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기 - 습격
저물어가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
평소에는 아름답다고 느꼈을 그것이, 지금은 마치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여 꺼림칙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자신의 심상에 따라 느껴지는 것은 천지 차이구나.
크리스틴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마차 여행 끝에, 라파예트 후작령에서 귀환한 상단 행렬이 아키텐 백작저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크리스틴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호위 역인 가스통 경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상단을 맞이한 것은 평소와 같은 환영이 아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급하게 달려 나와 마차를 둘러싸는 것을 본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에서 그녀의 뒤를 따라 내리려다 엉거주춤 하고 있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마차 안에 있으렴, 리나.”
“네, 네? 아가씨, 그게 무슨....”
크리스틴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마차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오연하게 꼿꼿이 서서, 병사들을 데리고 나온 두 귀족에게 물었다.
“카론 남작, 듀나 남작, 이게 무슨 일이죠?”
카론 남작이 크리스틴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구합니다, 크리스틴 아가씨. 백작 각하께서 며칠 전부터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가씨를 정중히 모셔오라는 명령을....”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누구죠?”
카론 남작은 날카로운 크리스틴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옆에 있던 듀나 남작이 입을 열었다.
“현 영주 대행이신 백작 부인의 명이오.”
크리스틴은 현 백작 부인의 오라비, 듀나 남작의 오만한 표정을 흘긋 보고는 간단하게 답했다.
“좋아요, 안내하세요.”
그러나 듀나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 전에, 호위 기사의 무장부터 해제해야겠소.”
“언제부터 내가 내 집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죠?”
“아무래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그대는 백작 각하에 대한 독살용의자로 지목되었소. 순순히 협조해주는 것이 조금이나마 의심을 피하는 길이 아니겠소?”
그렇게 선언한 듀나 남작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러나라!”
다가서려던 병사들은 크리스틴의 일갈에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혀,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곧 영주 대행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
듀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대들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키텐의 딸임을 생각하고 판단하라! 진정으로 내가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믿는가? 나는 내 발로 가서 직접 입증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그대들의 행동을 기억할 것임을 모르는 자는 없겠지?”
크리스틴 본인조차 자신이 그렇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요한 침묵이 흐른 끝에, 카론 남작이 입을 열었다.
“무기를 집어넣어라.”
남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가 이끌고 나온 병사들은 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기를 집어넣고 물러났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크리스틴 아가씨.”
크리스틴은 카론 남작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듀나 남작의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물러나는 자는 이 무례를 용서해주마.”
“뭐, 뭣들 하느냐! 영주 대행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곧 백작가에 대한 반역이다!”
병사들은 불안해했으나,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 선택, 후회 없길 바라지.”
크리스틴이 낮게 읊조리자마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스통이 검을 뽑아들고-
뒤에 있던 화물 마차의 문이 박살나며 일단의 무리가 뛰어 내렸다.
“억? 제, 제압해!”
“전원 그 자리에 대기! 움직이지 마라!”
듀나와 카론 남작의 서로 다른 명령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아악!”
“으아아, 내 파아알!”
검과 창이 부딪히고 고함과 비명이 터지는 한 가운데서, 크리스틴은 상복처럼 칠흑 같은 드레스를 입은 채 오연하게 서 있었다.
가스통이 신들린 듯이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베어 넘기고, 이내 화물 마차에서 튀어나온 라파예트의 군사들이 그 뒤를 따르며 듀나 남작의 병사들을 마구 도륙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
크리스틴은 반쯤 광란에 빠져서 자신에게 창을 들고 달려드는 병사를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창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검이 그 병사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병사에게서 쏟아져 나온 피가 드레스를 적셨다.
크리스틴은 검붉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드레스가 오늘 같은 날에 퍽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병사를 베어버리고 크리스틴의 앞을 가로막은 피에르가 바로 단도를 뽑아 던져, 멀리서 화승총을 겨누려던 병사의 미간에 정확히 박아 넣었다.
피에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아, 이 사람이 이렇게 놀란 목소리를 낼 수 있었구나.
크리스틴은 어쩐지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계획은 잠입이었는데 완전히 틀어졌네요, 소후작님.”
다른 단도를 하나 더 뽑아 던진 피에르가 답했다.
“뭐,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면 대충 잠입 아닐까요?”
크리스틴은 그 답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고함과 비명이 가득한데 웃음이 나온다니, 자신도 어떻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듀나 남작은 헐레벌떡 저택 안으로 도망쳤고, 남작의 병사들은 전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피칠갑을 한 피에르가 그녀에게 다가와 고했다.
“명령을 주시죠, 레이디. 라파예트 소후작을 기사로 부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저택의 봉쇄를 부탁드려요.”
“쥐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도록 하죠.”
크리스틴은 표정을 가다듬고, 카론 남작을 바라보았다.
“모시겠습니다, 크리스틴 아가씨.”
-
크리스틴은 카론 남작과 그의 병사들을 마치 부하처럼 거느리고 백작의 침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흘긋 본 그녀의 방은 완전히 헤집어져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 어어....”
그녀를 구속하러 나간 듀나 남작은 보이지도 않고, 같이 나간 카론 남작이 마치 호위인 양 그녀의 뒤를 따르는 광경을 본 백작부인의 호위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저하는 사이, 성큼성큼 걸어간 크리스틴은 백작의 침실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안에 있던 봉신들과 백작부인이 화들짝 놀라는 꼴을 보며, 크리스틴은 피로 물든 검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크리스틴 다키텐, 라파예트 후작령에서의 상행에서 지금 복귀했습니다.”
백작부인 이본느는 크게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백작 각하의 침실에 이런 식으로 들이닥치다니!”
“부인께서 제 출석을 요구하셨다기에.”
크리스틴은 심드렁하게 반응하며, 침대에 누워 의식이 없는 그녀의 아버지를 흘긋 보았다.
이본느는 손에 쥔 부채를 부러트릴 듯 강하게 잡았지만, 이내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에는 뿔이 나고 피부는 갈색이어서 한 눈에 봐도 마족인 남자는 백작부인의 눈짓에 정중히 인사하는 포즈를 취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아키텐.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엔비’ 사 소속, 가프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있는 것은 백작 부인의 출장 조사 의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가프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안에 든 가루를 한 웅큼 쥐고 침대에 누운 백작에게 뿌렸다.
알 수 없는 빛이 나는 가루가 닿자, 백작의 몸 안에 알 수 없는 분홍빛의 무언가가 드러났다.
혈관을 타고 움직이고 있는듯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이 상품은 저희 ‘엔비’사의 제품, ‘이터널 레스트’입니다. 물에 녹으면 무색 무취로 변하는 물질로 일 1회씩, 7일에 걸쳐 섭취하면 섭취자의 혈관을 타고 돌며 가사상태에 빠트리고, 이후 약 7일 이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백작님의 경우, 진행도를 보니 내일 정도면 별세하시겠군요. 그래도 위안을 드리자면, 그 7일간 희생자는 아주 행복한 꿈을 꾸며 고통 없이 죽습니다. 이 얼마나 인도적이고 선진적인 제품입니까?”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대들이 만든 독을 그대들이 검증해준다니, 악취미가 따로 없군요.”
가프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검증이 되지 않으면 본사의 탁월한 상품의 성능을 입증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 있으나 본사의 제품은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되어 있습니다. 본사의 유료 검증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신다면, 다른 낙후된 국가들의 기술로는 검증이 불가능-”
“그래서, 이게 뭔지도 모르는 제가 이걸로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가프의 말을 중간쯤에서 대충 무시한 크리스틴의 물음에, 이본느는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순진한 척을 한다니, 가증스럽군요.”
오히려 크리스틴이야 말로,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오라비와 병사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봉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어떻게든 혐의만 씌우면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이겠지.
이본느가 부채로 그녀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쳤다.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침실문이 열리며 들어선 여성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너는 크리스틴의 시녀였지. 자, 말해보도록. 네 아가씨가 뭘 시켰다고?”
전 시녀는 크리스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조아리며 떨리는 소리로 고했다.
“아, 아가씨께서, 백작님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며 백작님께 올리는 차에 가루를 타라고 시키셨습니다. 저, 저는 그게 뭔지 정말로 몰랐습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인줄로만....”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거짓을 고하는 옛 친구의 모습에, 크리스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정을 생각해서, 저택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었건만.
“혹시, 그 가루가 이것입니까?”
“네, 네. 그, 그 가루가 맞습니다.”
“이 가루는 ‘이터널 레스트’가 맞습니다. 마력으로 빛나는, 이렇게 특징적인 분홍색은 달리 없지요. 물에 타는 순간 녹은 듯이 사라지지만, 결코 분해되지 않고 희생자의 몸에 축적되는 물질입니다.”
“헉....”
“설마 정말로 아가씨가?”
크리스틴은 눈을 감은 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삼류희극 같은 대화를 방관했다.
“이래도 할 말이 있나? 최후의 변론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완전히 의기양양해진 백작부인의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눈을 떠서, 방의 한 구석에 놓인 책장으로 향했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는 사이, 그녀는 익숙한 순서대로 책을 당겨 작은 금고를 열었다.
거기서 꺼낸 문서를 보고, 백작부인이 눈을 흡뜨는 광경은 크리스틴에게 제법 유쾌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나무를 숨기려거든, 숲에 숨겨라.
혹시나 해서 상단이나 크리스틴의 방을 샅샅이 뒤졌을지 모르겠으나, 백작의 침실을 뒤집어엎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
크리스틴은 봉신들과 백작부인이 보는 가운데서 그 서류를 펼쳐들었다.
“거래처 어비스 코퍼레이션 ‘엔비’사. 거래자 듀나 남작. 확실히 기록되어 있군요. 물건이 뭔지는 몰랐는데, 친절하게 검증 서비스까지 불러주셔서 수고를 덜었습니다.”
이본느가 놀라서 손에 쥔 부채를 떨어트렸다.
"그, 그게 어떻게."
크리스틴은 차갑게 조소했다. 이본느는 당연히 저 서류의 파기를 명했었다.
그것을 파기할 직원이 크리스틴의 수족인 것도 모르고.
크리스틴은 봉신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작부인의 가문이 매입한 독이 제 아버지께 쓰였군요. 그걸 제 소행이라고 말한 건 백작부인이 부른 제 ‘해고된’ 시녀고.”
봉신들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크리스틴은 다른 종이를 꺼내보였다.
불에 그슬리고 타들어간 것을 이어붙이고, 복원한 편지.
대부분의 글씨는 알아볼 수 없으나, 라파예트, 상단, 호위, 습격 등의 단어들은 복원하여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서류에는 거의 대부분 타들어 갔음에도 라파예트 후작가 특유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마침 이걸 작성하신 장본인이 친히 방문해주셨으니 검증은 가능할 겁니다. 라파예트 후작가에서 위험을 미리 경고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걸 무시하고 아키텐의 혈족과 상단을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고, 봉신들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백작부인. 그대의 가문이 매입한 독이 백작 각하에 대한 암살기도에 쓰였고, 동맹 가문의 경고를 의도적으로 묵살하여 저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이게 백작가에 대한 반역이 아님을 변론할 기회를 드리죠.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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