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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5화 (5/258)

내전기 - 데미앙 드 미르보 (2)

지정해둔 장소에는 이미 전령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르보 백작령에서 출진한 병력이 후작령으로 진입했습니다, 소후작님.”

“그래, 수고했군. 가스통 경, 병사들에게 휴식할 시간을 줘.”

“옛!”

우리는 후작령을 빠져나가 동부로 출진해서, 남부로 우회해 그대로 서부에 도착했다.

이런 정신없는 강행군을 했는데 헛수고였다면 꽤나 욕을 먹었을 텐데, 헛수고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나는 머릿속에서 듀몬트 남작에 대한 의심을 지웠다.

내전이 터진 뒤에야 영주 대리가 되었을 미르보의 차남이 남작과 내통 중일가능성은 낮지만, 회귀 전 사실상 남작이 책임지던 후작령이 약탈에 거의 무방비했던 것 때문에 가능성 정도는 있었으니까.

남작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저들이 완전히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인 걸 보니 정보원은 아마도 후작저에 있는 사용인 중 하나 정도겠지.

그 정도면 상관없다. 첩자라는 것이 무작정 색출해내려고 한다고 바로 찾아지지도 않고, 존재를 알고 내버려 두면 이런 식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다.

말을 몰아 언덕으로 오르자, 탁 트인 시야로 드넓게 펼쳐진 후작령 서부의 숲과 그 사이로 난 길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그 푸르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자, 가스통이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소후작님? 아키텐 백작가는 귀중한 동맹인데 자칫 큰 피해를 입거나 하면....”

정치적으로 같은 편일 뿐인 1왕자파와 달리, 아키텐 백작가는 라파예트 후작가의 유일한 동맹이자 귀중한 우방이다.

영지에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항구를 보유한 만큼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고 있고, 아직 약혼일 뿐이지만 정략혼으로 이루어진 동맹이니까.

아키텐 백작가는 내전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는 대신, 후작령의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물자를 지원해 왔다.

원래부터 그런 교류가 계속 이루어지던 곳이니, 의심을 덜 사면서 미르보의 차남을 끌어낼 미끼로서는 아주 적절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경. 저쪽에는 별도로 전달했으니까.”

혹시나 가문의 일원이 나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그야말로 날벼락이니, 별도의 인편으로 백작가에 상황을 설명하고 호위 병력을 조금 늘리되 중요 인사는 따라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해두었다.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일이 성공하면 우리가 얻을 소득을 나누어주기로 약속했고.

가스통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답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미래의 후작부인이 되실 분의 가문이니 신경이 쓰였습니다.”

가스통 치고 별 걸 다 신경 쓴다 싶었더니....

약혼녀라.

괜찮은 사람이었다.

귀족간의 혼인이라는 게 보통 그렇듯 서로 사랑을 느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함께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지.

꽤나 오래전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는 28세의 기억과 동시에 돌아온 내 머리에 아직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그녀의 모습이 공존하는 감각은 꽤나 생경하다.

“미래의 후작부인이라....”

작게 중얼거렸지만, 가스통은 나를 흘긋 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

내전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혼인은 계속 미뤄졌고, 그러다 그녀가 병으로 죽어버렸으니까.

이후로도 영지 간의 교역은 계속 이루어지긴 했지만, 혼인 동맹이 깨져버린 아키텐 백작가는 내전에서 중립을 지켰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소후작님.”

내 상념은 가스통의 부름으로 끊겼다.

“왔군.”

아키텐 백작가의 상단이 길을 따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절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면서까지 호위는 조금 단단히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상단을 지키는 병력은 운송하는 물건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니, 나에게 떠넘기고 오히려 몸을 사린 건가?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이동하지.”

“옛!”

-

“아키텐 백작가의 상단입니다, 공!”

“드디어.”

척후의 보고를 받은 미르보 백작의 차남, 데미앙 드 미르보는 반쯤 희열에 차서 입을 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지만 불안한 점도 있어서,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나온 참이다.

혹시나 상단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데 미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시작한다! 1번대 전진!”

잠시 후, 데미앙의 명을 받은 병력이 길을 따라 이동 중이던 상단의 행렬을 덮쳤다.

“미르보 백작 각하를 위하여!”

“와아아아!”

기사 휴이가 검을 빼든 채 앞장서 달려들고 그 뒤를 따라 1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숲을 뛰쳐나오자 상단의 행렬은 당황했다.

“어, 어엇...!”

“진영을 갖춰! 마차를 지켜라!”

그나마 대장의 명을 받은 아키텐의 병사들, 고작 30여 명이 대열을 갖추려 했으나-

“쏴라!”

하사관의 명을 받은 궁수들이 날린 화살비가 아키텐의 병사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아악!”

“컥...!”

일반 병사들의 빈약한 갑옷은 화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순식간에 여럿이 당했지만, 아키텐의 병사들은 그래도 화승총을 들어 올려 방아쇠를 당겼다.

불이 붙은 심지가 화약에 닿고, 그대로 격발하며 콩을 볶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헉!”

운 없는 미르보의 병사 몇이 그것에 맞고 쓰러졌으나-

“하찮구나!”

화승총의 탄알은 마력을 두른 채 몸을 보호하며 돌진하는 기사를 관통하지 못했다.

“창병, 앞으로!”

“흐압!”

“비켜라, 버러지들아!”

대장의 다급한 외침에 앞으로 나선 창병들의 창마저도, 그들에게 난입한 휴이 경의 검격 한 번에 잘려나가 버렸다.

“히, 히익!”

“흥, 천한 상인 출신 가문 아니랄까 봐, 도시 천것들의 무기나 쓰고 있군.”

창병의 뒤에서 화승총의 총구로 총알을 밀어 넣으며 장전하려고 애쓰던 자들이 기겁하는 광경을 보며, 데미앙은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길가의 반대편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고, 공! 라파예트 가문의 문장입니다!”

다급한 휴이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아키텐의 군사들을 덮치려고 한껏 달려들고 있던 군사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데미앙은 군사들의 비명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이놈이 감히 나를 우롱해!”

데미앙은 군대를 따라 출렁이는, 울부짖는 사자 문장의 깃발을 노려보더니 씹어뱉듯이 소리쳤다.

“2번대 앞으로!”

“옛!”

미르보의 군사들은 완전히 열세에 몰린 아키텐의 군사들을 밀어붙이다가 라파 예트의 군사들이 합세하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데미앙의 지시를 받아 추가로 100명이 달려들자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밀어!”

“와아아아!”

양측 병사들의 창이 서로를 향한 채 찌르고, 밀어붙이며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시발, 뒈져!”

“아파, 아파! 내 배가 찔렸어!”

비명과 욕설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기사 휴이는 상대 기사와 조금 떨어져 대치하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데미앙은 양측의 화살이 서로에게 쏟아지며 지속적인 손실을 입히는 광경을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일진일퇴처럼 보이지만, 병력은 이쪽이 조금 우세하다. 이대로 대치전을 이어 나가기만 해도 승리는 그의 것이다!

그 때, 전장의 소음과 고함 속에서 이쪽으로 접근 중인 말발굽 소리를 눈치챈 데미앙은 희열에 차서 소리쳤다.

“카젤 경, 3번대를 이끌고 서쪽의 적을 저지하라!”

“분부대로!”

마지막까지 아껴둔 예비대가 서쪽의 숲 사이로 창을 들이대며 진영을 갖추기가 무섭게, 숲에서 적의 기병들이 튀어나왔다가 창병들을 보고는 기겁하며 당황하는 꼴이 보였다.

“뭐, 뭐야!”

“쳐라!”

당황하는 기병들에게 카젤 경이 말을 탄 채 앞장서서 검을 들고 뛰어들고, 그 뒤를 기병들이 뒤따르자 적 기병들은 우왕좌왕하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데미앙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 물지 않을 수 없는 기회였으나 상황이 너무나 공교로웠기에, 봉신들에게 병사를 빌려 가며 가능한 모든 전력을 끌고 나왔다.

그 애송이 소후작은 자신을 단단히 얕잡아본 것이 틀림없다.

매복해 있다가 기병으로 약탈에 정신이 팔린 군대의 허를 찌른다. 정확히 그의 기사들에게 쓴 전술과 같지 않은가!

기병이 마음껏 달리기도 어려운 숲에서의 우회기습 따위, 예비대만 있다면 능히 막을 수 있다.

저 멍청한 소후작은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믿었으나, 실상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꼴이 아닌가!

그러나, 데미앙의 희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 공!”

하사관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데미앙은 방금 전 기병들이 등장한 반대편, 동쪽에서 길을 따라 맹렬히 질주해오는 일단의 기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라파예트 후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의 기사도.

“마, 막아! 당장 막아!”

데미앙은 다급하게 외쳐봤지만 3개의 부대를 모두 투입한 상황에 무작정 외쳐 봐야 혼란과 동요를 더해줄 뿐이었다.

“밀어붙여라!”

창으로 서로를 찔러대며 대치 중이던 본대에서 때맞춰 가스통이 고함과 함께 난입하고, 그의 뒤를 따라 라파예트 후작령의 병사들이 난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와중에도 어떻게든 측면을 방어해보려던 몸부림은 허사로 돌아갔다.

“아, 안 돼!”

그런다고 적의 기병들이 멈춰주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아키텐과 라파예트의 병력을 상대하고 있던 미르보의 군사들은 배후에서 뛰어든 기사와 기병들에게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젤, 카젤 경은 어디 있나! 당장 저들을 막으라고 해!”

“소, 송구합니다! 기병들을 추격하느라...!”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 찬 숲에서 달아나는 기병들을 추격하러 달려간 기사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머저리 같은...!”

데미앙이 격노하는 와중에도 배후에 돌격을 허용한 미르보의 군사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도망쳐!”

그 광경을 보던 데미앙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영주 대행의 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 데, 운 좋게 외아들로 태어난 것 외에는 내세울 것도 없는 놈 따위가!’

군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이상, 이 전투는 이미 졌다.

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깨달은 순간, 그는 이미 군마의 엉덩이를 박차며 내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소후작을 잡는 것만이 희망이다.

데미앙은 손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거머쥔 검을 소후작에게 향하며 소리쳤다.

“라파예트 소후작! 미르보 백작의 차남 데미앙 드 미르보가 결투를 신청한다!”

소후작은 그가 있는 쪽을 보더니 말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상대는 평민 따위에게 패배한 귀족의 수치다.

그의 기사가 패배했다고는 하나 비열한 수에 당했을 뿐이라고 했으니, 신중하게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데미앙은 마력으로 그의 몸과 말을 보호하며, 소후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온 마력을 검에 끌어 모은 듯한 소후작의 검격에 부딪히고, 그대로 낙마할뻔했다.

“으헉?”

간신히 균형을 잡았지만, 이내 다음 검격이 날아들었다.

“자, 잠깐!”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간신히 두 번을 더 막아낸 데미앙은 그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날아든 세 번째 검격에 그대로 낙마해버렸다.

말에서 떨어지고도 어안이 벙벙했던 데미앙은 목에 검이 들이대어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나온 말은 의문이었다.

“어떻게...?”

평민 따위에게 진 기사의 수치가.

이어지지 못한 말을 알아 듣기라도 했다는 듯, 소후작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착오가 좀 있었던 모양인데, 공.”

데미앙은 멍한 눈으로 소후작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흐아아압!”

“으아아악!”

뒤늦게 숲에서 돌아와 전열로 뛰어든 카젤 경이 가스통의 기합성과 함께 나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곤 할 말을 잃었다.

“저쪽이 대단한 거지, 내가 약한 건 아니라.”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흠, 흠.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라파예트 후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데 미앙 드 미르보 공. 준비해둔 몸값은 충분하신지?”

데미앙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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