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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3화 (3/258)

내전기 - 라파예트 후작령 (2)

푸르른 숲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마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며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마을은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니, 그래야 했을 터다.

갑작스럽게 기사들이 이끄는 병사 백여 명이 나타나자,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마을에도 나름대로 자경단원들이 있었지만, 초라한 창 몇 자루 정도 가진 자경단원들은 위압적인 군마에 탄 기사와 몇 배는 되는 병사들을 보자마자 전의를 잃고 제대로 항전하지도 못했다.

“도망쳐! 도망쳐!”

“사, 살려주십시오!”

다급하게 가족을 피신시키려는 이들과 미처 도망가지 못한 채 자비를 갈구하는 이들이 엉켜 혼란에 빠진 마을로, 병사들이 야만적인 고함을 내지르며 뛰어들었다.

“고귀하신 미르보 백작 각하의 명이시다! 곡식과 돈을 징발하겠다!”

“숨기다가 들킨 놈들은 가족을 모조리 죽여주마!”

난장판이 된 마을에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촌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기사에게로 다가가며 굽신거렸다.

“나으리, 자비를,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 어억!”

그러나 촌장은 기사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병사의 발로 채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천것이 어딜 감히!”

“억, 어억!”

병력을 인솔해온 두 기사들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노인이 병사들에게 밟히는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운이 좋구려, 카젤 경. 이 마을은 아직 손댄 자들이 없는 것 같으니.”

“하하하, 백작 각하도 기뻐하시겠구려, 휴이 경.”

소위 명예로운 기사의 나라라는 프랑지아 왕국의 기사들은 약탈의 결실을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제물을 바치고 약탈을 피하려고 했던 촌장에겐 애석하게도, 이들은 애초부터 자비를 베풀거나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섬기는 미르보 백작은 2왕자파고, 이 마을은 1왕자파인 라파예트 후작의 영지에 속해 있다.

그러니 마을 주민들이 몇이 죽든, 얼마나 곤궁한 처지에 처하든 이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적 영주의 영지는 황폐해질수록 좋다.

비명으로 가득한 마을의 비극은 이들에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일상과 같은 광경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도시나 성은 방비도 단단하고 상대도 지키려고 하지만, 영지의 이런 작은 마을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는 어렵다.

긴 내전으로 자금이 부족해진 왕족과 귀족들은 자연히 이런 작은 마을들까지 지키려고 번거로운 수고를 들이느니, 상대의 마을을 약탈해서 벌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1왕자파는 2왕자파의 영지를, 2왕자파는 1왕자파의 영지를 서로 약탈해대며 왕국 전역에서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거다.

그렇게 느긋하게 약탈당하는 마을을 감상하고 있던 기사들은 숲에 몰래 숨어서 이쪽을 지켜보는 병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저 무도한 자들이....”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분개하고 있는 가스통을 진정시켰다.

완전히 제때 맞추지는 못했다.

그래도 기병들만 소집해서 바로 달려온 거니, 이게 최대한이었겠지.

양측 모두 기사는 둘이지만 적은 100명가량, 우리는 기병이라지만 고작 10명뿐.

나는 굉장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기병들을 흘긋 보고는 가스통에게 지시했다.

“가스통. 내 신호에 맞춰서 기병들을 이끌고 적 병력을 쳐라.”

“병력입니까?”

“그래, 병력. 약탈하느라 경계고 뭐고 없는 놈들이다. 경이 앞장서서 돌진하면 단번에 분쇄할 수 있겠지.”

“하지만 기사가 둘 있습니다만....”

“그건 내가 맡는다.”

가스통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뭐라고 항변하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기병만 데려오느라 우리 병력이 훨씬 적다. 이 상황에 저들만 돌격하라고 하면 하겠나?”

“...알겠습니다, 소후작님.”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가스통이 물러나 기병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본 후, 나는 등에 매고 있던 활을 꺼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검에 한 번 마력을 주입하면 유지만 하면 되지만, 화살에 마력을 주입하는 건 날릴 때마다 주입해야 한다.

기사라면 전투 중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이 보통이니, 대부분의 기사는 활 따위는 사병이나 쓰는 무기라고 생각한다만....

어떤 기사도 전투 중도 아닌데 마나를 허비하며 자신을 보호하진 않지.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로 팔이 뻐근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화살에 마력을 주입하고.

자신들이 기습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약탈당하는 마을을 감상 중인 기사 중 한 놈에게 겨누었다.

흘긋 곁눈질로 보자, 가스통과 기병들이 숲에서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 채 나를 보고 있다.

이내 마력을 담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 들어서-

기사의 갑옷을 꿰뚫고 등에 깊숙이 박히는 것이 보였다.

옆의 기사가 화들짝 놀라고, 화살이 박힌 기사가 화살 맞은 사냥감처럼 퍼득이다 이내 낙마하는 모습은 자못 우습게 보였다.

“쳐.”

“돌격 개시!”

“와아아아아!”

가스통이 앞장서 내달리고, 그 뒤로 기병들이 말을 몰아 숲을 뛰쳐나갔다.

나는 빠르게 시위에 새 화살을 걸었다.

“빌어먹을, 습격이다!”

“이런, 젠장! 집결해, 집결! 당장!”

난데없는 기습에 다들 우왕좌왕하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수습하려는 병사가 보였다.

저 자가 하사관이겠군?

“물러서지 마, 병신들아! 대열 갖춰! 창을- 컥!”

어떻게든 대응해보려던 하사관마저 가슴팍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승패는 결정되었다.

저 멀리서 운 없이 가장 앞에 있던 병사가 돌진해온 군마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고, 그 뒤에서 당황하며 창이라도 내질러보려던 병사는 그대로 가스통의 검에 창 채로 두 동강 나는 광경.

나도 말을 몰아 숲에서 뛰쳐나왔다.

동료 기사는 낙마하고, 난데없이 숲에서 기병대가 튀어나와 병력을 덮치는 꼴을 본 적 기사는 우왕좌왕하다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 가슴팍에는 자랑스럽게 라파예트 후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왕국 최강이라는 ‘청기사’ 라파예트 후작은 특유의 푸른 갑옷으로 유명하고, 활 따위를 쓸 리가 없으니 내가 소후작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겠지.

대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기사와 기병들의 돌격을 당한 적병들은 이미 혼란에 빠졌다.

고작 작은 마을 하나 약탈하는 임무에서 동료 기사와 휘하 병력을 잃고 몸만 돌아갔다간, 저 기사의 주군이 경을 칠 테니....

역시나 기사는 검을 빼들고 내 쪽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고, 나는 시위에 다시 화살을 걸었다.

절로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이미 혼란에 빠진 병력들을 헤집고 있는 기사와 기병들에게 돌격하기는 부담되지만, 겁쟁이처럼 혼자 떨어져 있는 소후작만 잡아내면 병력쯤 잃고 돌아가도 충분한 공이 된다고 생각하겠지.

기사란 용맹하게 돌격하여 적을 베어 넘기며 무명을 떨치려 하는 족속이고, 효율적이지도 못하고 비겁한 활 따위를 쓴다는 건 곧 자신의 용맹에 자신이 없다는 것.

그게 일반적인 인식이니까.

나는 화살을 뽑아 시위에 걸고, 그대로 다시 날려 보냈다.

“하!”

썩어도 기사라고, 상대는 마력을 주입한 화살을 단번에 검으로 갈라버리고 맹렬히 돌진해왔다.

“나는 고귀한 미라보 백작 각하의 기사 페터 드 카젤이다!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한다!”

오, 무서워라.

내가 바로 말머리를 돌려 반대편으로 말을 몰자, 상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온다.

“기사가 등을 돌려 도망친다니, 수치를 알라!”

아주 신났군....

“하! 이랴! 하!”

일부러 적당 적당하게 말을 몰고 있으니, 카젤이라는 기사는 맹렬하게 말을 몰며 금새 따라붙었다.

조금, 조금 더.

“죽어라, 소후작!”

거의 따라붙은 기사가 높이 쳐든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이 보이자마자, 나는 허리춤에 메어둔 단도를 뽑아들어 그대로 내던졌다.

“히히힝-!”

“어억!”

다리에 단도가 박힌 말이 발버둥 치며 넘어지고, 낙마한 기사는 바닥을 한참 굴렀다.

이런 후방에 있는 기사 수준 뻔하지. 공격을 위해 마력을 집중시켰으면서 말까지 보호하는 건 무리다.

말을 멈춰 세우고 뛰어내려, 고통에 몸을 꿈틀거리다가 뒤늦게 자신의 검을 잡으려고 바닥을 기어가는 기사의 목덜미에 내 검을 가져다 대었다.

기사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 보더니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며, 명예로운 결투에서 이게 무슨 비열한 짓이오!”

나는 정말 모르겠는데.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비틀린다.

“내가 결투를 수락했던가?”

기사의 얼굴은 이내 울컥하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빌어먹을!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면 내가 이겼소! 비열한 수법으로 이겨놓고,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아, 시끄러워라.

귀찮아져서 힐트로 머리를 내리찍자, 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었다.

“약탈이나 하던 놈이 기사의 명예는 얼어 죽을.”

정신을 잃은 카젤인지 코젤인지 하는 기사를 말에 얹어놓고 마을로 향하자, 전투는 거의 끝물이었다.

“흐아아압!”

“으, 으아아악!”

고함소리와 함께 가스통이 대검을 휘두르자, 병사들이 공중에 떠서 허우적대며 날아가는 광경이 보였다.

“하, 항복, 항복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그걸 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적 병사들이 무기를 떨어트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가스통 경, 피해는?”

“한 명이 경상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소후작님.”

나는 가스통의 보고에 피식 웃었다.

이거, 뭐....

저들은 거의 100명가량, 우리 측은 10명.

아무리 약탈 중에 기병에게 기습당한 거라지만, 화려하게 해치우셨군.

“수고했어, 가스통 경.”

가스통은 나에게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앞장서서 적병들을 박살 냈을 텐데, 크게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소후작님께서도 훌륭하십니다.”

가스통은 처음에 화살에 맞아 낙마한 뒤 그대로 포박당한 기사와, 내가 말에 얹어 온....

아마 코젤이었나?

아무튼 가스통은 기절한 두 기사를 보더니,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에만 해도 반신반의했을 테니, 이걸로 약간의 신뢰는 얻었을까.

“잘 챙겨서 돌아가지. 몸값 받아내야 하니.”

“옛!”

내가 마을 안으로 발을 들이자, 마을 주민들과 적들의 시신이 가득한 광경이 여과 없이 보였다.

나름대로 기사와 기병들만 이끌고 최대한 빨리 달려온 거지만, 그래도 피해는 결코 적지 않다.

그 참상에 혀를 차고 있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집 안에 숨어서 떨던, 또는 도망쳐 있다가 돌아온 주민들이 내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소후작이다. 그대가 촌장인가?”

가장 앞에 나와 엎드린 남자에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후작님. 촌장의 아들입니다. 송구하나 촌장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이 미천한 자들이 구원해 주신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나에게 굽신대는 남자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슬픔과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약탈했던 적 영지의 주민들도 이런 얼굴이었겠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대, 이름은?”

“존 밀러입니다, 소후작님.”

“그래, 밀러. 지금부터 그대가 촌장이다. 이 마을은 겨울까지 면세다. 조사관을 파견할 테니, 그쪽에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 적어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만큼은 도와주도록 하지.”

졸지에 촌장이 된 촌장 아들 밀러는 물론이고, 모여 있던 주민들 모두 놀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몇 년째 내전 중인 이 망할 왕국에선 작은 마을 하나쯤 약탈당하든 말든 신경안 쓰고 쥐어 짜내는 일이 보통이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후작님!”

“자비로운 소후작님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나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되도록 자비로워 보이도록 웃어주었다.

예전 같았다면, 더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어렸을 지라도, 좌절과 슬픔도 그대로 남아있음을 안다.

영주 대행으로서 베푸는 이런 자비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마을 하나를 보호하는 동안 왕국에서는 마을 10개가 불타오르고 있을 테니, 그런 것만으로 뭔가를 바꿀 순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가스통이 챙기고 있는 기사와 포로들을 바라보았다.

미르보 백작령이라고 했지.

백작 본인은 북부 주 전선에서 2왕자파로서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보나 마나 백작이 군비를 쥐어짜 내라고 해서, 그걸 충당할 겸 왔을 거다.

그런데 소득은커녕 기사고 병력이고 다 박살이 나서 몸값이나 낼 처지니, 지금 백작령을 관리하는 게 누군지는 몰라도 똥줄이 타겠지.

“그럼, 한 번 낚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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