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4 [EP14.회귀]―
[EP14.회귀]
“네 동생의 심장이 터져서 없어졌구나.
대신할 인간의 심장이 필요하다."
꿀꺽.
재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단군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심장만 있으면 혜선이 살 수 있습니까?”
"그렇대도."
"제 심장이라도 괜찮습니까?"
“네놈 심장에 담긴 마나라면 단순히 사는 것뿐만 아니라 여생을 잔병 없이 건강하게 살다 죽을 수도 있다.”
재준이 고개를 돌려 혜선을 쳐다봤다.
창백하게 식어서 하얗게 변해버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재준이 각오를 다졌다.
자신을 희생해서 혜선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렇다면 제 심장을 꺼내서 쓰십시오.
대신 부탁..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재준이 너무 쉽게 자신의 심장을 내놓겠다고 해서 그럴까.
단군이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혜선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 세계에 마왕들이 있다면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 마왕들까지도 나보고 처리해달라는 거냐?”
“...안 되겠습니까?”
“나라고 마음대로 세상에 개입해서 힘을 써대기는 힘들다.
더구나 네놈 때문에 벌써 너무 많은 인과율을 써버렸어.
그건 힘들겠구나.”
재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세상이라면 혜선이 되살아난다고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
오히려 죽은 자보다 산자가 더 고통스러워지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법이 또 없지는 않겠구나.”
단군의 시선이 벨페고르를 넘어 어딘가를 향했다.
“또 다른 마왕이 오는군.”
“...사탄입니까?”
“아니.
탐식의 마왕이다.”
놀라는 재준을 보고 단군이 말을 이었다.
“아아.
네놈한테 붙어있던 게 다른 놈에게 옮겨갔을 뿐이다.
놈이 단단히 허기가 진 모양이군.
앞뒤 가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말이야.”
단군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아.
우선은 네놈의 동생을 살리기 전에 마왕들은 내가 어떻게든 해보마.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라.
동생을 위해 희생을 결심한 네놈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단군은 재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악!]
[죽여라아!]
콰드드득!
재준의 권속들과 악마들은 멈췄던 동영상이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전투를 이어갔다.
다만.
벨페고르만은 아니었다.
잠시 멈춰있던 이질적인 시간의 차이를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단군을 발견했다.
“...”
단군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군.”
단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마치 유성처럼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일대의 땅이 갈라져 내려앉고 휩쓸린 마족들은 전부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하하하하하!
나만 빼고 파티 중이었잖아?]
‘..태성이?’
재준은 쓰러진 상태에서도 태성을 정확히 알아봤다.
모습이 다소 이상하게 변하긴 했어도 아직 인간의 모습은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
[으응?
재준 형님?]
태성도 재준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만 다가와라.”
[...뭐야 당신은?]
단군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막아섰다.
“나는 이 놈을 잠시 동이지만 지켜야 될 의무가 있거든.”
[내가 우리 형님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군침 흘리면서 다가오는데 아니라고?
거짓말이 서툰 마왕이구먼.”
태성이 씨익 웃었다.
[크크크큭.
뭐.
어차피 팔다리 잘린 병신인데 내가 먹어주면 좋은 거 아냐?
안 그래요 형님?]
재준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이 저렇게 변해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아니,태성에 대해서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럼.
이쪽은 잠시 보류라고 치고.
다른 쪽으로 가볼까나.]
꾸르르르르륵
태성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배가 고파 뒤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서두르자고.]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콰앙!
벨페고르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지만 태성은 멈추지 않았다.
양손에 일렁이는 기운으로 벨페고를 후려갈겼다.
벨페고르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잽싸게 물러나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콰아아아악!
타라사의 머리도 거침없이 부셔 뜨리던 음침한 기운이 태성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퍼억!
태성의 얼굴이 반쯤 터져나가며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반쪽의 얼굴은 여전히 씨익 웃으면서 벨페고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황한 벨페고르가 결국 한 손을 태성에게 붙잡혔다.
태성의 몸에서 뻗치는 검은 마기가 손을 타고 올라왔다.
스걱!
벨페고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쪽 팔을 자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잘린 팔은 태성이 그대로 입가에 가져가서 순식간에 씹어먹었다.
으적으적!
자신의 팔이 씹어 먹히는 광경을 보면서 벨페고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탐식의 마왕!”
벨페고르의 한쪽 남은 손이 태성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곳에 있던 모든 악마들이 재준의 권속들을 상대하던 것을 멈추고 오직 태성에게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악!
키이이이익!
수만 마리의 악마들이 달려들자 마치 검은 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태성의 몸이 커다란 입처럼 변하면서 악마들을 모조리 삼켜대기 시작했다.
으적으적!
콰드드득!
워낙 악마들이 많아서 태성은 곧 악마들로 인해 둘러싸이고 말았다.
벨페고르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우선은 자리를 피하고 나중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터엉!
하지만 벨페고르는 생각대로 도망치지 못했다.
공간 자체를 가로막은 듯한 단단한 결계 때문이었다.
‘설마 탐식의 마왕이 결계까지 쳐놨단 말인가?’
하지만 절대 탐식의 마왕의 솜씨로는 보이지 않았다.
벨페고르의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개 같은 늙은이 이거 당장 풀지 못해?”
결계를 구성하는 마력이 단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인과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이거 풀어!”
벨페고르가 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음침한 기운을 쏟아냈다.
하지만 단군의 근처로 가기도 전에 그 기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이익!”
재준과 싸울 때는 보인 적 없는 다급한 모습이었다.
악마들을 잡아먹던 태성은 이제 서서히 몸이 부풀어 오르며 수십의 입이 달린 괴물의 형체가 되어갔다.
그럴수록 악마들이 줄어드는 시간이 빨라졌다.
벨페고르의 양손에서 붉은 실타래가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재준의 팔과 다리를 잘라냈던 공격이었다.
엄청난 양의 실이 바람을 타고 태성에게 날아갔다.
악마들은 실에 닿기만 해도 뼈와 살이 베이며 산산조각이 되었다.
“죽어라!”
태성은 벨페고르가 무슨 짓을 하듯 악마들을 잡아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마침내 붉은 실들이 태성의 몸에 도달했을 때 커다란 입은 오히려 실타래를 먹어치우겠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스으으윽!
스걱!
실타래를 씹은 태성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벨페고르가 득의가 만면한 표정으로 내려다 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꾸물꾸물.
화아아악!
태성의 몸이 다시금 반죽처럼 합쳐지더니 검은 마기가 터져 나왔다.
[배고프다.
먹어도 배가 고파!
배고파서 뒤지겠다고!]
마기는 커다란 입이 되어 벨페고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크헉!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순 없어!”
[배고파아아!]
으적으적!
벨페고르가 마기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한 손을 휘적였다.
하지만.
그 손마저 마기가 감싸더니 태성의 배속으로 끌려갔다.
으적으적!
꿀꺽!
그리고 남은 악마들마저도 전부 집어삼켰다.
“어휴.
지독한 놈이네.”
그 엄청난 광경에도 단군은 그저 몇 번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탐식의 마왕이 사탄도 모자라서 벨페고르를 집어삼켰으니 이제 남은 마왕은 너와 저놈 뿐이구나.”
태성은 벨페고르를 집어삼킨 후에도 입맛을 다시며 단군에게 다가왔다.
“죽이는 건 힘들더라도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단군은 허공을 향해 손을 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갈라지며 차원의 문이 열렸다.
붉게 일렁이는 표면을 보니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였다.
[뭐야?
날 저기로 밀어 넣겠다고?]
“거기 안에 널 기다리는 놈이 있을 테니 얼른 가봐라.”
[미친 늙은이 크크크큭.
한번 넣어보시지?]
“그럴까?”
단군은 땅을 가볍게 벅차올랐다.
[풍신!]
단군의 손짓한 번에 땅에서 소용돌이가 솟아올랐다.
소용돌이는 단숨에 태성을 땅에서 끌어올렸다.
“네 말대로 쳐넣어 주마!”
[크아아아아악!]
태성이 몸부림치며 마기를 여기저기 흩뿌렸다.
[뇌신!]
하지만 단군의 주먹에 맺힌 번개의 기운이 곧게 뻗어 나와 태성을 가격했다.
파지지지직!
태성의 몸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게이트는 곧바로 사라졌다.
"후우!"
단군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재준에게 돌아섰다.
“자.
이제 인간계에 남은 마왕은 너 하나뿐이다.
이제 후회 없이 죽을 수 있겠지?”
“...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권속들이 보였다.
헤스티아부터 시작해서 시트리.
그리고 미노와 초창기의 5대 권속들까지 전부였다.
“저들은 걱정 말고 소환해제 해라.
더 좋은 주인을 만 날테니.”
“...”
“뭐하냐?”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하면 거짓이었다.
가족과도 같이 지냈던 사이었으니까.
재준은 그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
재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지내라.”
재준은 권속들에게서 뭔가의 말이 나오기 전에 일제히 소환을 해제했다.
그들은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가겠지.
제일 걱정인 건 헤스티아였다.
‘...미안하다.’
재준은 각오를 다지고 단군을 쳐다봤다.
“...이제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오래도 걸리는 구나.”
단군이 재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수고했다.”
푸욱!
재준은 가슴으로 파고드는 이질적인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단군의 손은 정확히 재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파악!
단군의 손길에 혈관의 다발이 뜯겨나가며 심장이 빠져나왔다.
심장은 여전히 벌떡이며 세차게 뛰었다.
재준의 심장은 그대로 혜선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단군의 손이 빠져나오자 가슴의 상처가 아물며 혜선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아”
혜선은 되살아났다.
“이제 여한 없지?”
재준이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와 정신 속에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숨 자고 일어나라.”
재준은 의미 모를 단군의 말 뒤로 그대로 정신이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