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EP1.마나수치가 MAX?]―
[프롤로그]
드디어 때가 되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남자는 씨익 웃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화르륵!
남자가 손가락을 따악하고 튕기자 주변에 검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낡은 고서가 그의 앞으로 날아와 스스로 펼쳐졌다.
책을 살펴보는 그의 눈동자는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흔들거리며 책을 읽어나가는 눈동자가 책의 어느 한 부분에서 덜컥하고 멈췄다.
'찾았다.'
그가 주먹을 쥐자 날카로운 손톱이 손을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적셨다.
후드득!
남자의 입술이 벌어지며 고저 없는 음성이 방안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남자의 입술이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
[EP1.마나수치가 MAX?]
1년 전 재준은 F급 헌터로 각성했다.
그의 능력은 [더게이머]
게임에서처럼 능력치를 시스템 창으로 보고 레벨업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도 재준은 여전히 F급 헌터였다.
그가 [더게이머]란 훌륭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강해지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투 공포증'
몬스터 앞에 서기만 하면 온몸이 떨리고 머릿속에 하얘졌다.
거기다 억지로 싸우려고만 하면 기절해버리기 일쑤였다.
몬스터만 보면 쓰러지는 최약체 헌터.
‘기절 헌터’
사람들이 재준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기절헌터 따위와 같이 사냥하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재준은 어쩔 수 없이 헌터의 길을 포기했다.
―
“어이!
이리와!”
현재 재준은 이름보다 '어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게이트 짐꾼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헉헉.”
뜨거운 숨이 입 밖으로 거칠게 터져 나오고 얼굴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두 다리는 이미 한계라고 부들부들 떨렸다.
게이트 짐꾼들은 헌터들이 게이트를 공략하면 그 부산물들을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일이었지만.
전투에 휘말려 죽는 것은 물론이고 헌터들의 무시를 받는 것도 허다했다.
그런데도 재준이 계속 게이트 짐꾼을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3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기신 빚이 1억이 넘었다.
더구나 하나뿐인 여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이라 재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재준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으윽.”
이미 아슬아슬하던 재준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뭐 하는 거야?”
헌터는 짜증 섞인 얼굴로 재준을 노려봤다.
그의 이름은 최성우.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눈살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그의 친형이 대한민국 1위 길드 '어나더' 의 부길드장 이었기 때문이었다.
“너 때문에 늦어지는 거 안 보여?”
재준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성우는 얼마 전부터 재준만을 집요하게 노리며 괴롭혔다.
일부러 짐을 재준에게만 몰아준다거나,쉬는 시간에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던전에서 짐꾼들을 괴롭히는 일은 그의 색다른 취미 중의 하나였지만 재준에게는 유독 집요하고 심했다.
“이제 곧 보스야.
다들 정신 차리자고!”
최성우는 짐짓 게이트 공략의 리더인 것처럼 사람들을 독려했다.
이번 게이트의 실제 공략 리더인 남자가 옆에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게이트 공략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이 게이트의 등급은 E등급인 것에 반해 어나더길드에서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D등급에서 C등급을 이루고 있어서 게이트 공략에 전혀 어려움은 없었다.
‘이제 보스만 죽이면 끝이다.’
재준의 눈에 커다란 공동이 들어왔다.
그 안에는 보스로 보이는 커다란 고블린이 보였다.
헌터들은 보스 방 앞에서 잠깐 휴식과 정비를 하기로 하고 멈춰 섰다.
털썩.
‘후우’
재준도 무거운 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 짐꾼들도 한자리에 모여서 가져온 물이나 커피를 꺼내 마시며 몸을 풀었다.
짐꾼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박 씨 아저씨가 재준에게 따듯한 커피를 건넸다.
“괜찮나?
이거라도 마시게.”
“감사합니다.”
박 씨 아저씨는 마정석이 가득 든 가방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에휴.
고생이 많네!
많아.”
“아닙니다.”
“자 이제 움직이자고!”
멀리서 공략팀 리더의 외침이 들려왔다.
몇 모금 마시지 못한 커피가 아쉬웠지만,재준은 바닥에 커피를 쏟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고블린들이야 많이 상대해봐서 잘 알지?
독침만 조심하면 어려울 것 없으니까.”
짐꾼들을 슬쩍 쳐다본 리더인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짐꾼들은 보스 방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붙어 있어.”
“네.”
그리고 보스 방 공략이 시작되었다.
헌터들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보스 방에 들어가자마자 주변의 보스를 제외한 마수들부터 하나씩 처리했다.
스걱!
키이이익!
키이익!
헌터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도 저렇게 싸울 수 있었으면!’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데도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떨림은 흥분이 아니라 공포 때문이었다.
재준은 티를 최대한 내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어엇!
뭐 하는 거야!”
그때 최성우가 갑자기 혼자 앞으로 뛰어나갔다.
리더를 포함한 몇몇 헌터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차앗!”
키이익!
최성우가 휘두른 검에서 시퍼런 기운이 쏟아지며 고블린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그의 어설픈 공격은 고블린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광분한 고블린이 중구난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키이익!
키익!
하필이면 고블린이 향하는 방향은 게이트 짐꾼들이 서 있는 뒤편이었다.
재준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짐꾼들은 물건을 내팽개치면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재준만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움,움직여!’
마음속 외침과 달리.
온몸은 힘이 쭉 빠지면서 단 한 걸음도 까딱하지 못했다.
쿵쿵―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달려오는 고블린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
재준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반대로 고블린은 떨고 있는 사냥감의 모습에 사냥 욕구가 치솟았다.
살기를 뿜어대는 인간들보다는 훨씬 쉬운 사냥감이었다.
고블린은 재준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키이익!
고블린이 쥐고 있는 녹슨 창을 휘둘렀다.
푸욱―
"크헉!"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이질감에 재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블린은 재준을 꿰뚫린 채로 들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쿠웅!
재준은 몇 번이나 바닥에 몸이 튕기며 굴렀다.
가슴이 불에 타는 것처럼 화끈하고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뭐지?'
가슴에서 뜨끈한 피가 쏟아져 내렸다.
재준에게 커피를 줬던 박 씨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재준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있어야 할 부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안돼!’
재준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갈수록 손과 발에서 힘이 빠져갔다.
눈에 힘이 풀리며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죽기 싫어!’
심장이 뿜어내던 피가 바닥을 적히고 재준을 집어삼키듯 웅덩이를 만들었다.
제발.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제발!
누가 좀!
내 영혼이라도 바칠 테니!
[영혼이라도 바치겠다고?]
죽어가면서 듣는 환청인가?
섬찟하지만 한없이 달콤한 목소리가 재준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재준의 주변은 거짓말처럼 뚝―하고 시간이 멈췄다.
촤아아악―
재준의 핏물이 벌컥벌컥 솟더니 서서히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핏기가 빠진 재준의 얼굴보다 더 하얀 피부.
그리고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
눈앞의 남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준은 상대가 악마든 천사든 간에 상관없었다.
남자는 허공에서 재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혼을 대가로 너를 살려주마.
아니,살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강대한 힘을 너에게 주마.]
"...정말입니까?"
[그래.
정말이다.]
남자의 눈이 요요히 빛났다.
재준은 알겠다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해준다고.?'
이를 한번 꽉 깨문 재준이 입을 열었다.
“...저에게 원하는 게 영혼이 다입니까?”
말을 뱉어내는 재준의 입술이 과다출혈로 인해 떨렸다.
남자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영혼 말고 네가 나한테 줄 것이 있더냐?]
비웃는 듯한 남자의 말에 재준이 고개를 떨궜다.
[영혼!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남자는 단언하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재준이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영혼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누구한테도 무시당하지 않을 힘을!”
[누구한테도 무시당하지 않을 힘?]
남자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그,그렇습니다···.
그 누구보다 강한 힘!”
재준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말을 마친 재준의 눈동자가 탁한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적안의 남자는 재준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너와의 계약!
성사되었다!]
―작품 후기―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