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화 (2/258)

내전기 - 라파에트 후작령 (1)

“아아아악!”

단두대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섬뜩한 소리가 환청처럼 귓속에서 울린다.

“헉, 허억, 허어억....”

원래라면 목에서 느껴지면 안 될, 바람이 통하는 듯한 감각이-

정신없이 떨리는 손을 목에 가져다 댔다.

...제대로 붙어있다.

마지막에 내 눈으로 본, 단두대에 걸린 몸이 뇌리에 남아 있다.

내, 몸.

목을 잃은 내 몸이-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여긴 어디?

내 방.

내 방?

그 불결하고 끔찍하던 지하감옥이 아니다.

이곳은 분명히, 후작저에 있던 내 방이다.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걸어가자, 방 한 쪽의 거울에 멀쩡하게 목이 붙은 내가 비추어졌다.

“뭐야, 이건.”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이제 겨우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였다.

-

하녀가 나를 깨우러 왔다가 이미 일어나 있는 나를 보고 놀라며 세숫물을 가져다주었다.

감옥의 차가운 한기와 곰팡이의 악취를 맡으며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방에서 깨끗한 세숫물로 얼굴을 씻었다.

이건 꿈인가?

전장을 전전하며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싸우다가 지하감옥에 갇힌 나의 기억과, 언제나 하녀가 환복을 도와주던 소년 시절의 내 기억이 혼재되어 있는 것은 기묘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다.

목이 잘린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 같은 건가?

벌써 10년도 더 전에 저택에서 지냈던 일상을 반복한다.

그저 멍하니 씻고, 옷을 입고,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에는 전장과 감옥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잘 익힌 닭고기와 야채, 따스한 수프와 부드럽고 흰 빵.

마지막으로 먹었던, 평민들이나 먹던 딱딱한 빵의 맛이 기억났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실감이 나지 않아 선뜻 먹지 못하고 있자, 집사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소후작님?”

소후작, 그래. 이렇게 불렸었지.

“혹여, 불편하신 점이라도....”

그렇게 물어온 집사는 내 심기가 불편해서 식사에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것인지,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그리고 그제야, 내 식사를 시중들기 위해 벽 한 귀퉁이에 서 있던 하녀가 눈에 띄었다.

내게 마지막으로 빵을 가져다준 여자와 닮은, 어린 소녀.

10년 쯤 전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겠지.

“네 이름이 뭐지?”

“제...제시입니다. 소후작님.”

소녀는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답해왔다.

-고귀하신 후작 각하. 그대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보호하고 지켰다는 영지민중 그대가 알고 있는 이름이 있기는 하시오?”

단두대를 둘러싼 군중들의 비웃음과 야유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제시. 예전이었다면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이름을 확실하게 새겼다.

그리고는 하얀 빵을 집어 들었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생경하다고 느끼며, 천천히 수프에 적셔서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맛이 입안에 천천히 퍼져 나간다.

그제야,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 소후작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돌아왔어.”

-

기사들의 나라, 프랑지아 왕국은 혼란에 휩싸여 있다.

일반적으로 왕국의 후계자는 장자가 되어야 하지만, 용맹하고 불같은 성미로 기사왕이라 불리던 선왕은 지극히 귀족적이고 정치적인 1왕자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반면 2왕자는 본인부터가 무용이 뛰어난 기사고,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직접 공을 세우며 선왕의 총애를 얻었다.

자연스럽게 선왕은 2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의 적성을 살린 1왕자는 호전적인 국왕을 싫어하는 귀족들의 힘을 빌려 선왕과 2왕자를 견제해왔다.

그렇게 귀족파 위주의 1왕자 파벌과 근왕파 위주의 2왕자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며 후계구도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재수 없게도 선왕이 급사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1왕자와 2왕자는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벌 간의 대립은 이내 내전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시작한 내전은 무려 3년간 이어지며 프랑지아 왕국 전역을 불태우고 있다.

-

“끄으응,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소후작님?”

내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배 나온 아저씨, 로베르 드 듀몬트 남작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리며 물어왔다.

살찐 사람에게 여름은 힘들지....

“뭐가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후작령에는 남은 병력이 얼마 없는데, 귀중한 기병을 밖으로 돌린다는 것이....”

나의 아버지, 위베르 드 라파예트 후작은 1왕자파의 핵심으로서 왕국 수도 뤼미에르 근교에서 군대를 통솔하며 내전을 진행 중이다.

프랑지아 왕국 최강의 기사로서 ‘청기사’라는 칭호씩이나 받은 후작이 왜 기사들의 지지를 받는 2왕자가 아니라 귀족적이고 정치적인 1왕자에게 붙었냐면.

내 아버지가 처음 기사가 될 때만 해도, 우리는 후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개 기사의 신분으로 압도적인 무용을 보이며 활약한 끝에 ‘청기사’의 칭호와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신흥 고위 귀족은 당연히 기존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고, 라파예트 후작가는 사실상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가문이었다.

내전이 발발한 뒤 대부분의 기사와 군벌 인사들이 2왕자를 따르자, 절박해진 1왕자가 여러 이권을 약속하며 후작가를 포섭한 거다.

그래서 후작이 북부에서 후작령의 주력군을 데리고 1왕자를 도와 내전을 치르는 동안, 나는 주전장인 북부에서 꽤 거리가 있는 남쪽의 후작령을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후작이 대부분의 기사들과 중무장한 기병들을 데려가고 영지에 남은 경기병들에게 영지 경계의 정찰을 명해 놨다.

“어차피 영지에 남아 있는 기병들은 경기병 수준입니다. 게다가 영지 중앙에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는 우리가 바로 공격받을 정도면, 당연히 정찰을 돌고 있는 기병들이 먼저 발견하겠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남작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면서도 조금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이 시기의 나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기사들의 나라인 프랑지아 왕국에서 내전 중에 후계자인 내가 영지를 맡고 있다는 건 내가 신뢰받고 있어서라기보다는, 후작이 보기에 내가 함께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우게 해줄 정도로 미덥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후작이 영지군을 데리고 내전에 참여 중인 동안 나를 보좌하여 영지의 행정을 도맡아온 남작의 입장에선,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진 것 같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소후작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리라 믿겠습니다.”

불신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해봐야....

“예, 남작이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크흠. 실망이라니요. 하면,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소후작님.”

나는 남작을 내보내고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28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기억을 가지고, 18세로 깨어난 뒤 한 달가량이 지났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내가 끔찍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완전히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소한 만남이나 사건들이 그대로 일어남은 물론, 내전의 주전장인 북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마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연일 리가 없다.

나는 아마도, 혁명군에 죽임당하고 과거로 돌아온 거겠지.

이유도, 원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단두대 앞에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았던 원통함과,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바랐던 간절함만은 지금도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운명을 거머쥐어야 한다.

다시 눈을 떠, 북부에서 온 후작의 명령서를 보았다.

북부에서 후작령의 주력군을 이끌고 있는 후작은 당연하게도, 계속해서 막대한 군비의 조달을 요구하고 있다.

예전의 나는 그러지 않아도 시도 때도 없는 약탈로 피폐해진 영지에서 전쟁세를 걷을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후작은 전쟁세를 걷든, 아니면 인근 2왕자파의 영지를 약탈해서든 군비를 보내라고 명령했었다.

하지만 나는 빤히 혁명이 터질 것을 알고 있다. 1왕자가 어떻게 죽는지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그런 방법을 쓸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그걸 후작이 납득해줄 리는 없지.

1왕자가 왕이 되기만 한다면 그 모든 헌신에 보답받을 것이라 믿는 후작은 이 내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헌신은 보답받지 못했고 아버지, 후작은 허망하게 죽었다.

뒤를 이어 후작이 된 나는 지난 생에서 혁명군에 맞서 싸웠으나 대륙 최강의 기사들이라는 프랑지아 왕국의 귀족들은 혁명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혁명군에 누구도 감히 상상해보지 못한 불세출의 천재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파엘 발리앙.

그 장군은 마력을 다루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에 밀려 거의 사용되지 않던 화약병기를 적극 활용하여,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천재적인 전술로 왕국군에게 연전연패를 안겨주었다.

나는 운 좋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라파엘 발리앙, 그 자에 맞서 승리해 혁명 그 자체를 분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긴 내전 기간을 거치면서 도시들이 왕과 귀족에게 자치권을 사들여놓은 탓에, 도시의 유력자들인 혁명군의 주요 인사들에게 미리 손대는 것도 어렵다.

아니, 그 이전에. 이 썩을 대로 썩은 왕국은 어차피 혁명이 아니라도 더 처절하게 무너질 게 뻔하다.

-죽여라!

-부패한 귀족에게 죽음을!

그럼에도 눈을 감으면, 이따끔 도시를 가득 메운 군중들의 광기와 조소가 가득 찬 환청이 들려온다.

나는 혁명이 프랑지아에 어떤 광기와 폭주를 낳았는지 보았다. 왕국이 전복되고 일어선 공화국에서,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의 숫자는 내전에서 죽어 나간 이들에 밀리지 않는다.

혁명은 내전 5년차, 즉 2년 뒤에 일어난다.

그러니 나는 후작의 명령대로 군비를 조달하긴 하되, 이 2년간 영민들을 과도 하게 착취하거나, 약탈로 악명을 떨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패하지 않은 귀족이자 평민들의 우방으로서 혁명군과 손잡을 수 있다. 저들의 내부에서 혁명군의 급진파가 아닌 온건파가 정권을 잡게 해야 한다.

그래야 폭주한 혁명군의 광기가 내 사람들과 프랑지아를 피로 물들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번 삶에서는 나와 내가 지켜온 모든 것이 그토록 무가치하게 부정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후작님.”

“들어오게, 경.”

문이 열리고, 갑옷 차림의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와서 예를 갖추었다.

나이는 나와 같을 텐데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크단 말이지.

“기사, 란 가스통이 피에르 드 라파예트 소후작을 뵙습니다.”

후작이 기사란 기사는 싹 긁어간 상황에, 나를 제외하면 이 사람이 후작령에 남은 유일한 기사다.

동시에, 나로서는 굉장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남자다.

후작이 나를 불신하게 만든 장본인이지만, 그럼에도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왕국군의 패배가 명백해져 가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나에게 충성을 바쳤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복잡한 심경을 떨쳐내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소후작님의 명으로 정찰에 나갔던 기병의 보고입니다. 미르보 백작령 방면에서 기사가 포함된 100여명의 군세가 후작령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약탈이군.”

“예. 그런 걸로 보입니다.”

느긋하게 생각에 잠겨있을 시간도 없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기병들 소집하게. 바로 나가지.”

“기병들만, 입니까?”

“그래.”

가스통 경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정찰이 적을 발견하고 돌아와서 이제 막 보고한 참인데 여기서 영지군을 다 소집하고 발로 뛰어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마을은 쑥대밭일 거다.

혁명군의 온건파가 급진파에게 밀리는 일을 막으려면, 최소한 그들을 후원할 힘이 있을 정도의 세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영지가 털리게 놔둘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흉갑을 입고 있자, 가스통 경은 무뚝뚝한 얼굴에 놀란 기색을 띄웠다.

“소후작님께서도 나가십니까?”

“그래.”

나는 간단하게 답하며 내 검과 활을 챙겨 들었다.

당장 후작이 다 긁어가서 군대가 없는데 어쩌겠어?

별수 없이 몸으로 굴러야지.

“주제도 모르고 후작령의 영민을 털러 온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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