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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6화 (6/258)

내전기 - 크리스틴 다키텐 (1)

전투는 영주 대행이 포로로 잡힌 걸 본 미르보의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거나 항복하며 끝났다.

혼절하기 직전 미르보의 차남이 보여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다는 얼굴은 아주 인상적이었지.

사실 나도 억울해.

회귀 전에만 해도, 나도 내가 병신인 줄 알았거든.

나는 왕국 최강이라는 ‘청기사’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릴 때부터 온갖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내 실력을 선보일 첫 무대인 기사제에서 평민에게 패배해 귀족의 수치로 전락해버렸다.

격노한 후작은 일단 승자인 가스통을 기사로 삼아주긴 했지만, 내 호위 기사라는 명목으로 나와 함께 영지에 처박아뒀고.

후작이 죽고 직접 전선에 설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내가 병신인 줄 알고 소심하게 허송세월이나 했던 걸 생각하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병사들이 사상자와 포로들을 수습하는 광경을 보다가, 방금 전까지 아키텐의 군대를 지휘하던 대장을 찾았다.

보아하니, 기사도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중요한 인사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맹으로서 이건 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피에르 드 라파예트 소후작이다. 그대가 책임자인가?”

“라파예트 소후작님을 뵙습니다. 송구하나, 그건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음?”

대장은 나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곤 짐마차들과 달리 귀족용으로 보이는 마차에 다가가 안에 고하더니, 문을 열었다.

저거, 눈속임용으로 끌고 온 게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가벼운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대장이 내민 손이 무색하게 자기 발로 마차에서 내려온 여성은 드레스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권총을 양손으로 잡은 채 주변을 흘긋 둘러보더니, 얼굴을 찌푸리곤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대체 왜 그녀가 여기에 있지?

멍하니 있던 시간은 짧았다.

이내 피비린내에 익숙해진 건지 손을 내린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장에게 권총을 건네고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흑발 흑안의 여성이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무릎만 살짝 숙이며 인사한다.

“아키텐 백작의 딸, 크리스틴 다키텐이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소후작님.”

회귀 전에는 병사했던 내 약혼녀가 나를 마주 보고 있다.

“라파예트 후작의 아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

“우욱!”

내 말은 그녀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구토하는 소리에 끊겨 버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크리스틴은 잠시 어색한 얼굴로 그녀의 시녀를 흘긋 보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그린 듯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청해도 될까요?”

...그건 나도 좀 궁금합니다만.

-

나는 언제나처럼 아키텐 백작령에 공개적으로 물자 매입을 요청하되, 별도의 전령을 파견해 습격이 예상되니 방비를 강화하되 요인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전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령의 귀환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출진 전에 백작가에 전달했다는 전서구도 확인했다.

요청이 무색하게 호위 행렬의 방비가 취약했던 것까진 아키텐 백작령이 전력 손실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후작령까지 제대로 물자를 운송했다면, 이후엔 물품을 지키지 못해도 그건 후작가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위험한 행렬의 책임자가 크리스틴이라는 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내가 제때 맞추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패했을 경우, 그녀가 포로로 잡히거나 최악의 경우 전투 중 죽거나 다칠 수 있었다.

하다못해 그녀가 습격에 당황하거나 패닉에 빠져서 마차에서 뛰어나오거나 했다면, 그녀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겠지.

후작가에서 요청한 상행의 책임자로 동맹 가문의 약혼녀가 왔는데, 후작령에서 습격 받아 잘못되었다면....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내 설명을 들은 크리스틴은 심각한 얼굴로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딱 한 마디 말했다.

“전령이 후작저에 무사히 돌아와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녀의 상단을 호위하여 후작저에 복귀한 뒤, 나는 전령이 복귀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

후작저의 응접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시뻘게진 얼굴로 입가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마을 3곳의 조세권을 10년간 양도하라고?”

크리스틴은 그에게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래주신다면 미르보 백작가에서 라파예트 후작가에 부담해야 할 몸값과 배상금은 물론이고, 전선의 미르보 백작께 보내야 할 군비까지 제공해드리도록 하죠. 일시불로.”

나는 데미앙이 부들거리는 걸 모습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했다.

음, 역시 아키텐 가를 통해 들여온 물건이라 향이 좋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10년간의 조세권이면 못해도 그 몇 배는 될 거요!”

데미앙의 발악에, 크리스틴은 나를 따라 하듯이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대로 탕-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미르보 공. 미르보 백작께는 아직 이 소식이 닿지 않았을 거랍니다. 아직은, 말이죠.”

다분히 의도적으로 끊듯이 말한 크리스틴은 이내 더없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믿고 영지를 맡긴 공께서 기사와 군대를 전부 끌고 가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가, 포로로 잡혀 군비 조달은커녕 몸값을 내느라 전선에서 회군 해야 하는 사태가 된 것을 알게 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그건....”

크리스틴은 데미앙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명예로운 백작님께서 친족살해자라는 오명을 쓸 순 없으실 테니, 몸값이야 내주시겠죠. 하지만, 그로 인해 백작가가 사게 될 2왕자 전하의 진노와 그간 내전에서 소모한 모든 재화의 허비.... 저는 나중에 공께서 ‘불운한’ 일을 겪으셨다는 소식을 들을까 걱정된답니다. ...진심으로요.”

...정말로 걱정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네.

크리스틴은 이제는 아예 핏기가 싹 가셔서 말도 못 하고 있는 데미앙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저도 후계자가 아닌 몸으로서, 공의 입장은 잘 이해하고 있답니다. 조세권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건 어차피 공의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은 말이죠. 하지만 영주 대행으로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공께선 우선 백작께 군비를 보내어 시간을 버시고, 어떻게든 이 일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시겠죠.”

결국, 데미앙은 썩어 들어가는 얼굴로 대답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 고민해 보겠소.”

“물론이죠, 미르보 공. 하지만 명심하시길, 시간은 금이랍니다. 어차피 10년 뒤에는 돌려받으실 조세권이고, 공의 선택에 따라 그걸 돌려받는 분 또한 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데미앙은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시종 겸 감시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되었답니다, 소후작님. 미르보 공이 수락한다면 몸값과 배상금은 아키텐 백작가에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저 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크리스틴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원래, 저는 아키텐 백작가에서 부담하는 위험에 대해 우리가 받을 몸값과 배상금의 일부 분배를 약속했습니다만....”

크리스틴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 부분은 제가 전달받지 못했고, 이번 일에 엮여서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없던 일로 해드리죠.”

그걸 끝으로, 그녀는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탐색하는듯한 시선이 교환되고 꽤 긴 침묵이 흐른 뒤.

크리스틴은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소후작님. 약혼은 파기되겠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했던 말.

-전령이 후작저에 무사히 돌아와 있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전령은 분명하게 백작가에 내 밀서를 전달했다. 그 후에 전서구도 보냈으니까.

그러나 아키텐 백작가는 상단의 호위를 늘리긴커녕 적은 호위만을 보냈고, 심지어 크리스틴을 책임자로 삼아 보냈다.

“...백작가는 밀서를 받은 적이 없는 거고, 후작령에서 상단과 당신을 위험에 빠트린 책임을 명분으로 삼는 건가요?”

크리스틴은 내 반응을 보더니,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렇게 한 번에 알아들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긴가민가했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 전. 지금으로부터 몇 달쯤 뒤 크리스틴이 병사했다.

나는 그녀가 병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아키텐 가문과의 혼인 동맹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영민하고, 건강해 보인다.

도저히 갑작스럽게 요절해버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내가 꾸민 일은 자기네들 손을 대지 않고 그녀를 제거하거나, 아니어도 후작가와의 약혼을 파기할 명분이 되어준 거다.

“레이디, 나는 두 가문이 꽤나 이해관계가 맞다고 생각했는데요....”

라파예트 후작가는 일개 기사 출신에서 압도적인 무위를 떨치며 일어선 ‘청기사’의 가문.

아키텐 백작가는 도시 출신 상인들의 가문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뒤 몰락한 귀족에게서 작위를 사들여 탄생한 가문.

둘 모두 중앙 정계의 주류, 소위 순혈 고위 귀족들에게서 소외된 가문들이다.

무력의 라파예트, 금권의 아키텐. 서로가 서로를 상호보완해온 동맹 관계고, 그래서 나와 크리스틴의 약혼은 우리 둘 모두 한참 어릴 때 결정된 일이다.

“예전에는, 그랬죠. 우리는 상단을 많이 운용하고, 그만한 호위가 늘 따라붙어 움직여야 하는데다 기사가 부족하니 후작가와의 동맹은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답니다.”

크리스틴은 그리 말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우리는 내전이 터진 뒤 지난 3년간 동맹의 의무를 지켜 귀 가문에 대해 꾸준히 군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고 있지만, 후작가가 자랑하는 군대는 북부에서 내전에 참여하느라 여념이 없죠. 정작 영지와 우리는 뒷전이고요.”

과연. 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혈맹관계라는 것만으로 지나치게 낙관한 건가.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크리스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가와의 약혼이 파기될 수도 있을 거라곤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파기하기 위한 패 같은 걸로 쓰일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틴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감추지 못한 슬픔과 분노는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그녀를 무어라고 위로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유일한 후계자로서 자라온 내가 그녀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게다가 나도 꽤나 낙담하고 있었다.

3년간의 내전. 영주들은 그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영지를 약탈해대며 서로의 힘을 깎아댔고, 그러는 동안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군비가 부족한 영주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자치권을 사들이며 차근차근 독립적으로 변해왔다.

작금에 와서는 고위 귀족이라고 해도 도시에 함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결국 내전 막바지에 이르러 국력이 완전한 파탄에 이르고, 도저히 여력이 없던 왕족과 귀족들이 부유한 도시까지 넘보다가 혁명이 터진 거다. 당장 혁명의 핵심 인사들이 도시 출신 부유층이다.

혁명군의 총사령관이던 라파엘 발리앙의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귀족들과 달리 화약병기를 다루는 전쟁에 능통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사나 마법사 대신 화약병기에 의존하던 도시 출신 인사일 가능성이 높겠지.

도시 상인 출신에서 귀족이 된 아키텐 가문은 당연하게도 여러 도시들과 연이 깊고, 광범위한 교역망은 동시에 정보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들은 도시 세력과의 연결점이 되어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세운 계획에서, 아키텐 백작가는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상당히 더러운 기분이네요.”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내뱉은 귀족답지 못한 언사는 그대로 내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제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여자의 아이여도, 그 아이에게 좋은 누나가 되어주려고 했는데. 백작부인, 그 여자에게도 썩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답니다.”

거기까지 말한 크리스틴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정략혼에도 불만 없었어요. 백작위를 노릴 생각은 정말 추호도 없었고, 상단을 관리하고 아버지를 보좌해온 건 결혼 전까지 가문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해온 것뿐인데.”

그녀는 사별한 전 백작부인의 딸이고, 현 후계자는 후처의 아들이다. 당연히 나이 차이도 제법 난다.

소심하게 영지에 처박혀있던 시절의 나도 몇 번의 만남만으로 그녀가 유능하다고 느꼈을 정도고, 그녀에겐 가문의 상단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

소백작의 어머니와 추종자들이 그녀를 위협으로 간주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출발하기 전에, 그 아이에게 웃으면서 후작령에서 선물을 사다 주겠다고 하고 나왔다고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거라곤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없는데.”

거기까지 들은 순간, 나는 결심을 굳혔다.

무얼 위해 돌아왔나.

나는 원래라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

아키텐을 활용할 수 없다고? 그러면 아키텐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레이디 아키텐.”

나는 자괴감에 쌓여 있던 크리스틴의 시선을 받으며 제안을 꺼냈다.

“동맹을 맺죠.”

“...후작가와 백작가의 약혼 동맹은 파기될 텐데요?”

“그러니까, 새로 맺읍시다. 후작가와 백작가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힘이 되어주겠습니다.”

아주 잠깐의 시간 만에,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자괴감이 씻겨 내려갔다.

“약혼은 파기될 거고, 저는 가문의 후계자도 아닌데요. 소후작님이 필요로 하는 건 뭐죠?”

그녀는 아키텐의 백작위를 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저들은 그녀를 적으로 간주했다.

“아키텐 가의 영향력으로 저를 도와줄 여백작.”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의 눈에 순식간에 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그녀의 입가에 자리한 것은 그린 듯이 화사하여, 독을 품은 것 같은 미소였다.

“이런, 귀여운 동생에게 사다 주려던 선물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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