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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36화 (336/337)

나 혼자만 마탑주 336화

Epilogue 2

그녀는 계속 여행을 떠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막을 넘고.

극지를 지나.

방대한 정글을 통과했다.

온몸이 망가지고 골병이 들었어도 그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대륙을 횡단해 최서단의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식량과 물을 조달하고 배를 탈 생각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녔는데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인류의 소식망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 탑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번엔 더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선박 청소 아르바이트를 구하신다고 해서요."

그녀는 뱃값 벌이를 위해 마을을 돌아다녔다. 긴 수염에 근육질의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안돼, 안돼. 여자를 배에 들이면 재수 없어진다고 항의 들어온다고."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한 대접이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고개를 꾸벅숙이고는 밖으로 나가서 일자리 공고가 붙어 있는 게시판을 살폈다.

"찾았다! 홍연 백작님!"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 갑주를 입은 이 남자는 홍연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론 경?"

"여기 있으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아론은 홍연이 보고 있던 게시판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웅께서 이런 잡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냥 영지성에 가서 제국의 백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돈을 받아내면 될 텐데."

"전 작위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외지에서 신분을 앞세워 돈을 갈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똑 부러지시네요. 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아론이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전해 드리려고 여기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이게 뭔가요?"

"백작님이 찾고 계셨던 탑에 대한 소식입니다."

홍연이 얼른 양피지를 펼쳐서 읽어보았다.

키올라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에 정체불명의 탑이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키올라 왕국이라면 내가 처음 떨어졌던……'

그 탑은 그녀의 첫 도착지로부터 200km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물론 적지 않은 거리였지만, 그녀의 그간 이동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작님이 말씀하신 회색 외벽에, 9층 탑이라는 구조까지 전부 일치합니다. 너무 깡촌이라서 소식이 늦게 전해진…… 백작님?"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양피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그녀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정말로 사연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제가 수배해 뒀습니다. 뱃삯도 다 치렀으니까 바로 올라타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죠? 저는 제국의 직위를 거절했는데."

아론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도와드리는 게 당연하죠. 백작님은 대영웅이니까요! 저번 수도 방위전에서 폭주한 드래곤을 쫓아주지 않았다면 수도의 2, 000만 제국민들이 불타 죽었을 겁니다."

"……."

도움을 준다면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일주일을 항해해서, 그녀는 키올라 왕국의 항구에 도착했다.

이 항구에서 양피지에 표시된 지점까지 또 긴 시간을 걸어야 했다. 굳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마을에서 나와 숲의 초입을 지나고 있을 때.

-홍연이다!

-홍연! 홍연! 홍연!

숲의 정령들이 다가와 그녀의 몸에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 이제는 익숙한 상황이었던 홍연이 정령들을 손가락에 앉히며 귀여워했다.

-어딜 가느냐 아이야.

숲의 어딘가에서 정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리맨 마을로 가고 있어요."

쿠구구구구구구!

그녀가 대답하기 무섭게 바닥에서 나무뿌리가 일어나더니 홍연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의 눈높이가 점점 더 높아졌다. 나무 꼭대기의 잎이 머리에 닿더니, 이내 숲의 경치가 전부 내려다보이게 됐다.

바닥에서 일어난 것은 거대한 고목이었다. 눈과 입이 달려 있고 무수히 많은 줄기들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우리 정령계는 그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리맨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다.

-데려다줘! 데려다줘!

고목은 그 커다란 몸으로 숲을 가로질러 걸었다.

주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고, 일주일 거리를 몇 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홍연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령님."

-안녕! 안녕!

-자연의 은총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고목과 정령들이 떠났고, 홍연은 탑으로 가는 마지막 거점인 리맨 마을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서 탑에는 내일 찾아 가기로 하고, 일단은 여관에 들어갔다.

'내일이면 선배를 볼 수 있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그동안 거울 한번 본 적 없이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지냈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들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었다. 상처나고 다친 부분에 리커버리 마법을 시전하자 다시 하얗고 말끔한 피부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향수도 뿌리고, 이 세계의 로션 같은 것도 얼굴에 바르는 등 기분을 냈다.

그녀는 마법의 힘으로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그녀는 마을에서 마차를 구했다.

"마수의 숲으로 가주세요."

마차 뒷좌석에 올라탄 홍연이 말했다. 마부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마수의 숲?"

"예."

마부가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앞발을 내디디고 바퀴가 굴러 가기 시작했다.

"나야 돈을 주니까 가긴 하는데, 그 음침한 숲에는 뭣 하러?"

"……아하하, 그냥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요."

"보통 그 숲은 잘 안 가려고 하거든. 이상한 탑이 있잖어."

어느 날 갑자기 숲 한복판에 뚝 떨어진 거대한 탑은 마을 주민들의 주요한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워낙 소문이 흉흉하기도 하고."

마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몬스터들을 불러 모으는 탑이라느니. 그 안에 세상을 침략할 마수들이 우글거릴 것이라느니."

홍연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백경백 나으리가 나서서 탑을 철거하려 했다는데 글쎄, 화살이든 마법이든 탑에 흠집도 못 냈다는 거아녀!"

"대단하네요."

"아가씨 차림을 보니까 마법사인 것 같은데, 그래도 몸 조심혀."

홍연은 수다쟁이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탑은 몬스터를 불러모으지 않고.

안에는 마수도 없다.

그저 한 남자가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마차로 몇 시간을 이동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서서히 그녀의 눈에 탑의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같이 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마부가 말을 멈춰 세웠다.

"더 들어가면 몬스터가 나오거든."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마부에게 삯을 지불하고 홀로 숲으로 들어갔다.

'선배.'

탑이 가까워질수록 수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정말 저 탑이 맞을까?

선배는 무사할까?

만나면 뭐라고 말할까?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제대로 걷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걸었는지도 알 수 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정신없이 걷고 있는 가운데, 어느지점부터 숲에 회색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숲의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안개 결계.'

그녀는 눈을 감고, 유신이 안계결계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떠올렸다.

-안개결계의 파훼법은 간단해. 체내의 마나를 외부로 흘려놓고, 그 마나가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는 거야. 마탑은 일종의 피뢰침이라서 마나를 끌어모으는 성질이 있거든.

그녀가 손끝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소량만 방출하면 대기 중에 흩어졌지만, 밀도를 강하게 해서 흘려보내니 정말로 나침반처럼 일정한 방향성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가 흐르는 방향으로 걸었다.

"……아."

그러자 어느 순간 그림같이 안개가 확 걷히고, 탁 트인 장소에 우뚝 솟은 탑이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서 보니 외형은 그녀가 알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마탑의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유신이 마탑의 문양을 그녀의 팔에 새겨주었기에, 조심스럽게 정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우우웅!

몸이 쑥 빨려드는 느낌과 함께 탑 안으로 들어왔다.

"……."

한 줌의 빛도 찾아 볼 수 없는 새까만 공간이 펼쳐졌다.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고 입김이 날 정도로 추웠다. 그녀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스릉.

청명한 소리와 함께 소드 디바이스가 뽑혔다. 그녀는 검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금안은 이제 어둠에 적응해서 주위의 사물들을 식별해 내고 있었다.

원목을 깎아 만든 반듯한 테이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유리관.

그리고 금색으로 덧칠된 소파.

그러다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잡지 하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잡지를 펼쳐보았다.

'한글……!'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한글일까?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가 내가 아는 마탑이야. 틀림없어.'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아직 감격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유신도, 그녀 본인도 위험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호문쿨루스 에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보라가 말해준 대로 마탑주의 장시간 활동 정지로 휴면 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홍연은 검을 앞세운 채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그러다 얼마안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저게 마법진 엘리베이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밟아보았다. 낮은 효과음 소리와 함께 허공에 버튼들이 주르륵 생성되었다.

1층부터 9층까지 모든 층에 푸른불이 들어와 있다.

'선배가 잠들어 있는 곳은 9층.'

버튼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겁쟁이처럼 굴지 마.'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버튼을 눌렀다. 두 다리가 붕 뜨는 부유감과 함께 순식간에 시야가 전환되었다.

제9층 마탑주의 방.

드디어,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앞을 응시했다.

보석으로 세공된 고급스러운 책상, 적갈색 가죽 의자, 탑의 바깥 정경이 보이는 투명한 벽까지.

혹여나 실수할까 봐 진보라가 세세하게 말해주었던 그 9층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책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방의 끝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바로 그곳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두근!

침이 바짝 마른다. 극도의 긴장감이 몰아친다.

지난 수년간의 노력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는 침착하게 검을 눕혀서 허공을 그었다.

마치 닫힌 가방의 지퍼를 잡아당기 듯, 허공이 찢어진다.

8공정의 '혼돈'을 사용하려면 이계를 소모해야 했고, 이계는 이 마탑 내부 전체였다.

그녀가 검을 허공에 그을 때마다 허공에서 방울 같은 것들이 흘려내려 검신에 묻는다.

[……아.]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광기에 찬 목소리와 함께, 보랏빛기체 같은 것이 침실에서 고개를 쑥내민다. 홍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육체! 생생한 인간의 육체!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그것은 영혼 상태의 네메시스였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건 틀림없이 유신. 기체 같은 네메시스의 몸 끝이 유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래, 그래! 지구의 수호자! 여기까지 왔느냐!]

방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치고 방안의 종이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내놔.]

네메시스의 몸집이 급속도로 부풀었다. 기체에 두 팔이 생기고, 얼굴에는 윤곽이 드러났다.

[그 육체를 내놔아아아아아!]

네메시스가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홍연은 검을 휘둘렀다.

스릉!

혼돈의 색이 입혀진 검격이 허공을 그었다.

[소용 없……!]

네메시스의 말이 멈췄다.

그 어떤 공격으로도 피해를 입힐수 없는 네메시스의 몸이, 찰나의 순간에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보랏빛의 영혼이 잿더미가 되어 흩어졌다.

방 안에 불었던 바람이 다시 잠잠해지며 허공을 어지럽히던 서류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끝났다.'

수 많은 세계들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대재앙의 최후는 단출했다.

홍연은긴 한숨을 내뱉으며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긴 여정이었다.

두근!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누워 있는 유신을 향해.

전투로 냉정해졌던 심장이, 유신을 보는 순간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틀림없다.

틀림없이 그 사람이었다.

타이탄 마법 때문인지, 신대륙에서 헤어졌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수염 없이 말끔한 인상이다.

지금 유신의 상태는 육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타이탄 마법을 두르고, 정신을 지키기 위해 레퀴엠마법으로 깊은 의식세계에 빠져 들어 있다.

정신세계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외롭게 싸워왔을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팔을 뻗었다. 원격 영창으로 유신의 침대에 푸른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나의 결속을 흩뜨려 유의미한 마력적 효력을 원천부터 무효화시키는 마법.

<하이 로드 캔슬레이션>

화아아아악!

푸른빛이 샘솟아 유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레퀴엠 마법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타이탄 마법은 마치 옷에 묻은 검은 얼룩처럼 유신의 몸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선배!"

그녀가 유신을 부르며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이 로드 캔슬레이션>×10

이번에도 푸른빛이 솟구쳐 올라 유신의 몸을 정화했지만, 얼룩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돌아오세요! 제발!"

그녀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8개의 서클을 일제히 돌리며 마력을 뿜어냈다. 해일과도 같은 푸른빛이 9층 전체를 일 순간에 덮었다.

<하이 로드 캔슬레이션>×100

화아아아아아아악!

세상이 청색으로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마침내 묵은 때 같던 유신의 타이탄 마법이 거뭇거뭇해지더니 이내 깨끗하게 사라졌다.

"하아, 하아."

그녀는 무릎에 손을 올리며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선배?"

유신은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 일어나시는 거예요?"

그녀는 울먹이며 유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계로 넘어왔다. 네메시스를 없앴다. 타이탄 마법도 무력화시켰다.

하라는 대로 다 하지 않았는가. 당신의 그 무모한 계획을 다 따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정작 당신이 일어나지 않는가.

"장난치시는 거죠? 충분히 겁먹었으니까 이제 일어나주세요. 제발…"

그녀가 간절한 얼굴로 유신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환희가 사라지고 짙은 절망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는 무너지듯 유신의 품으로 쓰러졌다.

조용한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 적막이, 이 고요가, 세상에 무엇보다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뭘 구하러 오란 건데."

슬픔은 울분으로 변했다.

"뭘 기다리겠다는 건데!"

그녀가 유신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대체 뭐가 최선이란 건데요? 남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 당신을 희생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 안 해봤어요? 언제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때, 그녀의 어깨에 툭 얹어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홍연은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무거워."

어느새 유신의 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특유의 삐딱한 미소와 함께.

"아아…… 아아아아아아!"

홍연이 부들부들 떨며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유신은 누운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넌 어째 볼 때마다 울고 있는 것 같아."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유신을 힘껏 끌어안았다.

"……."

유신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멍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홍연이 해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안도감이 몸을 타고 흐르고, 피가 돌았고, 감각이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보자, 심장도 뛰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어?"

"……네."

"얼마나?"

"많이 많이요."

자신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칭얼대는 모습이 사뭇 귀엽게 느껴져서 유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다시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깜빡이며 유신을 바라보았고, 유신도 선명히 푸르게 변한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웃었다. 유신도 감정이 복받쳤다.

두 사람은 서로 울고 웃으며 눈을 마주하고, 손을 잡고, 머리를 서로 맞댔다.

그녀가 배시시 미소 지었고, 유신도 이를 보이며 웃었다. 활력이 폭발하고, 세포가 살아 있음을 노래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행복했다.

"돌아가자."

유신이 말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는 햇살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네메시스는 파괴됐고, 지구를 지나 차원의 끝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재회했다.

수백 번 되풀이 된 재앙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기록되는 인류의 승리.

그 중심에는 마탑주와 수호자가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요."

햇살이 쏟아지는 방안에서 두 남녀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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