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EP2.뱀파이어의 성]―
[EP2.뱀파이어의 성]
던전관리과 윤미경은 모처럼 만의 비번이었다.
매일같이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집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지.’
집에서 잠만 자고 꿀 같은 비번을 보내는 건 너무 아까웠다.
오랜만에 안경을 벗고 렌즈도 끼고 화장도 했다.
친구들이랑 밥이나 먹고 영화나 볼 생각이었다.
평소 일할 때는 바빠서 애인은커녕 그냥 남자인 친구도 못 만났는데 쉬는 날이면 없는 애인도 그리워졌다.
‘한번 연락해볼까?’
핸드폰에는 최근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는 남자의 번호가 떠 있었다.
‘갑자기 전화해서 영화나 보자 하면 싫어할까?’
윤미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분명 그 남자는 오늘도 던전이나 공략 중일 것이다.
‘F급 던전 아무리 공략해봤자 뭐가 좋다고.’
밖으로 나온 윤미경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혼자서 쇼핑이나 할 생각이었다.
백화점에서 돌아다니는데 멀리서 익숙한 남자를 봤다.
전화하려다 만 최재준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인사하려는데 옆에 같이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친구인가?’
윤미경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기며 최재준을 따라 다녔다.
다행히 여자친구는 아니고 여동생이었다.
‘다정하구나.’
재준을 바라보는 윤미경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매장 뒤편에 서서 힐끗거리는 그녀를 매장 직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윤미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체면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우우우웅
순간 발밑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잘못 느낀 건가?
재준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는걸 보면 혼자만 느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발밑이 떨렸다.
이번에는 백화점 전체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야!”
발목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지진인가 봐!”
“숙여요!”
사람들은 가판대 밑으로 들어가거나 머리 위에 가방을 들고 바닥에 웅크렸다.
윤미경도 똑같이 몸을 숙이는데 쏜살같이 뛰어가는 재준의 모습이 보였다.
‘응?’
콰앙!
재준은 커다란 불꽃의 창을 쏴서 백화점 벽을 뚫었다.
왜 저러는 거지.
하지만 잠시 뒤 윤미경은 재준의 행동을 이해했다.
백화점은 이상한 기운에 휩싸였다.
붉은 막.
어디선가 나타난 몬스터들.
헌터 협회 소속인 윤미경은 이것과 비슷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3년 전에 세계에 벌어졌던 재난이었다.
곳곳에 생겨난 게이트들에서 수도 없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게이트처럼 몬스터들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고서야 막아낼 수 있는 대참사였다.
지금 이 백화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또한 3년 전 던전 브레이크와 비슷했다.
“꺄아아아아악!”
“살,살려줘요!”
적어도 C등급 이상에서만 발견되는 가고일이 악취를 풍기며 사람들을 사냥했다.
가고일은 장난치듯 사람들의 머리통을 툭툭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끼이이이익!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놈들의 눈이 커다란 불덩이처럼 깜빡였다.
‘도망가야 해!
헌터들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해!’
저렇게 많은 가고일을 상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윤미경은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바로 옆의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몇몇 사람들이 같이 들어와 매장 문을 닫았다.
윤미경은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지만 오다가 도중에 흘렸는지 없었다.
‘그냥 집에나 있을걸!’
윤미경은 좌절한 채 매장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때 누군가 윤미경의 이름을 불렀다.
―
“윤미경 씨?”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윤미경은 갑자기 들리는 자기 이름에 고개를 홱 하고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재준을 쳐다봤다.
항상 쓰던 안경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흐릿해 보이던 눈동자의 초점이 점차 뚜렷해지더니 재준을 알아봤다.
“최재준 씨!”
윤미경은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재준을 확하고 껴안았다.
항상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재준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들어와 있던 남자가 재준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어이!
여기는 꽉 찼으니까 밖으로 나가!”
재준은 어이가 없어서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뭘 봐?”
“자리 없다잖아!
몬스터가 들어오기 전에 문 닫으라고!”
그 뒤에 있던 아줌마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매장에 미리 들어왔던 사람들은 그게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재준을 쫓아내려 했다.
참나.
재준은 어이가 없었다.
척 봐도 매장 안은 널찍했다.
‘이기적인 사람들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한 대씩 쥐어패고 싶지만 괜한 소란을 피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준은 재빨리 마루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윤미경은 매장 안을 힐끔 쳐다봤다가 재준을 따라갔다.
바로 얼마 뒤 허공을 날던 가고일 한 마리가 매장의 유리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쨍그랑
“꺄아악!”
“살,살려줘!”
그리고 불과 몇 분 만에 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가고일의 날카로운 발톱에 의해 전부 뜯겨 죽었다.
―
“꺄아아아악!”
끼이이익!
끼이익!
멀리서도 선명히 들릴 정도로 날카롭고 커다란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가고일의 괴성도 들려왔다.
재준은 비명의 진원지를 멀찍이 쳐다봤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
방금 전까지 재준이 있다가 이동한 매장 방향이었다.
가고일은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던 위치에서 멀어지며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재준은 조심스럽게 윤미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채 2평 정도 될까?
이곳은 청소도구를 모아두는 작은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숨을 곳을 찾다가 재준이 발견한 곳이었다.
재준이 방으로 돌아오자 마루가 바지춤에 꼭 하고 달라붙으며 칭얼댔다.
“혀엉.”
“그래.
조금만 참아.
곧 헌터들이 올 테니까.”
재준은 마루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달랬다.
하지만 재준도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런 초유의 사태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헌터 협회 소속인 윤미경도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지 못했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윤미경 씨.
혹시 이 던전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재준의 질문에 윤미경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이곳이 던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던전이라고요?”
원래대로라면 던전의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한가지 뿐이었다.
게이트가 필드에 생성된 지 오랫동안 방치되었을 때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헌터 협회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하는 일이 전국에 마력 계측기를 설치하고 게이트 발생을 감시하는 일이었으니까.
치안이 부족한 북한이나 대륙이 넓은 아프리카,몽골 정도나 게이트 관리에 실패해서 몬스터의 땅이 된 상태였다.
대한민국에 이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주변에 게이트 따위도 없었어.
이렇게 외부와 단절되는 경우도 없었고.’
“가끔 이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긴 했었어요.”
“비슷한 일이요?”
윤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대 지역의 사람들이 단체로 실종되는 일이요.
하루아침에 시골의 사람들이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진다거나 몬스터에게 살해당해 있다거나요.
단순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몬스터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겪어보니 아니었나 보네요.”
“그럼 헌터들은?”
“이번에는 서울 한복판.
백화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게든 사태파악을 하려고 하겠죠.
다만...”
윤미경이 어두운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던 부산의 A급 게이트 때문에 인력이 거의 없을 거예요.”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긴 힘들다 이거군요.”
윤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은 다시 한번 받았던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렸다.
[뱀파이어의 성에서 살아남아라!]
[뱀파이어 성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발버둥 쳐야 한다.]
[보상 : 탈출]
[실패 : 죽음]
[남은 시간 : 332분]
퀘스트의 내용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것이 전부였다.
체감상 몇 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 겨우 30분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후우.’
차라리 일반 던전이었으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다.
던전의 탈출구가 정확했으니까.
이렇게 숨어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크르르륵
밖에서 가고일의 날갯짓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가고일은 코를 킁킁대면서 인간을 찾고 있었다.
그러더니 육중한 몸을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꺄아아악!
절로가!”
“그,그마아안!”
사람들의 절규가 들렸다.
퍼억!
피와 살점이 튀기는 거북한 소리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섞여 들렸다.
푹!
콰드득!
날카로운 가고일의 발톱이 사람들의 몸을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살점 덩어리가 걸려있었다.
윤미경은 마루의 귀를 틀어막고 못 듣게 했다.
재준은 살짝 벌어진 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때 화장실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핏물에 온몸에 젖은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도망쳤다.
“으흐으으.
살려줘!”
남자는 비틀대다가 재준이 있는 창고 앞에서 풀썩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손에 묻은 질척거리는 피 때문에 자꾸 미끄러졌다.
그때 남자의 눈이 재준과 마주쳤다.
“응?
거,거기!
제발!”
남자의 손이 재준을 향해 뻗어왔다.
“살,살려줘!”
두려움에 찬 남자의 눈동자가 눈물로 범벅이었다.
“나,난 죽을 수 없어.
딸이,딸이 기다린다고!
”
쿠웅.
남자의 뒤편에 가고일이 내려섰다.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흉포하게 빛났다.
크르르르―
재준은 나설 생각이 없었다.
미련함과 용기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줄 알았다.
지금 문을 열고 나서는 건 미련함이다.
재준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절망에 젖는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의 신호음이 머리를 울렸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남자를 구하라!]
[남자는 절박하다.
2년 전 잃은 아내를 대신해 혼자 키우는 딸아이를 두고 죽을 수 없다.
구원을 바라는 남자에게 손을 뻗어라!]
[보상 1 : 저주받은 키의 사용조건]
[보상 2 : 상점 골드 3000개]
[실패 : 가고일의 분노]
“돌발 퀘스트?”
동시에 남자의 머리 위로 가고일의 발톱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재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재준 씨!"
뒤에서 다급한 윤미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나가는 재준의 손에는 어느새 아공간에서 뽑힌 서리칼날이 들려 있었다.
―작품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