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는 선대 아키텐 백작의 장례식이었다.

그녀가 물리적으로는 큰 피해 없이 백작가를 확보해냈지만, 심정적으로는 한 순간에 가족을 다 잃은 셈이다. 심지어 배신이라는 형태로.

가문에 반역을 저지른 백작부인의 아들을 살려둔 것도 그녀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겠지.

그런데도 그녀는 의연한 태도로 차분하게 장례식을 진행하여, 불미스러운 일과 백작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아키텐의 분위기를 잘 수습해냈다.

내가 동맹으로 삼은 그녀가 이런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그녀를 끌어들인 장본인으로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내 손을 잡은 그녀가 다가올 환란에서 무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크리스틴은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곤 입을 열었다.

“요청하신 대로, 상단을 통해 북부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분위기는 좀 어떻다고 합니까?”

“당연히 뒤숭숭하죠. 영주들도 슬슬 여력이 없으니 하급귀족이나 부유층에게 조세권을 팔아치우거나 돈을 빌리는 데 쓰고 있는데, 그걸 사들인 자들은 이득을 남기겠다고 평민들을 더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어요. 게다가 북부에선 기록적인 추위로 작황도 엉망이라더군요. 벌써 농민 봉기도 여러 번 일어났어요.”

혁명의 전조는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상당히 따뜻하고 땅도 비옥하여 축복받은 땅이라 불리던 프랑지아지만, 이번 겨울에는 심심찮게 눈이 내렸고 겨울이 끝나 봄이 된 지금도 추위를 느끼는 날이 잦다.

그런 와중에 영주들은 서로의 영지를 약탈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도 필연이다.

“게다가 전선 근처에선 아예 1왕자파와 2왕자파의 군대들이 돌아다니며 도시를 포위하고 갖은 명목으로 돈을 뜯어낸다는 군요. 도시들 입장에선 비싼 돈주고 조세권이나 자치권을 사들였는데, 손바닥 뒤집듯 세금을 내라고 압박하고 거부하면 군대로 협박하니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죠.”

거기까지 말한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물어왔다.

“확실히, 당신이 말한 대로 왕국이 한계에 달한 것 같긴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킨들 왕국군의 압도적인 군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저로서는 조금 회의적인데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돌게 될 역병은 오래 전에 대륙을 공포로 물들이고 잊혀진 흑사병에 버금갈 만큼 치명적이다.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이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신께서 이 왕국의 파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역병은 북부에 잔뜩 주둔해있던 군대를 가장 가혹하게 덮쳤고, 당장 그 역병으로 1왕자가 죽어버렸다.

그 대단하다는 ‘청기사’ 후작도 전장에서 명예로운 기사로서가 아니라, 역병의 희생자로서 비참하게 죽었다.

“음, 피에르. 당신이 말하니까 묘하게 더 꺼림칙한 거 알아요?”

크리스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봐서, 나는 적당히 웃어넘겼다.

“하하, 그건 미안하군요.”

하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꺼림칙함을 넘어선 수준이지.

1왕자가 죽어버린 뒤 살아남은 1왕자파는 2왕자에게 자비를 갈구하며 타협을 청했으나, 이미 한계에 달할 때까지 모든 걸 쥐어짜 낸 2왕자파는 어떻게든 희생양을 빨아먹고 그 손실을 만회할 생각만 했다.

그렇게 1왕자 없는 1왕자파의 잔당이 남부로 밀려나 2왕자파와 다시 격돌하고, 역병으로 이미 너덜너덜해진 군대가 서로를 소진 시킬 만큼 소진 시킨 상황에 북부에서 터진 것이 혁명이다.

그 당시에도 이를 우습게 여긴 2왕자파는 방심하다가 혁명군에게 몇 번 패퇴했고, 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1왕자파의 잔당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렇게 1왕자파의 잔당에서 왕국군으로 편입되어 새로 즉위한 2왕자, 루이 왕의 휘하에서 혁명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등장했다.

“...그 자는 찾지 못했습니까?”

“그 자? 아. 라파엘 발리앙이란 자요.”

크리스틴은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단서가 너무 부족하네요. 도시 출신 인사에, 아마도 군에 종사하고 있을 거고 이름 정도. 이것만으로 찾아내기엔 프랑지아 왕국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벌써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혁명군의 총사령관을 잡았을 때의 나이도 굉장히 젊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혁명이 터진 상황에도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왕국군이 강했다. 그걸 연쇄적으로 격파하며 최종적으로 혁명군에 승기를 불러온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다.

가능하다면 미리 연을 이어두거나, 아니면 확보해두고 싶었는데 역시 정보가 너무 적다.

“일단 계속 찾아는 볼게요. 하지만 그자가 북부 출신이라면 솔직히, 기대할 수 없어요. 아키텐의 상단이라고 해도 1왕자파와 2왕자파가 수시로 맞붙는 주전장에 발을 디딜 순 없으니까.”

“그 정도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비밀이라고 해도 동맹 관계니까, 알려드리죠. 1왕자파와 2왕자파 모두 제게 아주 관심이 많더군요.”

“...그렇겠죠.”

아키텐 백작가는 1왕자와 2왕자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지만, 그동안엔 라파예트 후작가의 동맹으로서 군비를 지원하며 암묵적인 1왕자 파로 활동해왔다.

그러나 나와 크리스틴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와중에 백작가의 주인도 바뀌었으니 양쪽 모두 아키텐 백작가에 눈독을 들여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아주 젊고 매력적인 데다 부유하기까지 한 미혼의 백작이고, 현재 있는 가문의 후계자라곤 이미 가주의 눈 밖에 났을 거라 예상되는 배다른 동생뿐.

혼처로서 이보다 탐날만한 사람도 드물지.

“조건이 썩 나쁘지 않은 혼담도 많이 들어오더군요.”

크리스틴은 그 말을 한 후, 쿠키 하나를 천천히 집어서 느릿느릿하게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는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쿠키를 삼킬 때쯤 간단하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크리스틴은 내 반응에 픽 웃었다.

“전 약혼자 씨는 재미없네요. 그것보단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제가 본 당신이라면 별로 흥미가 동하지 않을 것 같아서.”

크리스틴은 내 답의 어느 부분이 재밌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당장 결혼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비극적인 일을 위로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곤, 실제론 아키텐을 탐내는 승냥이들뿐이니까. 그리고....”

크리스틴은 말을 멈추고는 조금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크리스틴의 남편이 생긴다면 그게 누구든 제일 먼저 그녀의 동생을 제거하려고 들겠지.

“아, 참.”

크리스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가다듬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북부에서 신분론이란 책이 유행이라네요. 성직자와 귀족들에 비해 평민들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라던데, 이것도 당신이 말한 것과 관련 있을까요?”

나는 크리스틴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신분론?”

“음, 소후작님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닌가 보네요?”

“당연히 아닙니다. 혹시 그 책을 입수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하나 구해드리죠.”

크리스틴은 선선히 답해주었지만, 나는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중에 실례합니다, 소후작님. 북부에서 온 급보입니다.”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괜찮아요, 저도 무슨 소식일지 조금 궁금하네요.”

“들어오시죠.”

들어선 듀몬트 남작은 나와 크리스틴에게 예를 갖추더니 서신을 건네주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북부에서 치명적인 역병이 발생하여, 급속도로 확산 중이라는 소식이다.

나는 그걸 크리스틴에게 그대로 들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보더니 눈썹을 틀어 올렸다.

내가 알고 있던 사건이 그대로 터져서 안도해서인지, 아니면 이 사건이 불러 올 끔찍한 참상을 걱정해서인지.

나조차도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 모두, 바빠지겠군요.”

-

“성문 폐쇄!”

“성문 폐-쇄!”

나는 말에 올라 후작령의 수도, 툴루즈가 봉쇄되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도시 안에서는 관리들이 흰 천으로 입을 가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평민들에게 가급적 집 밖으로 나서지 말고 물은 반드시 끓여 먹으라는 교육을 하는 중이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 후작저로 향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역병의 소식이 전해지고 도시 안이 분주해지자 주민들도 영 불안한 눈치다.

그래도 회귀 전에 비하면 상황이 훨씬 낫다.

이번엔 역병이 닥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적당히 동맹 구색만 내던 선대 아키텐 백작과 달리 내가 필요로 하는 물품은 가능한 구해다 주는 크리스틴이 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상대로 남긴 원자재의 시세차익 덕분에 의약품도 어느 정도 있고, 얼마간 도시를 봉쇄한다고 해도 당장 주민들이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식량도 비축되어 있다.

봉쇄 전에 후작령 내의 각 마을마다 같은 지침을 내리고 물자를 전달하느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제때 맞출 수 있었던 것 같다.

대비할 시간도 없이 장기간의 주둔으로 위생이고 뭐고 엉망진창이던 상태에서, 밀집된 대군 상태로 역병을 맞이했을 북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크리스틴이 언급했던 ‘신분론’이라는 책은 내가 회귀하기 전에는 들은 바가 없다.

비슷하게 평민을 의미하는 ‘제3신분’에 대한 책이 유행하긴 했지만 그건 역병으로 1왕자가 죽고, 2왕자가 루이 왕으로 즉위한 뒤에 평민들의 불만을 들어주는 시늉을 하겠다고 의회를 소집할 때 즈음에야 나온 책이다.

크리스틴의 말에 따르면 내용 자체는 그 책과 비슷한 것 같은데, 묘한 위화감이 있다.

내가 회귀하고 한 행동의 영향으로 책의 발매가 앞당겨졌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딱히 짚이는 인과관계가 없다.

나는 말에서 내려 마구간지기에게 애마를 맡기고 저택으로 들어섰지만, 머릿속에서는 상념이 끊이질 않는다.

조금 낙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원래도 신분론이라는 책이 유행했고,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던 내가 그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내용상 귀족들에게 널리 퍼질만한 물건도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크리스틴에 대한 독살 기도는 그대로 일어났었다.

역병의 발생도 그대로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1왕자와 후작이 그 역병의 희생자가 된다고 장담할 수 있나?

나는 집무실로 들어서며, 후작이 전장에서의 전사도 아니고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것은 기쁨도, 슬픔도 아니고 그저 허탈함이었다.

나를 한심하게 여기며 좌절감으로 몰아넣고, 그토록 자신의 위대함에 취해 있던 남자도 운명 앞에서는 바람 앞의 등불과 다를 것 없었다는 사실이 그저 사무치도록 허무했지.

그래서 후작의 죽음도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이었을 크리스틴은 지금 살아있다.

만약 1왕자와 후작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살아남거나, 또는 오히려 2왕자가 죽어버리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미래는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나는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역병이 가라앉을 때까지 북부의 소식은 들을 수 없겠지.

크리스틴이 말한 신분론이란 책을 구해서, 그것이 회귀 전 유행했던 책이 맞는지 알아보는 것도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엔 불가능하다.

역병이 잠잠해졌을 때의 결과는 그저 신께 맡기는 수밖에 없나.

미약한 무력감을 삼키며 집무실에 들어서자, 창가에 비둘기가 있었다.

발가락에 종이가 묶여 있는, 크리스틴에게 맡겼던 전서구.

이렇게 봉쇄되는 상황에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지만, 전서구도 한계가 있다.

기억하는 장소로 돌아가는 것밖에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봉쇄된 상황에는 한번 날려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굳이 크리스틴이 보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소식이라면 몇 개 없다.

나는 급하게 전서구가 가져온 소식을 펼쳐보았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소후작님께.

운이 좋았습니다. 봉쇄로 상단도 활동을 멈췄는데, 마지막에 귀환한 상선이 소식을 가져왔군요.

장소는 왕국 남동부의 몽펠리에 인근. 전신을 가리는 옷에 베일까지 쓴 여자와 호위인 듯한 남자가 병자들을 치료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소후작님이 기대하던 소식이 맞기를 바라며, 소후작님과 라파예트 가문이 평안하기를 빌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크리스틴 다키텐.]

나는 주먹을 거머쥐었다.

찾았다.

신성 교국과 왕국의 성직자들이 제 몸을 사리며 역병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할 때 몸소 병자들을 치료하고 기적을 일으키며 성녀로 추앙받고, 마지막에는 신성 교국에 의해 마녀의 누명을 쓰고 그녀를 칭송하던 자들에 의해 죽어버린.

내전이 시작될 때 수도에서 행방불명 된 왕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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