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
글 카르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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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지하감옥.
곰팡이로 가득 덮인 벽에서 나는 악취는 코를 찌르고, 돌벽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냉기를 그대로 몸에 찔러 넣었다.
족쇄가 채워진 발목은 이제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지독한 갈증과 굶주림이 나를 괴롭혔다.
끼이익-
그때 복도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어깨를 억지로라도 편 건 분명 용기라기보다, 오기겠지.
빌어먹을,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쇠창살 너머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울려 퍼지며,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저절로 마른침을 삼켰지만, 마침내 내가 수감된 방의 앞에 도착한 사람은 내 예상과 달리 간수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려놓은 바구니에는 빵이 들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손이 나가는 게 빨랐다.
예전 같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평민들이나 먹는 딱딱한 빵.
얼마 만에 먹어보는지도 모를 빵을 허겁지겁 입에 넣는다.
“컥, 콜록.”
체면 따위는 던져버린 채 허겁지겁 빵을 먹다가 목이 메여서 콜록거리자, 창살 너머로 물병이 건네졌다.
그것을 급히 받아들어 목을 축이고서야,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익숙한 얼굴의 여자다.
누구였더라?
잠시 고민했지만, 떠올릴 수 없었다.
“고, 고맙다. 그런데 너는 누구지?”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예전에, 후작저에서 사용인으로 일했습니다.”
“그래. 혹시나 내가 여기서 나간다면 꼭 보답하지.”
여자는 내 말에 얼굴을 흐렸다.
그 얼굴에 서린 것은 동정심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무례하다고 여겼을 터인데.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져서, 나는 남은 빵과 물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화들짝 놀란 여자는 나에게 가볍게 목례해보인 후 물러났다.
“자, 잠깐만-”
내 말은 그녀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녀 대신 수도 없이 본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간수가 나타나서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최후의 만찬은 충분히 즐기셨나, 후작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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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푸른 피를 죽여라!”
썩은 계란이 날아와 가슴팍에서 터져 사방으로 튀었다.
그 불쾌감과 악취보다, 도시를 가득 채운 군중들의 번들거리는 악의가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한때 프랑지아 왕국의 수도였던 대도시, 뤼미에르에는 자칭 혁명군의 깃발들만이 펄럭인다.
자유, 평등, 박애.
날이면 날마다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섬뜩한 소리가 가득한 도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호가 새겨진 푯말들이, 광기에 휩싸인 군중들의 손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컥!”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흔들렸다.
이마를 타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감촉과, 저절로 바닥으로 떨어진 시야에 들어온 큼지막한 물체를 보고서야 내가 돌에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어떻게 끌려왔는지는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야외 재판정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하와 같은 죄목으로 공화국 국민들을 대변하는 저, 원고 막시밀리앙 이 지도르는 피고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청구합니다.”
원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판정을 둘러싼 군중, 아니 폭도들이 광란에 차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죽여라!”
“사형!”
“부패한 귀족에게 죽음을!”
저절로 시선이 재판정의 바로 옆에 있는 단두대로 가닿았다.
이런 형식뿐인 재판에 무슨 의미가 있지?
“피고, 피에르 드 라파예트.”
부름에 고개를 들자, 판사는 오만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변론할 기회를 주겠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질 건 없지만, 예의상 한 번 기회는 주겠다는 뉘앙스의 말.
아무 의미도 없겠지.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울분이 차올랐다.
왕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내전을 벌여 무수한 피를 흘렸고, 귀족들은 그 내전을 수년간 이어가기 위해 평민들의 고혈을 쥐어짜 냈다.
그걸 견디다 못해 혁명이 터졌고, 작금의 사태에 이른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벌이고 있는 재판은 결코 정당하지도 않고, 공정성 따위는 없다.
별다른 죄목이 없던 이들이나, 심지어 평민들에게도 칭송받던 이도 치욕스러운 누명을 씌워가며 죽이지 않았던가.
나는 이렇게 취급 받으며 개죽음 당할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나는 라파예트 후작으로서 나의 영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왕국의 장군으로서 조국을 위해 충성을 바쳤을 뿐이오. 이런 식으로-”
“하. 영민을 보호라.”
내 말을 불쾌하게 자른 원고, 이지도르의 무례한 언사에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후작은 내전 중 직접 부대를 이끌고 도시를 약탈했고, 증거도 있소. 그것도 무려 3번이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선대 후작, 아버지의 명령으로 내가 한 일.
“그것은 내전을 일으킨 반역자 2왕자파의 영지에 대한 군사행동일 뿐-”
“오, 그래서 내전 중이니 자국민을 공격한 것도 무죄라 이거요? 말해보시오, 후작. 그 영지의 영지민들이 직접 2왕자를 지지하고 그를 위해 무기를 들었소?”
그 영지민들의 세금은 군비가 되고, 그들은 영주의 군대가 되어 우리에게 맞선다.
그러니 적의 영지를 공격하는 것은 적들에 대한 군사 활동이자, 선대 후작이 요구하는 군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내키지는 않더라도, 내전 중에는 필요한 일이었다.
최소한 내전으로 피폐해진 후작령의 영민들에게 추가징세를 거두어, 그들의 삶에 더한 짐을 지우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최소한 나는 내전 중에도 영지에 대한 추가 징세를 자제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했소! 평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했을 뿐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그저 귀족을 부정하기 위한 일방적인 억지에 불과하오.”
최소한 나는 아버지, 선대 후작과 달랐다.
어떻게든 영민들을 쥐어짜 내어 내전에서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귀족들을 경멸했던 만큼, 그들과 다른 영주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나의 자부심이었고, 죽을 때 죽더라도 이런 모욕적인 누명을 쓰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모든 노력을 부정당하고, 그저 혁명군에게 정당하게 처단된 ‘부패하고 타락한 귀족’ 중 하나로 남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아, 그렇소이까. 그러면 묻겠소, 후작. 그대의 영지민 중 그대에게 보호받고, 그대의 ‘관대한’통치에 감사를 표하며 그대를 변호해줄 자가 있소?”
이지도르의 말에 군중들이 일제히 비웃음과 야유를 터트렸다.
애초에 제대로 된 재판을 진행할 생각조차 없으면서!
분노에 차서 일갈하려던 나는 이지도르의 바로 다음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있다면 이름이라도 말해보시오. 혹시나 이 중에 그가 있다가 기적처럼 나와서 그대를 변호해줄 수도 있지 않겠소?”
...모른다.
내 영지민들의 이름 따위, 알 리가 없다.
이지도르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없겠지, 고귀하신 후작 각하. 그대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보호하고 지켰다는 영지민 중 그대가 알고 있는 이름이 있기는 하시오?”
하다못해 나에게 빵과 물을 가져다준, 후작저에서 일했다는 여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만나본 적조차 없는 귀족의 명부도 외우는 그대들 귀족이란 족속이 아닌가?
이름 따위도 알 가치 없는 하찮은 자들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그대가 그토록 애지중지한 자들 중 당연히 이름 정도는 아는 자가 있었겠지. 후작, 그러니 그대들 귀족이 푸른 피라는 거요.”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다.
다른 귀족과는 다를 터였다.
그들을 경멸해왔다.
나만은, 그들과는 다른 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쳐왔는데!
그러나 내 믿음도, 모든 노력도 군중들의 비웃음과 야유 속에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씻겨 내려갔다.
“이 위선적인 귀족을 보시오! 소위 자신이 부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조차, 우리를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라 여겨온 것이 분명하지 않소?”
군중들의 야유와 함께, 이지도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아니, 아니야.
나조차도, 다른 귀족들과 다를 게 없었다고?
내가, 그랬을 리가.
이지도르가 재판정에 대고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리고, 이 도시에서 사그라든 수백, 수천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판결이 선언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본 공화국 법정은 피고인 피에르 드 라파 예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우악스러운 손에 끌려가면서,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이 걸린 단두대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피비린내가 진하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야유와, 혐오와, 조소만이 내 눈에 새겨졌다.
죽고 싶지 않아.
적어도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
만약,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를 긁고, 끔찍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아아아악!”
나는 몸서리치며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