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4화 (4/258)

내전기 - 데미앙 드 미르보 (1)

나는 후작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잔소리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소후작님! 제가 놀라 죽는 꼴을 보셔야겠습니까!”

내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배 나온 아저씨가 내 집무실에서 시끄럽게 떽떽거리고 있다....

“큰 문제없이 잘 돌아왔지 않습니까, 듀몬트 남작.”

“천운이지요, 천운! 대체 어느 소후작이 달랑 기사와 기병들만 데리고 가서 약탈군에 맞서냔 말입니다! 제가 후작 각하께 이걸 어찌 보고하라고요!”

글쎄, 그 아버지라면 아마 이제야 내가 좀 기사다운 짓을 했다고 만족스러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병사들을 다 데리고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마을은 쑥대밭이었을 겁니다. 필요한 조치였고, 실제로 승리하고 포로들도 잡아오지 않았습니까?”

“크흠, 그것은 대단한 성과십니다, 소후작님. 하지만 그래도 후작령의 가신으로서, 이런 무모한 행동에는 반대합니다.”

남작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를 보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후작께서 위험을 무릅쓰셨어도, 마을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면세조치까지 내려주셨으니, 결국 위험만 감수하고 몸값외엔 얻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면세조치는 지나쳤다고 생각하십니까?”

“관대한 결정이십니다. 영민들도 소후작님의 자비를 찬양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소후작님. 아무리 대단한 기사도 일일이 마을들을 지키러 뛰어다닐 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피해를 다 막아낼 수 없으니, 차라리 적의 영지를 약탈하는 쪽을 택하는 겁니다. 후작 각하께 보내야 하는 군비도 버거운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게 일반적이긴 하다.

어차피 영민들을 지키려고 해도, 그 넓은 영지를 전부 보호할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막는 것도 한도가 있다.

예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아버지의 명령과 남작의 조언에 따라 영민들을 보호하는 대신 적 영지를 약탈했었지.

“하지만 계속 그래선 영민들도 버틸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영민들이 세금을 낼 여력 자체가 없어질 테고, 우리가 약탈할 적의 영민들도 그렇게 되겠죠.

그래도 내전이 끝나지 않으면 군비는 쥐어짜 내야 하니, 남는 건 반란 외에 더 있겠습니까?”

실제로 도시의 부유한 평민들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혁명이 터졌을 때, 5년의 내전 동안 이어진 약탈과 착취에 절망해온 농민들은 열렬하게 호응하며 혁명군에 가담했다.

혁명의 불길은 긴 내전으로 이미 한계에 달한 왕국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렸고, 그렇게 왕족과 귀족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찬 공화국이 탄생했다.

무수한 귀족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며 대가를 치러야 했지.

...나조차.

“저도 다 계획이 있습니다, 남작. 말씀하신 대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민을 보호할 시간에 다른 영지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 영지를 건드린 미르보 백작령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큰 피해를 입었죠. 기사 둘의 몸값에, 병력도 수십. 한 번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후작령에서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남작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후작령보다는 다른 영지를 노리려고 하겠군요.”

어차피 대부분 영주들의 주력군은 북부에서 수도를 둘러싼 주전선에서 대치하며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

가뜩이나 후작령은 ‘청기사’의 영지니 상대적으로 다른 영지들보단 덜 노려진 것도 사실인데, 거기서 섣불리 건드렸다가 피 볼 수 있다는 선례까지 만들면 더욱 확실하지.

“바로 그겁니다. 어차피 2왕자파가 노릴만한 영지는 후작령 말고도 많으니까요. 우선 우리 영지의 안전을 어느 정도 확보해둔다면, 약탈을 나서든 다른 가문을 지원하든 운신의 여유가 생기겠죠.”

물론 약탈을 나설 생각은 없지만.

“흠,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소규모 약탈 한 번 막은 정도로 그런 성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언제까지 막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몇 번이고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시는 건 조금....”

“지당한 의견이군요.”

나도 남작에게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혁명이 터질 걸 빤히 알고 있는 이상, 해야 할 일이 많다.

약탈은 당연히 방비해야 하지만, 몇 번을 막아야 저들이 후작령을 노리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를 약탈만 기다리며 죽치고 앉아 있어서야 수지가 안 맞는다.

무엇보다 북부에 있는 아버지, 후작은 내가 만족할 만한 군비를 보내주지 않으면 영주 대리로서의 통치권을 회수해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후작에게 보낼 군비를 충당하기에, 백작령의 잡기사 둘의 몸값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대어를 좀 낚아보고 싶은데. 듀몬트 남작, 지금 미르보 백작령을 관리하는 자가 누굽니까?”

“백작의 차남입니다, 소후작님.”

미르보 백작의 차남이라.

아마 이름이... 데미앙 드 미르보였던가.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이름뿐이다.

분명 돌아오기 전에도 저놈이 후작령을 털었을 텐데 아는 게 이것밖에 없다니, 나도 참 한심했군.

그래도 최소한, 저 자가 백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다.

“다른 정보는 있습니까?”

“송구하나 별다른 정보는....”

듀몬트 남작은 살집 있는 얼굴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상한 건 아니다.

이웃 영지라고는 해도 백작 본인과 후계자면 모를까, 별 교류도 없는 가문의 차남까지 상세하게 알기란 어렵지.

“그래도 대충 예상은 해볼 수 있겠죠.”

백작과 후계자인 장남이 공을 세우기 위해 주전선에 있는데 백작부인이나 봉신이 아니라 차남이 영지를 관리하고 있다는 건, 최소한 차남은 백작이 아끼는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지.

거기다 라파예트 가문이 신흥 귀족이긴 하지만, 명색이 기사 출신의 후작가다. 당장 나의 아버지 후작은 ‘청기사’라 불리는 프랑지아 왕국 최강의 기사다.

그런 후작령의 군사력이 약할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은 데도, 미르보의 차남은 후작령에 약탈군을 보냈다.

실제로 후작령의 군대 대부분은 후작이 끌고 나가서, 후작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병력이 적게 남아있긴 하지만....

“어차피 내전에 참여 중인 영주들의 주력군은 주전선에 나가 있으니, 약탈할만한 영지는 많을 겁니다. 그런데 미르보의 차남은 굳이 다른 영주들은 후순위로 둔 후작령을 찔렀습니다.”

“흠, 그렇지요.”

“그렇다면 미르보의 차남은 만만해서 이미 약탈당했을 곳 대신 다른 영주들이 건드리지 않을 법한 곳을 공격할 만큼 적극적이고, 우리 영지 상황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타당하겠죠.”

남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흠, 말씀하신 대로거나, 아니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정보 없이 한 번 찔러봤을 정도의 멍청이가 ‘청기사’의 영지를 공격할만큼 무모한데다, 백작령의 봉신들이 후계자도 아닌 차남을 만류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고 의욕 없을 가능성은 낮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들은 남작은 꽤나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흠. 아무래도, 제가 그동안 소후작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남작은 제대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원래라면 이 시기의 나는 꽤나 소심해서, 이런 약탈에도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약탈당한 마을에 가서 뒤늦게 구제책을 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기 만족에 불과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하지 말자.

“아닙니다, 듀몬트 남작. 후작가에 대한 남작의 헌신을 늘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소후작님께서 제 노고를 알아주고 계셨다니, 영광입니다!”

남작은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말이 영주대행이지 남작에게 반쯤 다 떠넘기고 있었으니 할 말은 없긴한데, 그렇다고 겸양조차 하지 않는다니....

나는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름대로 준비도 했을 테고 백작에게 잘 보여서 후계자 자리라도 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백작에게 보낼 군비는커녕 기사들 몸값을 보내야 하는 처지니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겠죠. 그러니 끌어들여 보겠습니다.”

“하지만 소후작님, 저쪽도 한 번 당했는데 쉽게 경거망동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거야 뭐, 물지 않고는 못 참을 만큼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던져야겠죠. ...

동맹에게 도움을 좀 청해야겠습니다.”

추가징세나 약탈 없이 후작의 군비를 충당하려면, 역시 귀족을 벗겨 먹는 쪽이 제일 좋겠지.

-

미르보 백작령.

미르보 백작의 차남 데미앙 드 미르보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창 내전 중에 영주 대행을 맡은 차남이나 삼남들은 대부분 안전을 추구하여 만만한 영지들을 털며 보잘 것 없는 군비를 보냈지만, 그는 그 이상을 원했다.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후계자가 된 그의 형이 최전선에 서는 영광을 받고도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기대 이상의 군비를 제공한다면 백작은 크게 기뻐할 것이 뻔했고, 그는 비교적 약탈에서 자유로워 아직까지는 부유한 후작령을 노리고 시간과 공을 들여 후작령에 정보원을 심었다.

데미앙은 그를 통해 생각 외로 후작령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점과, 영주대행이란 소후작에 대한 소문도 알 수 있었다.

전쟁 영웅으로서 작위를 얻은 라파예트 후작은 매년 마다 영지 내, 또는 타영지에서 온 유망한 소년과 청년들을 불러 모아 대결을 시키고 참여자 중 상위 입상자에게는 영지의 기사로서 일할 기회를 주곤 했다.

신분을 막론하고 실력만 있으면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귀족과 평민의 대결이 성립되기란 지극히 어렵다.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상위 입상자들은 귀족이었는데, 라파예트 소후작은 후작이 연 그 대회에서 가스통이란 평민에게 패배했었다고 한다.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후작은 당연히 이를 큰 망신으로 여겼고, 함구령을 내 림은 물론 두 번 다시 대회를 열지 않았다고.

그런 한심한 인간이 후작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작령의 영주대행을 맡고 있다. 그 사실을 파악한 데미앙은 당연하게도 후작령에 대한 약탈을 망설이지 않았다.

우려를 표하는 봉신들을 알아낸 정보로 달래며, 처음이니만큼 위력정찰을 겸해서 외곽 마을을 가볍게 약탈하라고 명했는데....

“무능한 놈! 천것에게도 졌다는 소후작을 못 이겨서 몸값이나 내게 하다니!”

“송구합니다, 공.”

데미앙의 앞에 선 기사, 페터 드 카젤은 죽을 맛이었다.

기사 주제에 겁쟁이처럼 활이나 쓰는 소후작의 행동에 낚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데미앙이 사전에 준 정보 때문에 더욱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방심하다 그렇게 비열한 수법에 허무하게 당할 일도 없었을 터다.

물론 데미앙의 앞에서 그런 변명을 했다간 더욱 경을 칠 것이 뻔했으니, 카젤은 그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주군의 고성을 들어야 했다.

“빌어먹을....”

카젤에게 한동안 성을 내던 데미앙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소후작이 갑자기 기병들을 정찰대로 돌리며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외곽 마을만 털고 빠지는 약탈군을 기병만 데리고 나타나 기습한다는 짓을 예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소수의 병력에게 허무하게 당한 수하들의 무능함 탓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데 미앙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곳을 건드렸다가 몸값만 내고 병사를 잃은 꼴이 되었다.

심지어 몸값을 받아간 라파예트 소후작이 상단을 운영하는 이웃 영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가득 주문했다는 정보를 받자, 데미앙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은 백작에게 보낼 군비가 없다고 보고하면 힘겹게 얻은 신뢰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저 소후작은 자신의 무능한 부하들 탓에 횡재한 것이 아닌가.

당장에라도 저걸 습격해서 가로채고 싶은 마음이 동했지만, 소후작이 생각 외로 기민하게 약탈에 대응한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다.

그때,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데미앙은 익숙한 손길로 비둘기의 발에 묶인 종이를 빼서 펼쳐보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후작령의 동부 마을이 공격받았다고 합니다. 라파예트 소후작이 금일 아침 군대를 소집해서 동쪽으로 출진했습니다.]

데미앙은 눈을 흡떴다. 동쪽이라면 반대 방향이다.

지금 급하게 군대를 소집해서 치면 물자가 후작령의 수도로 들어가기 전에 습격해서 가로챌 수 있을 터고, 설사 소후작이 그걸 알아낸다 하더라도 동쪽에서 뒤늦게 회군해서는 제때 맞출 수 없다.

이건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동시에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다.

너무나 공교롭게도, 그가 가장 바라는 순간에 가장 바라는 상황이 생겼다.

데미앙은 잠시 주저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이번에 제대로 군비를 보내지 못하면 자신은 백작의 눈 밖에 난다.

그걸 만회할 기회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단순히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회를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후작령에서는 첩자를 색출하려는 듯한 기미조차 없었다. 정보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군대를 소집해라! 후작령으로 향하는 물자를 가로챈다!”

“예? 하, 하오나, 공.”

데미앙은 눈치도 없이 주저하는 그의 기사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게 얼마나 천금같은 기회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 같으니!

이미 한 번 일을 그르친 그의 무능한 부하들만 믿고 맡길 수가 없다.

게다가 이미 실패한 자들만 보내겠다고 하면 봉신들도 꺼려 할 테니, 여기선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결국 데미앙은 벌떡 일어섰다.

“이견은 받지 않는다! 따르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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